소설리스트

55화 (5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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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규와의 약속은 취소되었다.

    은호가 그대로 해주를 안고 병원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다리를 타고 흐르는 뜨끈한 감각이 피라는 것을 알아챈 것은 경은이 정 실장에게 끌려 나가는 것을 지켜보면서였다.

    안도와 함께 왈칵하며 피가 쏟아졌다.

    [해주 씨, 이왕이면 해주 씨 닮은 아이였으면 좋겠어요. 차은호 닮은꼴 말고. 잘 부탁해요.]

    어제, 그녀의 침실을 나서며 은호의 친구가 던진 말이다. 임신이 확실하다며 내일 꼭 병원에 가라고.

    2시 반, 몇 시간만 더 견뎠으면 됐는데.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연희병원 VIP실에 입원한 해주의 팔에는 링거 줄이 주렁주렁 달리게 되었다.

    정신없이 병원에 실려 와 뭐가 뭔지도 모른 채 진료를 받았고, 곧장 병실로 옮겨졌다.

    주치의도 간호사도, 심지어 은호까지 아무 말 없었지만 알 수 있었다.

    아이를, 아이를 잃어버린 모양이다.

    오늘 아침까지 이어지던 열감이 사라졌고, 두통 역시 자취를 감췄다. 그토록 잠이 퍼붓더니 더는 노곤하지도 않았다.

    [영원히 내 옆에 묶어 둘 수 있는 핑곗거리, 생겼잖아.]

    은호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눈에 띄게 상기된 얼굴로 물기 어린 목소리를 내뱉던 은호가 심장에 박혔다.

    그 밤에 정 실장을 닦달해 구해 온 임신 테스트기로 기어코 답을 얻은 그는 그녀의 납작한 배를 연신 쓸어내렸다.

    [신기해. 이렇게 납작한데 아이가 자리하고 있다니.]

    느릿하게 어루만지는 손길이 다정해 코끝이 시큰해진, 그런 밤이었다.

    그게 불과 12시간 전인데, 아이를 잃다니.

    “이딴 영양제가 무슨 소용이 있어.”

    제 팔에 주렁주렁 달린 링거를 바라본 해주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러고는 가차 없이 주삿바늘을 뜯어냈다.

    붉은 피가 후드득 흘렀지만 개의치 않았다.

    신발이 보이지 않아 맨발로 병실을 나섰다. 다리에 힘이 없어 비틀거리는 모양새가 꼭 술 취한 사람 같았다. 그녀를 보고 기함하는 간호사를 지나쳐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환자분, 환자분 이러시면 안 돼요. 주삿바늘을 그렇게 뜯으시면 피가…….”

    간호사의 말에 시선을 왼팔에 두었다. 손등을 타고 피가 떨어지고 있다.

    “둬요. 피 좀 나면 어때.”

    피는 멎을 것이다. 상처 역시 아물겠지.

    “퇴원할게요. 집에 갈 거야.”

    왜 빨리 엘리베이터가 오지 않는 거야. 해주가 빨갛게 불이 들어와 있는 버튼을 성마르게 눌러 댔다. 어느새 다가온 간호사 두 명이 그녀의 팔을 붙들어 잡아당겼다.

    “환자분, 보호자님 오시면 퇴원하세요. 네?”

    “이것 놔요.”

    “환자분, 이러시면 안 돼요. 일단 병실로 가서 지혈부터…….”

    뒷말을 잇지 못한 간호사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은호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지금 이게 무슨…….”

    까만 눈동자가 상황을 살피더니 이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해주야.”

    “집에 갈래요. 내가 여기 왜 있어. 어디가 아프다고.”

    텅 빈 눈동자에서 더는 눈물조차 흐르지 않았다.

    “은호 씨.”

    피가 흐르는 손으로 은호의 옷깃을 거머쥐었다.

    “집에…… 데려다……줘요.”

    이상하게도 잠이 쏟아진다. 다시 몸이 나른해지고 혀가 뻣뻣해지는 기분이다.

    갑자기 왜……. 해주가 곁을 돌아보자 어느새 다가선 의사가 그녀의 팔에 주삿바늘을 꽂고 있다.

    텅 빈 눈동자에 다시금 눈물이 차올랐다.

    “차은호.”

    은호의 옷깃을 거머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은호를 올려다보자 차가운 눈동자가 검은빛을 발하며 그녀를 고요히 담아내고 있다.

    “당신 나빠.”

    눈물 줄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런 그녀의 눈물을 은호가 손끝으로 훔쳤다.

    “해주야, 조금 더 자. 그러면 괜찮아질 거야.”

    희미하게 멀어지는 은호의 목소리를 끝으로 해주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주삿바늘을 빼낼 때 정맥이 찢어져 피를 많이도 흘렸다. 그래서일까, 잠든 해주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생기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죽은 듯 잠들어 있는 해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은호가 가늘게 한숨을 토했다.

    “해주야.”

    잔뜩 억눌린 은호의 목소리가 조용한 공간을 갈랐다.

    앙상한 해주의 손을 잡아 올린 은호가 그녀의 손끝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손끝이 싸늘해 가슴 어딘가에 통증이 일었다.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것이 다 괜찮아지도록 만들어 놓을게.”

    다짐하듯 말한 은호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러니까 푹 자.”

    그때였다. 병실 문이 열리며 인기척이 느껴졌다. 해주의 손을 놓은 은호가 뒤를 돌아보았다. 꽃바구니와 과일 바구니를 든 윤규의 비서가 먼저 발을 들이고, 뒤이어 윤규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 가려던 참이니?”

    코트를 들고 있는 은호를 바라보며 윤규가 미간을 좁혔다.

    “네, 경찰서에 잠시…….”

    은호의 시선이 윤규 뒤를 따르는 원정에게 머물렀다. 순간, 까만 눈동자가 푸른빛을 발하며 차갑게 번득였다.

    “어머니가 여길 왜 오셨어요?”

    목소리는 지극히 무감했다. 나무라는 것도, 그렇다고 화내는 말투도 아니다. 그런데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차갑고 공포감을 불러일으켰다.

    “해주, 죽었는지 확인하러 오셨어요?”

    당황한 원정이 고개를 저으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은호야, 그게 무슨…….”

    “아, 돌려 드릴 게 있어요.”

    손에 들고 있던 코트 안주머니를 뒤적인 은호가 노란 종이 뭉치를 꺼냈다. 그러자 원정의 얼굴이 창백하게 핏기를 잃었다.

    이어 원정의 발아래로 종이 뭉치를 툭 던졌다. 은호의 행동에 윤규가 인상을 구겼다.

    “그게 도대체 뭐…….”

    뭐냐고 묻고 싶었던 윤규 역시 입을 다물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윤규의 시선이 원정을 향했다.

    “당신, 설마?”

    “아니에요. 아니야, 은호야.”

    고개를 빠르게 내저은 원정이 손을 휘저었다. 그저 아니라는 말만 반복할 뿐 그 흔한 변명조차 하지 못하는 모습에 은호가 실소했다.

    “내 집 곳곳에 이런 게 붙어 있었어요. 가장 많이 찾은 곳은 침실이었고요. 특히 침대 밑이나 해주의 드레스룸에 제일 많더군요.”

    종이 뭉치를 눈짓한 은호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이런 걸 악살이라고 하나 봐요, 어머니.”

    목소리에서 삐딱한 기운이 느껴지자 원정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아니야. 내가 왜 그러겠어.”

    은호의 기에 눌려 차마 눈물을 떨어뜨리지 못한 원정이 은호에게 다가가 애원하듯 말했다.

    “은호야, 믿어 줘. 난 너희 둘 무탈하게 살라고…….”

    하지만 원정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은호가 그만하라는 듯 손을 들어 올렸기 때문이다.

    서늘한 얼굴로 픽, 코웃음을 흘린 은호가 휴대전화를 매만졌다. 그러고는 버튼 하나를 꾹 눌렀다. 익숙한 목소리 하나가 흘러나왔다.

    -사모님 심부름으로 제가 직접 신률 도사님께 받아 온 겁니다.

    원정의 비서인 김 비서의 목소리다.

    -그래서? 용도가 뭘까요, 김 비서님?

    -본부장님이 급살을 맞도록 유도하는 부적이라고 들었습니다.

    -급살?

    -그러니까, 사고를 당한다거나 병이 나게 만드는…….

    하얗게 질린 채 바들바들 떠는 원정을 서늘하게 바라보며 은호가 음성 파일을 껐다. 그런 은호와 원정을 번갈아 바라보던 윤규가 노기로 몸을 떨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당신이 정말 이런 부적을 은호 집에 붙였어? 해주를 해치려고?”

    “아니에요. 그게…….”

    변명해 보려 했지만 할 말을 찾지 못한 원정이 뒷말을 잇지 못한 채 그저 입술만 뻐끔거렸다.

    그 순간, 은호의 눈빛에 웃음기가 설핏 어렸다.

    “어머니.”

    원정을 부르는 목소리 역시 다정하다.

    “이젠 어머니가 선택하셔야겠는데요?”

    자애로운 표정으로 선택권을 부여하는 은호는 그 어느 때보다 두려운 존재였다.

    “제 어머니로 여생을 편안히 사실 건지, 아니면 몰락하는 왕국의 여왕으로 가시밭길을 걸으실 건지 말입니다.”

    “……?”

    “신화건설, 비리가 아주 많던데요?”

    “은호야!”

    원정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지만, 은호를 막지는 못했다.

    “외삼촌이 기획하시고, 어머니가 주도하셔서 대성은행에서 불법 대출 받으셨죠? 그 과정에서 비자금도 조금 챙기셨고요?”

    은호의 말에 원정의 다리가 비틀거렸다.

    “물론 그 비자금의 대부분은 신률, 그자에게 들어갔고?”

    “그게 정말이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윤규가 제 아내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그러자 빨갛게 충혈된 원정의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은호가 픽, 웃음을 흘렸다.

    “명색이 창성금융그룹의 회장 사모님께서 푼돈 얼마 때문에 대성은행과 딜을 한 것도 웃기는 일인데, 점쟁이에게 한 달에 억 단위를 퍼부으시니 사람들이 손가락질할 수밖에요.”

    은호의 말에 원정의 턱이 덜덜 떨렸다. 대성은행과 딜을 한 것은 그녀와 그녀의 오빠만 아는 비밀이었다. 윤규 모르게 진행된 은밀한 일이었는데 어떻게 이 사실을 은호가 알고 있는 건지.

    신률에게 매달 1억 원가량의 헌금을 바치고 있다는 사실 역시 비밀 중의 비밀인데 말이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변명거리를 찾고 있는 원정에게 윤규가 기가 막힌다는 듯 말을 던졌다.

    “당신, 재작년에 대성은행 주식을 양도해 달라더니…… 그쪽이랑 뭔가를 한 거야?”

    “어쩔 수 없었어요. 오빠가 돈이 필요했는데, 당신은 못 도와준다고 하지. 다른 은행도 다 막혔지.”

    겨우 던진다는 변명이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이었다. 어차피 다른 변명은 통하지도 않을 테니 인정에 호소할 수밖에.

    “신화건설이 넘어간다는데 어떡해요. 대성은행에서 해 줄 수 있대서 주주총회에 힘을 실어 주는 조건으로…….”

    “나원정!”

    원정의 변명에 윤규가 성난 목소리로 고함을 버럭 질렀다. 깜짝 놀란 원정이 잠시 말을 잃었다.

    커다란 눈에 눈물을 그득히 담은 채 침묵하던 원정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신률 도사님께 드린 돈은 하나도 아까운 게 아니잖아요.”

    신화건설 불법 대출 건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적어도 신률에 관한 것만은 당당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분 덕에 창성이 이만큼 발전했고, 은호 사주도 잘 다스렸고, 또…….”

    “어머니.”

    원정의 말을 끊은 은호가 지루하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뭐 하나만 가르쳐 드려요?”

    그러고는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신률은 사기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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