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5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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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호의 말을 떠올린 해주가 입술을 꾹 닫았다. 그래도 이렇게 마주칠 줄은 몰랐는데. 떨리는 손끝을 말아 쥔 해주가 도도한 얼굴로 경은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많이 바뀌었네. 못 알아볼 정도로.”

    해주의 말에 경은이 픽― 웃음을 흘렸다.

    “어.”

    고개를 끄덕이더니 해주를 빤히 쳐다본다.

    “수술받았어. 네 번 정도.”

    그러고는 손을 올려 제 얼굴을 더듬었다.

    “너 따라 한 건데, 맘에 들어?”

    그 모습이 얼마나 섬뜩한지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미쳤구나?”

    “어, 미쳤다고 했잖아.”

    주먹을 말아 입술을 가린 경은이 쿡쿡거리며 웃었다.

    “기억 안 나? 네 몸은 내가 가질 거라고 했는데.”

    기억난다. 어떻게 지울 수 있겠어. 얼마나 끔찍한 기억인데.

    축제가 있었던 2학년, 1학기가 마무리되던 여름 어느 날이었다.

    은호가 유학을 떠났다는 소식을 건너 건너 듣고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과 대표였던 선배가 꽤 적극적으로 구애를 해 왔다.

    아무리 철벽을 치고, 거절을 표해도 소용없었다. 사람들에게 뭐라고 말한 건지, 동기는 물론이고 선배들까지 마치 해주가 그의 것인 양 몰아가는 분위기였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해주를 쫓아다니는 건 물론이었고, 집 앞까지 찾아온 것도 부지기수다.

    불편하다 못해 불쾌함을 넘어서는 구애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방학이 시작되었고, 과 사무실에서 자료 정리 단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날도 조교 언니와 함께 저녁이 넘도록 일을 하고 있었다. 밥 먹고 마저 하자며 조교 언니가 도시락을 사러 잠시 과 사무실을 비웠을 때였다.

    그 선배가 과 사무실로 들이닥쳤다.

    술을 마신 건지, 해롱거리는 눈빛으로 뭐라고 떠들었는데. 뭐라고 했더라?

    아, 기억났다. ‘해주야, 사랑해. 한 번만 자자. 나랑 자 보면 너도 날 사랑하게 될 거야.’라고 했었지.

    그러고는 그녀를 힘으로 제압하려 했다. 거세게 반항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휘어잡고 뺨을 때렸다.

    얼얼한 뺨의 고통을 되새길 새도 없이 바닥으로 넘어진 해주를 그가 덮쳤다. 그러고는 강제로 입술을 겹치려 했다.

    그 순간 와장창 소리가 나며 그가 해주의 품으로 푹, 고꾸라졌다.

    경은, 아니, 경순이었다.

    경순이 화병으로 그 선배의 머리를 내리친 모양이었다.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고, 선배의 피가 해주의 가슴을 축축하게 적셨다. 그리고 이어서 들리던 조교 언니의 비명.

    머릿속이 아찔해지며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 뒤로 경순이 그 선배를 몇 대 더 내리친 듯하다. 이번에는 화병이 아니라 책상 위에 있던 플라스틱 파일 상자였다.

    있는 힘껏 선배를 내리치는 경순은 눈이 완전히 뒤집힌 채였다.

    [더러운 새끼가 누구를 건드리는 거야? 지해주는 아무도 못 건드려. 내 거라고. 내 거란 말이야.]

    발악하며 사람의 머리를 내리찍는 경순이 더는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조교 언니의 신고로 경비 아저씨가 달려오고, 교수님을 비롯하여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끌려 나가기 전, 경순이 해주에게로 바짝 몸을 붙여 왔다. 붉은 피를 흠뻑 뒤집어쓴 채 발발 떨고 있는 해주를 바라보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지해주, 넌 내 거야. 몸 함부로 굴리지 마. 네 몸은 내가 가질 거니까. 알아?]

    [미, 미쳤어.]

    [어, 미쳤어. 그러니까 기억해, 넌 내 거야. 내 거라고.]

    오래된 기억이었고, 잊고 싶었던 기억이었다. 그날의 끔찍했던 기억이 밀려들자 턱이 가늘게 떨렸다. 교내 폭행으로 기소된 경순은 퇴학이 결정되었고, 그 선배는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적어도 죽지는 않았기를 바랐다.

    “해주야.”

    그날처럼 경은이 해주 곁으로 바짝 다가섰다. 웃음기를 머금은 밤색 눈동자가 기이한 빛을 띠고 번뜩였다.

    “그러게 왜 결혼했어. 그것도 차은호랑.”

    빨간색 매니큐어를 바른 손톱이 해주의 쇄골 끝을 지그시 눌렀다.

    “나 그거 싫어.”

    아프도록 내리누르는 경은의 손가락을 해주가 뿌리쳤다.

    “미쳤어?”

    “역겨워. 널 바라보는 시선에서 느껴지던 차은호의 끈적한 욕망도 싫었고, 그 남자를 바라보며 풀어지던 네 눈빛도 싫었어.”

    정말이지 끔찍하다는 듯 경은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그러고는 이내 눈을 뒤집으며 눈동자를 희번덕거렸다.

    “그런데 넌 기어코 그 남자와 결혼을 했지.”

    마치 연극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은 과장되었고, 말투는 지극히 극적이었다.

    “아직 늦지 않았어, 해주야. 차은호와 헤어져.”

    이윽고 경은이 해주를 타이르듯 얼렀다.

    “넌 그렇게 살면 안 돼. 넌 고고하고 거룩하게 존재해야지. 성녀처럼.”

    눈을 초롱초롱 빛내더니 금세 과격한 빛을 띠고 번뜩인다.

    “넌 남자 따위에게 더럽혀지면 안 되는 거야. 특히나 나원정, 그 여자에게 그런 취급을 당하면서까지 차은호의 성욕받이를 하고 있다니.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 하잖아.”

    “너, 완전히 미쳤구나.”

    정상은 아니었다. 아니, 그 옛날부터 황경순은 미쳐 있었다. 그날의 폭행 사건 역시 경순이 조현병이라는 이유를 들어 심신미약으로 축소되었고, 퇴학당한 경순은 미국에 있는 아버지에게 보내져 치료를 받게 되었다고 들었다.

    “정신병자 짓 그만하고, 내 인생에서 꺼져. 황경순.”

    그때 마침 13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해주가 서둘러 내려 회장실을 향해 걸었다. 그런 그녀의 뒤를 경순이 따랐다.

    “차은호 엄마가 무슨 짓을 하는지는 알아? 너랑 자기 아들 갈라놓겠다고 대굿을 벌였어.”

    또각또각, 뒤를 쫓는 발소리가 소름 끼쳤다.

    “웃기지 않아? 원래는 네가 차은호를 살릴 부적이었는데, 이젠 너 때문에 차은호가 칼 맞아 죽을 운명이래. 그래서 널 치워 버린다나?”

    아무리 도발을 해도 반응을 보이지 않자 경순이 대번에 해주를 따라잡아 앞을 가로막았다.

    “네 집에 몰래 들어가서 부적을 몇 개나 붙인 줄 알아? 못해도 열 개는 넘어.”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원정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니까.

    다만, 원정이 그녀를 버리기로 결심을 굳혔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하자 가슴 한편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다.

    해주가 입술 끝을 꼭 깨물었다. 울음이 터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해주의 반응을 살핀 경은이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 급살 맞아 죽으라고 벌인 짓이래.”

    떨고 있는 해주의 반응이 꽤 마음에 드는지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쿡쿡거렸다.

    “그러니 살 맞아 죽기 전에 그 남자랑 헤어져.”

    바들바들 떨던 해주가 주먹을 꼭 말아 쥐었다.

    “미친 개소리는 다른 데 가서 해.”

    끝이 떨렸지만, 강단 있는 목소리였다. 원정의 변심 때문에 가슴이 아픈 것이지, 대굿이나 부적 따위가 겁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이런 이유로 경은에게 즐거움을 줄 수는 없는 일이다.

    “남의 집안일에 관심 끊고 말이야.”

    순간, 경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미친 개소리? 관심을 끊어?”

    “막말로 내가 죽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넌 그렇게 할 일이 없어? 그 시간에 너 죽었다고 알고 있는 네 엄마나 신경 써. 그거 불효야.”

    “너야말로 내 집안일에 관심 꺼.”

    경은이 소리를 바락 질렀다.

    “혼외자라고, 손가락질받으며 살게 만든 엄마가 무슨 엄마 자격이 있다고.”

    “그래서 이용했니?”

    은호의 말에 의하면 그녀의 엄마는 제 딸이 정말로 죽었다고 믿고 있다고 했다. 가난한 살림에 미국행 비행기 티켓을 구하지 못해 딸의 무덤조차 가 보지 못한다며 서럽게 울었다고 말이다.

    딸의 마지막 소원대로 해주에게 편지를 전하고 싶다며 은호의 손을 꼭 맞잡았다고도 했다.

    경은은 그런 제 엄마를 이용했다.

    “네 존재에 대해 내게 알려 주는 메신저 역할로?”

    그러자 경은의 눈빛에 열기가 어리며 흔들렸다.

    “내 편지 읽었어?”

    목소리에 흥분이 묻어났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해주가 서늘하게 대답했다.

    “어, 읽었어. 되게 끔찍하고 더러운 기분이야.”

    “끔찍해? 더러워?”

    “날 그렇게 오랫동안 스토킹했다는데, 너라면 좋겠어? 불쾌하고 소름 끼쳐.”

    순간, 넋이 나간 듯 경은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기를 한참, 밤색 눈동자에 기이한 빛이 들었다.

    “가만히 생각하니까 말이야.”

    한쪽 입꼬리를 삐딱하게 끌어 올린 경은이 잔뜩 뒤틀린 목소리를 내뱉었다.

    “어차피 이젠 내가 네가 되어서, 넌 필요 없을 것 같아.”

    미간을 슬쩍 좁히고는 혀를 끌끌 찼다.

    “이 세상에서 지해주는 하나면 되지 않겠어? 하늘에 태양이 하나이듯 말이야.”

    그러고는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뭐 하는 짓이야? 이것 놔.”

    힘이 얼마나 센지 해주는 비상계단까지 속수무책으로 끌려갔다.

    소리를 질렀지만 소용없었다. 13층의 사무실은 회장실과 부회장실을 비롯하여 임원실밖에 없었다. 최고의 방음 공사로 복도의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을 터였다.

    등 뒤로 비상계단 문이 텅, 소리를 내며 닫혔다. 노란 불이 반짝 들자 경은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

    “살살 밀게. 부디 목 정도만 부러져, 해주야.”

    그러고는 세상 달콤한 눈빛으로 해주의 얼굴을 훑었다.

    “얼굴은 다치지 말고 말이야. 난 네가 얼굴만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거든.”

    사악하게 웃으며 “잘 가!”, 라고 짧게 인사한 경은이 해주를 밀쳤다. 눈을 꼭 감았다. 몸이 기우는 순간,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아이를 위해 얼굴이 아닌 배를 감쌌다. 은호가 보고 싶었다.

    그 순간 익숙한 향기와 함께 해주의 몸이 획, 하고 잡아당겨졌다. 감았던 눈꺼풀을 조금 들어 올리자 비상계단 문 앞에 처박혀 있는 경은이 보였다. 그러고는 이내 단단한 가슴에 포근히 파묻혔다.

    은호가 온 모양이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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