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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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화를 끊은 은호가 뒤를 돌아보았다.

    발코니 유리문 너머 해주가 누워 있는 침대가 보인다.

    아침 10시 21분.

    슬쩍 시간을 확인한 은호가 방 안으로 조용히 들어갔다. 침대로 다가가자 깊이 잠든 해주의 얼굴이 보였다.

    식은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머리카락이 이마와 뺨에 짓이겨져 있다. 살며시 손을 뻗은 은호가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정리했다. 그러고는 이마를 짚어 보았다.

    “아직 열이 있네.”

    은호의 미간이 걱정스레 좁혀졌다.

    어제 횟집을 빠져나와서는 바닷가를 거닐었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해주는 울고 또 울었다.

    이 작은 얼굴 안쪽, 거의 대부분이 눈물샘인 듯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닦아 주고, 쓸어 주고, 먹어 치우고를 반복했지만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왜 자꾸 울어.]

    [무서워서요.]

    [내가 널 사랑할까 봐? 아니면 사랑하지 않을까 봐? 어느 쪽이 더 무서운 거야?]

    [둘 다. 둘 다 무서워요.]

    둘 다 무섭다는 말에 둔기에 두들겨 맞기라도 한 듯 가슴 안쪽이 묵직하게 아렸다.

    [둘 다 무섭다니. 잔인하네, 지해주.]

    [어쩌겠어. 무서워도 견뎌야지. 내가 널 놓을 생각이 없으니 너도 그냥 견뎌.]

    호텔로 돌아와서는 당연하다는 듯 그녀를 안았다. 그녀를 품는 것이 일상이 되었건만 안을수록 갈증이 느껴졌다.

    그의 아래에서 고통스러운 얼굴로 야릇한 신음을 흘리는 해주를 볼 때면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다는 가학적 욕구도 느낀다. 그의 움직임에 몸을 맡긴 채 허리를 들썩이는 그녀를 보면 잘근잘근 씹어서 먹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그렇다 보니 늘 이성을 잃고 그녀를 거칠게 다루게 된다. 끝까지 밀어붙여서는 짐승처럼 울부짖을 때까지 몰아세운다.

    어젯밤도 다르지 않았다.

    함께 절정으로 치달은 뒤에도 열기를 주체할 수 없어 허리를 움직였다. 하지만 해주는 점점 힘을 잃고 가라앉아 갔다.

    그러고는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미열이 시작되었다.

    수건을 미지근한 물에 적셔 온몸을 닦아 냈다. 그래도 열이 떨어지지 않아 밤새 걱정을 했더랬다.

    해주의 이마에서 손을 뗀 은호가 다시 수건을 적셔 왔다. 열이 자글거리는 이마를 닦으며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

    “해주야.”

    그러자 꼭 감겨 있던 해주의 눈꺼풀이 떨리듯 열렸다. 열 때문일까, 담갈색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흔들린다.

    “병원이라도 가자.”

    “싫어요.”

    그러고는 또다시 눈꺼풀을 꼭 닫아 버린다. 병원도, 약도, 한사코 싫다고 말하는 그녀 때문에 속이 타들어 가는 듯하다.

    미간을 좁힌 채 해주를 바라보던 은호가 수건을 사이드 테이블에 올렸다. 그러고는 그 옆에 놓인 종이 가방을 뒤적였다.

    어제 호텔 상점에서 사 둔 여벌의 속옷이다.

    포장을 뜯은 은호가 이불을 걷어 내고 속옷을 입혔다. 그러자 해주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지금 뭐 하는…….”

    “집에 갈 거야.”

    놀란 해주가 눈의 크기를 더하는 동안 은호는 재빨리 그녀의 머리에 상의를 끼워 넣었다.

    “안 간다고 했잖아요.”

    “그럼 약을 먹든가.”

    힘이 없어 은호의 움직임에 몸을 맡긴 해주가 나른한 목소리로 푸념했다.

    “입이 써서 못 먹는 거란 말이야.”

    “그러니까 병원을 가자는 거잖아. 수액이라도 맞게.”

    “싫어요, 병원.”

    “응, 나도 싫어.”

    바지까지 꼼꼼히 입힌 은호가 해주의 코트를 가지고 왔다. 그녀의 몸에 코트를 대충 둘러 준 그가 제 코트를 입었다.

    “그래서 너 데리고 집에 가려고.”

    그러고는 해주를 번쩍 안아 올렸다.

    “집에 가서 의사 부를 거야. 싫으면 발딱 일어나든가.”

    여전히 나른한 얼굴의 해주가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러고는 가만히 얼굴을 기댔다.

    “미워.”

    말로만 싫다, 밉다 그러지 반항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얌전히 안겨 있는 해주가 조금은 안쓰러웠다.

    “나도 말 안 듣는 지해주는 미워.”

    무게감 없이 그녀를 안아 든 은호가 호텔을 나섰다. 차에 태워 서울로 돌아오는 내내 해주는 잠을 잤다.

    진짜 어디가 탈이 난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어쩌면 그가 너무 힘겹게 그녀를 안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조금은 후회가 되기도 했다.

    어금니에 힘을 준 은호가 자동차에 속도를 더했다.

    * * *

    은호의 친구이자 연희병원 병원장인 상우가 해주의 팔에 주삿바늘을 꽂았다.

    “임신 같은데요?”

    해주의 얼굴을 흘긋 바라본 상우가 미리 뜯어 둔 반창고로 링거 줄을 고정했다.

    “내일 병원에 가서 검사받으시죠. 제가 봤을 때는 임신이 확실한 것 같으니까.”

    주사약이 잘 떨어지고 있나 확인한 상우가 몸을 일으켰다.

    “임신……이라니요?”

    그런 그를 당황한 얼굴로 바라본 해주가 무표정하게 서 있는 은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담담한 눈빛으로 해주를 응시하며 은호가 상우에게 물었다.

    “약 먹이지 마?”

    “응. 검사부터 받고 약을 먹이든 다른 걸 하든 해.”

    상우가 덜거덕거리며 왕진 가방을 챙겼다. 은호의 시선이 그의 가방 안을 살폈다.

    “넌 그거 없어? 임신 테스트기.”

    가방을 닫은 상우가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은호를 바라보았다.

    “차은호 부회장님, 그 정도는 약국 가면 다 팝니다.”

    마치 말 안 듣는 아이를 타이르는 듯 또박또박 말을 뱉은 상우가 다시 뒷말을 이었다.

    “그리고 초기에는 부정확할 수 있어. 내일 병원 와. 산부인과에 이야기해 둘 테니까.”

    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주 씨, 포도당이랑 영양제만 놨어요. 푹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해주에게 조곤조곤 설명한 상우가 상큼하게 웃었다.

    “의사인 내 직감으로는 임신 맞으니까, 미리 축하하고요.”

    그러자 은호가 그의 어깨를 툭, 밀었다.

    “됐어. 임신 테스트기도 하나 없으면서 무슨 의사라고. 빨리 가.”

    “나쁜 놈. 여기까지 왕진 와 줬더니.”

    은호에게 눈을 흘긴 상우가 침실을 빠져나갔다. 그런 그의 뒤를 따르며 은호가 해주를 돌아보았다.

    “배웅하고 올게.”

    여전히 당황한 얼굴을 한 해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은호가 침실을 나서고 홀로 남겨졌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임신일지도 모른다니. 해주가 손을 제 배에 가져다 댔다. 납작한 배 속 어디에 아이가 있다는 걸까.

    만약 임신이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앞이 캄캄하면서도 이상하게 기분이 들떴다. 심장이 울렁거리고 손바닥이 자글거린다.

    “어떡해.”

    “어떡하긴 뭘 어떡해?”

    그때 은호가 방으로 돌아왔다.

    “죽도록 했는데, 아이가 생기는 건 당연하지.”

    은호는 해주와 관계를 가지며 단 한 번도 피임하지 않았다. 해주 역시 왜 피임하지 않는 거냐며 물은 적 없다.

    아이를 원한다는, 아니 아이가 필요하다는 데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던 것도 같다.

    은호가 침대 위로 천천히 몸을 들였다. 그러고는 상기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해주를 품에 안았다.

    “왜 그런 표정이야.”

    곧 울 것 같은 해주의 얼굴에 가슴 가운데가 따끔거렸다.

    “싫은 거야?”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대답을 듣기 겁이 난다. 차은호가 언제부터 이런 지질한 인간이 된 건지.

    “내 아이를 가져서?”

    “그게 아니라…….”

    은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해주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말을 잇지는 못한다.

    “그럼 미국에 못 가게 될까 봐?”

    가장 두려운 질문이라는 듯, 은호의 목소리 끝이 흔들렸다.

    처음이었다. 은호가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듯 느껴지는 게 말이다.

    놀란 해주가 고개를 들어 올려 은호를 바라보았다. 까만 눈동자가 묘한 기운을 띠고 반짝거렸다.

    “난 좋아.”

    이번에는 목소리 끝에 흥분이 묻어난다.

    “드디어 네 발목 잡은 거잖아. 내가.”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더하면서도 몸을 바짝 밀착시키지는 않았다. 그 행동이 마치 그녀의 배를 보호하려는 듯 느껴져 가슴 가운데가 뭉근히 데워졌다.

    “영원히 내 옆에 묶어 둘 수 있는 핑곗거리.”

    해주의 이마에 이마를 붙이며 속삭이는 목소리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생겼잖아.”

    * * *

    [병원 예약 시간 2시 반이야. 점심 먹고 바로 나갈 테니까 그 전까지 일 다 끝내. 알았어?]

    11시. 해주를 회사 앞에 내려 주며 은호가 신신당부했다. 함께 가겠다는 그를 끝까지 거부했으니 잔소리 정도는 들어 주어야 했다.

    [아버지가 무슨 소리를 해도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 힘들면 나한테 바로 전화하고.]

    고개를 끄덕인 해주가 그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회사 안으로 발을 들였다.

    익명 게시판의 게시 글은 사흘 만에 잘 해결된 모양이었다. 회장실 명령으로 진상 조사가 이루어졌고, 익명 게시판은 잠정적으로 폐쇄되었다. 그리고 제3의 목격자가 나타났다. ‘금융인의 밤’에 참석했던 경영팀 팀장인데, 그날 사진 속의 모습으로 파티에 참석했던 경은이 현욱과 호텔 방으로 올라가는 걸 봤다며 목격담을 단톡방에 올렸다. 이로써 해주에 대한 오해는 완전히 벗겨졌다고 한다.

    허위 사실을 유포한 최미정 선생님을 법무팀이 고발했고, 이런 일을 꾸민 박경은은 현재 감사과의 조사를 받는 중이란다.

    그렇다고 해도 회사에 발을 들이는 게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다. 그녀를 향한 시선이 이전보다 더 짙어졌기 때문이다.

    로비를 가로지르며 제게 쏟아지는 시선을 오롯이 감당한 해주가 막 문이 닫히려는 엘리베이터에 빨리 몸을 실었다.

    “고맙습니다.”

    저를 기다려 준 사람에게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했다.

    “고맙긴요, 본부장님. 저야 늘 본부장님을 기다려 드리죠.”

    익숙한 목소리에 섬뜩함을 느낀 해주가 바닥을 향해 있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쌩긋 눈웃음을 치는 여자는 분명 박경은이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해주가 인상을 찌푸렸다.

    “……황경순.”

    순간, 경은의 눈빛이 묘하게 흐트러졌다.

    [잘 들어. 박경은이 황경순이야. 그날 민영이가 말한 얼굴 없는 네 동기, 그게 박경은이라고.]

    은호가 강릉으로 내려온 날 저녁, 정 실장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심각한 얼굴로 한참을 통화하던 은호가 그녀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었다.

    처음부터 박경은이 노렸던 건 은호가 아니라 해주였다고 말이다.

    [내가 강현욱 그 자식만 신경 써야 하는 게 아니라 그 미친 여자까지 신경 써야 하는 거였어.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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