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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촉하고도 말랑한 입술이 손목을 쓸고, 이어 이 끝이 박혔다. 지그시 압박을 가하는 은호를 바라보며 해주가 딸꾹질을 터트렸다.
손목을 타고 온몸으로 전율이 흐르며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재빨리 손을 빼낸 해주가 어깨를 부르르 떨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무릎에 올려 둔 전화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 먼저 갈게요.”
떨리는 손끝으로 전화기를 주워 올린 해주가 도망치듯 식당을 나섰다.
얼굴은 불이라도 붙은 듯 화끈거리고, 눈시울 역시 뜨겁다. 어쩌면 혈관을 타고 불이 돌아다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심장도 뜨거울 테지.
겨울 초입의 바닷바람이 뜨겁게 느껴질 만큼 열이 오른 해주는 은호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걸음을 서둘렀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몸이 돌려세워졌다.
“황당하네.”
그녀를 쫓아온 은호가 기가 막힌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도망은 왜 가?”
그녀의 두 팔을 굳게 잡은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나무랐다.
“내가 못 할 말 했어?”
그의 눈동자가 불이라도 붙은 듯 새카맣게 일렁거렸다.
“너, 나 사랑한다며. 사랑한다면서 이 정도로 도망가? 사람 감정 들쑤셔 놓고, 도망가면 다야?”
순간, 해주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은호의 시선에 균열이 일었다.
“왜 또…….”
말을 끊은 은호가 토해 내려던 숨을 삼켰다. 목울대가 쿨렁거리며 파도를 탔다.
“울어.”
은호의 목소리 끝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아프도록 해주를 바라본 은호가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
“젠장.”
욕지거리를 뱉은 은호가 해주의 정수리에 입술을 꾹 눌렀다. 생살에 소금이라도 뿌린 듯 가슴이 아렸다.
* * *
은호가 잠적한 지 이틀이 지났다.
집무실 책상에 앉은 윤규가 인상을 쓴 채 전화를 걸고 있는 제 비서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전화를 안 받아?”
“네, 회장님.”
비서가 곤란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미간을 좁힌 윤규가 그의 곁에 죄인처럼 서 있는 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정 실장.”
은호가 직접 스카우트해서 제 비서로 들인 인재다. 법무팀의 박진우 이사와 함께 은호의 오른팔, 왼팔로 불리는 존재.
“자네 연락도 안 받아?”
그런 그가 은호와 연락이 닿지 않을 리 없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너무나 뻔했다.
“네, 회장님.”
“2번 전화기 있잖아.”
공식적인 번호 외에 은호가 개인적으로 쓰는 번호가 있다고 알고 있다.
“꺼져 있습니다.”
“3번은 없고?”
“……네.”
뜸을 들이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불안하다. 그 점을 놓치지 않은 윤규가 날카롭게 눈을 부라렸다.
“있군.”
아무리 뒤로 물러났다지만, 창성이라는 왕국을 다스렸던 윤규의 카리스마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걸어.”
단호한 명령에 정 실장의 얼굴이 움찔거렸다.
“어서.”
다시 한번 명령을 내리자 쭈뼛거리던 정 실장이 떨리는 손끝으로 휴대전화를 두드렸다.
진즉에 그럴 것이지. 심기 불편한 얼굴로 그를 바라본 윤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스피커폰으로 연결해.”
긴 신호음이 고요한 집무실을 울렸다. 다섯 번째 신호음이 울렸을 때다. 달칵, 소리와 함께 은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정 실장님.
“아비다.”
-…….
수화기 너머가 잠잠했다. 전화를 끊어 버리는 건 아닌지 걱정했는데, 얕게 한숨을 내쉰 은호가 입을 열었다.
-정 실장님 괴롭히지 마세요.
인사조차 하지 않은 은호가 대번에 윤규를 나무랐다. 화를 내야 할 사람이 누군데, 내뱉는 목소리에 냉기가 어려 있었다.
그래서 짐짓 언짢은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회사 부회장이란 놈이 무단결근이 말이 돼?”
-저 없어도 잘 돌아가는걸요. 시스템 다 갖춰 놨는데, 무슨 걱정이세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부회장이 되기 전, 은호가 가장 신경 썼던 부분이 이것이었다. 각 계열사별로 COO를 세우고 막강한 권한과 책임을 부여했다. 그리고 그는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컨트롤 타워가 되어 때론 관망하고, 때론 간섭하며 그룹 전체를 장악해 냈다.
-회사는 걱정하지 마세요. 잘되고 있으니까.
킁, 앓는 소리를 내며 윤규가 소파 팔걸이를 두드렸다.
“그래서 안 오겠다는 거야?”
너무나 태연한 대답이 돌아왔다.
-지금은 해주 곁에 있으려고요.
“넌 창성금융의 총수야. 총수란 놈이 마누라 치마폭에…….”
-아버지.
윤규의 말을 자른 은호가 나직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여태 아버지의 세상을 지켜 드렸어요.
은호의 말에 윤규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세상. 은호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기에 윤규는 입도 벙긋할 수 없었다.
-아버지 뜻, 존중했어요. 그 일은 아버지 세상에서, 아버지의 권한 안에서 이뤄진 일이니, 침묵해 드린 거고요.
문득 떠오른 옛 기억에 윤규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은호의 유학이 결정 난 때였던 듯하다.
사주를 보고 온 원정이 갑자기 유학을 반대하고 나섰다. 굳이 유학을 가야 한다면 유학지를 바꿔야 한다며 고집을 피웠다.
하지만 은호는 원래 계획한 대로 유학을 떠나겠다며 원정의 뜻을 꺾었다.
[싫습니다. 그깟 확률 놀음에 제 인생을 맡겨야 하나요?]
너무나 차갑고, 완고한 태도에 원정의 다리가 푹 꺾였다.
그전까지 은호는 단 한 번도 부모의 뜻을 거스른 적 없었던 효자였다. 아니, 어쩌면 그저 묵묵히 커리어를 쌓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모두를 안심시키며 제 세상을 견고히 다져 나가기 위해서 말이다.
[엉터리 도사와 운명 놀이를 하시려면, 아버지 왕국 안에서만 하세요. 왕국 밖으로 자꾸 나오지 마시고요. 왕국 밖은 위험해요, 어머니.]
한쪽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리며 던지는 말에 원정이 하얗게 질려 갔다.
그런 원정을 만족스레 바라보는 은호의 눈빛은 사악함, 그 자체였다.
[아시겠어요?]
그 순간 윤규는 직감했다.
은호가 그 오래전의 일을 알고 있구나.
기억을 잃은 척, 거짓말을 했구나.
그리고 며칠 뒤, 윤규는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은호야, 너 혹시 예전에 그 사건…….]
[침묵이 왜 좋은지 아세요? 시간을 벌 수 있거든요. 내 세상을 견고하게 만들 시간.]
스물다섯, 몸을 웅크리고 있던 사자가 기지개를 켠 순간이었다.
[그러니 아버지도 침묵하세요. 그게 맞아요. 침묵하시면 적어도 아버지 세상을 침범하지는 않을게요.]
소름 끼치도록 공포스러웠고, 가슴이 먹먹해질 만큼 뿌듯했던 순간이기도 했다.
그의 후계자가 본색을 드러내며 세상 밖으로 나오고 있었으니까.
옛 기억에 빠져 있는 윤규에게 은호가 나직하게 읊조렸다.
-충분히 봐 드렸으니, 이제부터는 내 세상을 지키려고요.
은호가 만들어 가는 세상. 그의 왕국. 그래, 그 왕국에서 해주를 배제할 수는 없겠지. 제 모든 것을 다 걸었다는 아이였으니까.
“해주는, 좀 어떠니?”
한풀 누그러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요.
“밥은 먹니?”
-먹였어요.
늘 잘 벼린 칼처럼 바짝 날이 서 있는 은호는 해주와 관련해서만 녹진하게 녹아내렸다. 그 또한, 해주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살기를 품고 차갑게 번뜩이는 칼날을 품어 줄 수 있는 칼집. 해주는 은호에게 그런 존재이기도 했다.
“그래, 잘했구나. 많이 먹여. 너무 말라서 안쓰러워.”
-탓하지 않으시네요.
의외라는 듯 은호가 물었다.
-스캔들의 진위 파악을 끝내셨나 봐요?
“강현욱 고문이 다녀갔다.”
스캔들이 터진 날 밤. 현욱이 평창동을 찾아왔다.
“해명하더구나. 해주가 아니라고 말이야. 제 어머니의 과오에 대해서도 다 털어놓았어.”
현욱의 고백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해주에게 그런 아픔이 있었다는 사실 역시 처음으로 알았고 말이다.
“그리고, ……사진 속 여자는 박경은, 그 아이더구나.”
현욱의 말에 충격받던 원정의 모습을 떠올리며 윤규가 씁쓸히 미소 지었다.
“금방 들킬 일인데, 왜 제 게시판 아이디까지 강 고문 어머니에게 건네며 이런 시끄러운 일을 꾸몄을까? 마치 일부러 그런 것처럼 허술하기 짝이 없잖아.”
그게 가장 이상했다.
아무리 익명이라지만 IP를 추적하면 당장에 글을 올린 이가 누군지 알 수 있다.
현욱의 어머니에게 거짓 제보를 하고, 교묘한 말로 그걸 퍼트리게 만들고, 해주를 불륜녀로 몰아가서 박경은, 그 여자가 얻는 게 뭘까? 게다가 금방 탄로 날 정도로 허술하게 일을 꾸미고 말이다.
“도대체 뭘 원하는 걸까?”
-관심, 아닐까요?
“관심?”
놀란 듯 되물은 윤규가 제 눈앞에서 시시각각 표정을 달리하는 정 실장을 바라보았다.
“혹시, 정 실장 시켜서 그걸 알아보는 중이니?”
-네, 그러니까 정 실장 괴롭히지 마시라고요. 바빠요, 정 실장.
부드러운 목소리로 은호가 제 편을 들자 정 실장이 무안한 듯 인상을 찌푸리며 웃었다. 그런 정 실장을 조금은 못마땅한 듯 바라본 윤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대신, 결과가 나오면 내게도 알려 다오.”
-아버지.
은호가 윤규를 고요히 불렀다.
감정이라고는 한 톨 묻어나지 않는데, 어째서인지 온몸의 솜털이 쭈뼛하고 서는 기분이다.
-그 결과에 따라 아버지 왕국이 무너질 수도 있어요.
담담히 던지는 협박이다. 아니, 선전포고이려나. 이럴 때의 은호는 부모인 윤규조차 감당하기가 버겁다.
-아니, 그것 또한 아버지가 선택하셔야겠네요.
무감하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설핏 어렸다.
-궁금해요. 이번에는 어떤 선택을 하실지.
은호는 24년 전의 윤규를 명백히 비웃고 있었다.
“은호야.”
-하나만 아시면 돼요. 저는 제 왕국을 목숨 걸고 지켜요. 창성 따위…… 무너지든 말든 제가 알 바 아니죠.
24년 전, 선택의 기로에서 윤규가 선택한 것은 창성이었다. 창성이라는 왕국을 지키기 위해 사랑을 버렸다.
하지만 은호는 그와 달리 사랑 하나에 목숨을 걸 모양이다. 아니, 그 사랑을 지킴으로 제 왕국을 더욱 견고히 하려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해주, 건드리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