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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에서 열린 ‘밀레니엄 패러다임’에 참석한 해주는 깜빡거리는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최미정 쌤>
무음으로 해 둔 휴대전화가 불빛과 함께 반갑지 않은 이름 하나를 계속해서 띄웠다.
거절 버튼을 누른 해주가 제 건너편에 앉은 현욱을 슬쩍 바라보았다.
어제 아침, 현욱이 은호에게 전화를 걸어 미정이 찾아갈 거라며 도움을 요청했다고 한다. 의외였다. 현욱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현욱에게 미정은 무척이나 아픈 손가락이었다. 당연히 싫은 소리 한번 한 적 없는 효자 아들이다.
미정에게 뺨을 맞는 해주를 보고도 한 번을 막아 주지 않았다. 원인이 제게 있는데도 말이다.
주로 미정이 발작하는 원인은 현욱이 해주에게 보이는 다정함 때문이었다. 아니면 해주가 현욱에게 보이는 무심함 때문이든지.
해주의 시선을 느꼈는지, 현욱이 해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둥근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시선을 마주한 두 사람은 다른 질감으로 한참을 서로 바라보았다.
또다시 해주의 휴대전화가 반짝거렸다. 어떻게 해야 할까, 잠시 망설이던 해주가 휴대전화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현욱의 미간이 좁혀졌지만, 개의치 않은 해주가 행사장을 빠져나갔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자마자 미정의 까칠한 목소리가 울렸다.
-너, 내 아들이랑 같이 있니?
“업무상 같이 출장 온 거예요, 선생님.”
-오늘도 현욱이와 잘 거니?
“선생님!”
도대체 미정의 머릿속은 어떤 구조이길래 6년을 한결같이 이래.
“어떻게 그런 말씀을 막 하세요?”
결혼하고 좀 잠잠해진다 했더니, 결국은 제자리걸음이다.
“이러지 마세요. 저 남편도 있는…….”
-남편 있는 애가 행동을 이따위로 해?
미정이 코웃음을 쳤다.
-앙큼한 년. 너 얼마 전에도 현욱이와 잤잖아.
“도대체 왜 이러세요? 내가 그렇게…… 만만하세요?”
질문을 던지고도 우스웠다. 최미정이 이 세상에서 가장 만만하게 생각하는 존재가 해주일 텐데 말이다.
“함부로 말씀하지 마세요. 저도 더는 못 참아요.”
미정은 늘 억측을 늘어놓고, 오해하고, 단정 짓고, 해주를 물고 늘어진다. 그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다정해졌다. 그리고 다시 억측을 반복. 도무지 좁혀지지 않는 미정과 해주의 간극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분위기가 다르다.
-어디서 발뺌이니? 증거가 다 있는데.
억측이 아니라는 듯,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게다가 평소답지 않게 목소리에서 교활함이 묻어났다.
-그리고 네 남편 걱정은 하지 마. 잘난 네 남편도 이제 곧 알게 될 거니까. 내가 그 사진을 보낼 거거든.
“그 사진……이라니요?”
설마 원정이 가지고 있는 그 사진을 말하나? 그게 무슨 협박거리가 된다고…….
하지만 이어진 미정의 말에는 해주 역시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내 아들과 발가벗고 사랑을 나누는 사진 말이야.
“뭐라고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네 시부모에게도 보낼 거고, 회사 게시판에도 올릴 거야. 아니, 이미 올렸어.
제정신이 아닌지, 깔깔거리며 웃는 소리가 섬뜩했다.
“지금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기대해, 해주야. 또다시 시궁창에 처박히게 될지도 몰라. 가족도, 집도…… 다 사라지는 거지.
키득거리며 말을 잇는 목소리에 넘치는 만족감이 묻어났다.
-부정을 저지른 널, 네 남편이 다시 그렇게 감싸 줄까? 아닐걸?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미정이 드디어 미친 걸까? 아니면 그 뒤에 누가 있는 건가?
-특히 네 시어머니 말이야. 안 그래도 네가 못마땅해서 이혼 변호사까지 샀다는데, 이 사진 하나면 게임 끝이지 뭐.
사악하게 웃던 미정이 웃음을 삼켰다. 그러고는 애잔한 목소리를 만들어 냈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은 하지 마. 내가 다시 널 주워 가 줄게.
부드럽게 달래고, 살살 구슬린다.
-이번에는 특별히 내 아들과 결혼도 시켜 줄게. 그러니까 더 다치기 전에 조용히 현욱이 손 잡아.
“선생님 도대체 왜 이러세요?”
-그러게 왜 도망가? 내가 말했지. 멀어지지도 말고 가까워지지도 말라고. 룰을 깨뜨린 건 너야.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최미정 선생님!”
여태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은혜를 입었기에 잘라 내지 못했다. 결혼을 도피처 삼아 미정에게서 잊히기를 원했다. 그런데 잊히기는커녕 그녀에게 올가미를 씌우려 한다.
“잘 들으세요. 내가 또다시 세상에 혼자 남겨진다고 해도, 두 번 다시 선생님 손 잡을 일은 없어요. 아시겠어요?”
해주의 목소리가 조용한 컨벤션 센터를 쩌렁쩌렁 울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목소리가 파들거리고, 발밑이 아스러지는 듯 느껴졌다. 하지만 주먹을 꼭 쥔 해주는 할 말을 다 하기 위해 다시 입술을 열었다.
“이걸로 우리 인연도 끝이에요, 선생님. 더는…… 내 인생에 들어오지 말아요.”
떨리는 손으로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눈앞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은 눈물이 얼룩졌기 때문일 것이다.
“도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 내는 해주 앞으로 그림자 하나가 드리워졌다.
“해주야.”
현욱이 다가와 있었다.
그런 현욱을 원망 어린 눈빛으로 바라본 해주가 독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선배도 마찬가지야. 내 인생에서 꺼져.”
눈물을 삼킨 해주는 휴대전화를 꼭 부여잡고 현욱을 비켜섰다.
멀어지는 해주를 단숨에 따라잡은 현욱이 그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해주야, 이야기 좀 해.”
“할 말 없어요.”
현욱의 손을 쳐 낸 해주가 그를 밀어냈다.
“이젠 선배도 안 봐. 제발 사라져요.”
그때였다. 지수가 급히 뛰어왔다.
“해주야!”
경전본 제2팀의 김 팀장 역시 헉헉거리며 지수를 따르고 있었다.
“난리 났어.”
“난리라니?”
도대체 무슨 난리가 났다는 거야.
불안함에 미간을 좁히자 지수가 휴대전화를 불쑥 내밀었다.
“방금 윤 과장이 메시지를 보냈는데, 회사 게시판에 이런 게 올라왔대.”
<창성의 여왕, 지해주 본부장의 민낯>
미정의 짓인 모양이다.
뜻 모를 소리만 지껄이더니, 결국 이런 것을.
떨리는 손끝이 게시 글을 누르자 기함할 사진들이 쏟아졌다.
현욱과 해주의 관계를 마치 오래된 연인처럼 조작한 게시 글에는 케케묵은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미정을 따라 현욱이 군 복무 중이었던 철원까지 면회 갔던 사진, 해주의 졸업식에서 현욱과 나란히 찍은 사진. 그 외에도 무수한 사진이 현욱과 해주를 특별한 사이로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문제는 가장 아래쪽에 붙어 있는 사진이었다.
해주로 보이는 여자와 호텔 엘리베이터에 오른 현욱이 그 여자와 키스를 나누고 몸을 어루만지고…….
“이게 뭐야?”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자가 현욱의 몸에 올라타서는 성관계를 갖는 사진이다.
“도대체 이게 뭐냐고.”
해주의 시선이 현욱에게 향했다.
은회색 드레스와 사파이어 목걸이.
이게 해주라면, 시기는 은호의 부회장 승진 축하연 때여야 한다. 양평에서 파티가 열렸을 때 말이다. 해주는 그날 이런 차림으로 호텔에 간 적이 없다. 은호의 잠옷에 지수의 코트를 걸치고, 지수와 함께 호텔에 간 적은 있어도 말이다.
“선배!”
답은 현욱이 가지고 있을 터였다.
사진을 바라보는 현욱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기를 잠시, 참담한 얼굴로 현욱이 말했다.
“해명할 수 있어.”
“이게 나라고?”
“너 아니야.”
현욱의 대답에 김 팀장과 지수가 안도의 한숨을 나직하게 내쉬었다.
어떻게 봐도 양평에서 본 해주의 모습이라 순간적으로 아찔하던 참이었다.
“박경은이지?”
지수가 물었다. 해주는 절대 아니고, 해주의 카피캣인 경은일 것이 분명하다.
“선배 박경은이랑…… 이런 관계였어?”
한국대 경영학과의 ‘씹선비’라 불리던 현욱이다. 오매불망 해주밖에 몰라 다른 여자에게는 눈길조차 던지지 않는 줄 알았다. 아직도 동정일 거라는 선배들의 농담 아닌 농담도 있었다.
그런 현욱이 이런 사진을 찍히다니, 지수 입장에서도 조금은 쇼크였다.
“이름도 몰랐어.”
여전히 당황한 얼굴을 한 현욱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금융인의 밤’에 만나서 같이 술을 마셨어.”
여자가 먼저 하룻밤을 제안했다. 그리고 현욱은 거절하지 않았다. 해주를 닮은 여자에게 처음부터 몸이 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잤어. 지극히 사적인 일이지만 흔치 않은 일도 아니잖아.”
이런 사진이 공개되었다는 수치심보다 해주를 끌어들였다는 상황이 더 괴로웠다.
두 손으로 제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린 현욱이 그날 저를 끌어들인 여자를 떠올렸다.
해주와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난 것부터 의심했어야 했는데, 그날 뭐가 씌었던 모양이다.
“학교 후배라는 것 정도밖에는 몰라.”
“학교 후배?”
해주의 미간이 가늘게 좁혀졌다.
“한국대학교 후배야. 우리 과. 너희 동기던데. 몰랐어?”
“이런 애가 있었다고?”
지수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박경은이 경영학과 동기라니.
순간, 해주의 입술에서 최근 들어 자주 듣게 된 이름 하나가 뚝 던져졌다.
“황경순이야.”
담갈색 눈동자가 확신을 담고 반짝거렸다.
“박경은이 황경순일 거야.”
“해주야.”
황경순은 얼마 전에 죽었댔잖아. 지수가 삼킨 뒷말이 뭔지 짐작하는지 해주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어.”
죽지 않았어. 죽은 척한 거야.
“걔라면 맞아떨어져. 나한테 이러는 이유도 알겠어.”
너무 놀라 입술을 다물지 못한 지수가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현실을 가늠했다.
“일단 이 게시 글부터 내리게 해야 해.”
그러자 현욱이 나섰다.
“내가 지금 서울로 갈게. 엄마 만나서…… 당장 내리게 할게.”
순간, 또다시 눈물이 앞을 가렸다.
미정이 그녀를 미워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다. 이렇게까지 악의적이고, 이렇게까지 잔인하다니.
“해주야, 미안해.”
차마 눈물을 떨구지 못하는 해주가 애처로워 현욱이 한발 다가서려던 참이었다.
해주의 손에 들린 휴대전화가 반짝거리며 빛을 발했다.
<애인>
액정 화면에 떠오른 두 글자를 눈에 담은 해주가 후드득 눈물을 떨어뜨렸다.
입술을 꼭 깨문 해주가 초록색 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았다.
-해주야.
나직하게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흑, 흐으윽.”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럽게 울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 꽉 잠긴 목소리가 나직이 울렸다.
-기다려. 내가 지금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