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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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라운 충족감이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잠 못 드는 해주를 측은하게 바라봤던 때와는 확연히 다른 삶이다.

    겁에 질려 떠는 그녀를 보듬어 주고, 안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심장을 뻐근하게 만들 정도로 만족감을 불러일으켰다.

    지해주. 그의 아내이자 그가 욕망하는 대상. 세상에서 유일하게 가지고 싶은 존재. 가졌음에도 더 가지고 싶어 심장이 타들어 가는 여자.

    그의 품에 안겨 잠이 든 해주를 뭉근한 시선으로 훑어 내렸다.

    그에게 입술을 열고, 몸을 여는 해주가 미치도록 좋아서 또다시 거칠게 다뤘다.

    매일 밤, 이런 패턴이다.

    끝까지 몰아붙여 그녀를 가지고, 기절한 듯 잠든 그녀를 닦아 준다. 그러다 그녀가 깨어나면 한 번 더 몸을 섞는다. 함께 몸을 씻고 다시 잠자리에 든다.

    그의 몸은 해주를 좀 더 원하는데, 체력이 약한 해주는 이 정도가 한계점이다. 그러면 그는 착한 아이처럼 아침까지 인내한다.

    매끈한 몸을 손으로 쓸어내린 그가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포갰다.

    그녀의 달콤한 살냄새가 그의 욕망을 들쑤시지만, 인내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무려 3년이라는 시간을 참아 왔으니까.

    “해주야.”

    잠든 그녀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어. 내가 참는 것 하나는 잘하잖아.”

    곤히 잠든 해주의 숨결이 그의 가슴에 닿자 심장이 간질거렸다.

    “그런데 너 혼자 괴로워하는 거, 그거 더는 두고 못 봐. 이제부터는 제대로 간섭할 거야.”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보안실에서 올린 CCTV 영상을 떠올렸다.

    두 개의 CCTV에 잡힌 두 개의 영상.

    12시 1분에 해주 곁으로 다가선 차는 분명 원정의 차였다. 굳어지던 해주의 얼굴과 머뭇거리다 올라타는 모습이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아서 가슴 가운데가 뻐근했다.

    그리고 또 하나.

    12시 6분, 회사 서편 게이트에 해주를 내려 주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입술을 꼭 다문 채 차에서 내린 해주는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그 순간 그녀는 분명히 울고 있었다.

    “그러니까 힘들더라도 조금만 더 견뎌.”

    새근새근 내려앉는 해주의 숨소리를 들으며 은호 역시 잠을 청했다. 도무지 속을 드러내지 않는 그의 여자가 더는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면서.

    * * *

    “당신 어제 회사 왔었어?”

    아침을 먹던 윤규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샐러드를 집어 올리던 원정이 포크를 떨어뜨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윤규가 한쪽 눈썹을 비스듬히 끌어 올렸다.

    “뭘 그렇게 놀라? 왔었어?”

    떨어뜨린 포크를 다시 손에 쥔 원정이 눈을 들어 윤규를 마주 보았다.

    “해주 잠깐 보러 갔었어요. 왜요?”

    해주를 보러 갔다는 대답에 윤규의 얼굴이 굳어졌다. 짙은 잿빛 눈동자가 힐난하듯 번뜩였다.

    “해주를? 왜?”

    “다음 주, 당신 생일 파티 의논했어요.”

    포크 끝으로 샐러드를 휘정거리며 대답했다. 그러자 대번에 날 선 질문이 던져졌다.

    “다른 것 말한 거 아니고?”

    윤규의 물음에 원정이 포크를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입술 끝을 질끈 물었다 뗐다.

    “다른 것 뭐요? 너 내 아들 두고 다른 남자 만나니? 이런 거요?”

    윤규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딴 걸 물은 거야?”

    “해주가 누굴 만나는지나 알아요? 알면 당신 그런 말 못 해요. 걔가 앙큼하게도…….”

    “오늘 저녁 먹고 들어올 거야.”

    윤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의사 표시였다.

    “먼저 자요.”

    그러고는 다이닝룸 문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런 윤규의 뒤통수에 대고 원정이 소리쳤다.

    “당신은 어떻게 나보다 해주를 더 믿어요?”

    부부로 살아온 세월이 무려 34년이다. 그동안 온갖 마음고생을 다 하며 곁을 지켰는데, 돌아오는 게 겨우 이런 거라니.

    “내가 당신에게 이런 존재밖에 안 돼요?”

    “24년 전에도, 당신은 그 불쌍한 여자를 이런 식으로 몰아갔어.”

    윤규의 말에 원정의 손끝이 달달 떨렸다.

    “결국 그 여자는 유괴범의 오명을 쓰고 죽어 버렸지.”

    지금 갑자기 그 이야기를 왜 꺼내는 건데? 눈으로 열기가 몰리며 눈동자가 타들어 가는 듯하다.

    “난 그 사건을 눈감아 주는 걸로 당신에 대한 도리를 다했어.”

    심장이 쿵,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발아래로 굴러떨어지는 듯하다.

    “무슨 말이에요? 그 여자 죽음에 내가 연루되어 있다는 뜻인가요?”

    떨리는 손끝을 말아 쥔 원정이 최대한 떨지 않으려 노력하며 말했다. 그런 원정을 슬쩍 훑은 윤규가 무감하게 물었다.

    “아닌가?”

    “그 여자는 자살한 거예요.”

    “자살하게끔 몰아갔겠지. 은호를 들먹이고 나를 들먹여서 그 여자를 죽고 싶게 만들었겠지.”

    짐작만 할 뿐이다.

    숙향이 죽음을 선택했던 그날, 원정이 숙향을 찾아갔었다고 한다. 경찰을 통해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냥 덮고 말았다. 경찰 역시, 찾아간 것 외에 별다른 혐의점을 찾을 수 없다며 그에게 동조해 주었다.

    하지만, 절대 그냥 찾아갔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신률, 그 작자와 모종의 일을 꾸몄겠지. 그리고 아무런 죄책감 없이 실행에 옮겼겠지.

    윤규의 책망에 원정의 눈빛이 변했다.

    “조강지처 두고, 씨받이와 사랑에 빠진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날 비난해요.”

    차갑고 날카로운 칼날이 시선에서 쏟아질 듯하다.

    “그래, 자격 없어. 그래서 여태 가만히 있었지.”

    목 언저리가 뻐근했다.

    “하지만 똑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그건 내가 막을 거야.”

    여태 침묵을 지켰는데, 더는 내버려 둘 수가 없다.

    “대가 끊기더라도 해주를 내칠 일은 없어. 은호에게 다른 여자를 품으라고도 하지 마.”

    불행을 반복해서는 안 되니까.

    “은호, 잃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그때 집사가 다이닝룸 문을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원정의 날 선 시선이 집사에게 향했다.

    “무슨 일이야?”

    “차은호 부회장님이 오셨습니다.”

    은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원정이 표정을 가다듬으며 입구로 걸어갔다.

    그때 은호가 다이닝룸으로 걸어 들어왔다.

    “이 시간에 웬일이야?”

    “밥 주세요. 아침 얻어먹으러 왔어요.”

    코트를 벗고 자리에 앉는 은호를 바라보며 원정이 입술을 동그랗게 벌렸다.

    “세상에.”

    그러고는 못마땅한 기색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해주 걔는 밥도 안 챙겨 주니?”

    “새벽같이 출장 갔어요. 은행 연합회에서 주관하는 ‘밀레니엄 패러다임’ 참석하러요.”

    빙긋 웃으며 대답하는 은호에게 윤규가 한마디 거들었다.

    “강릉에서 열리지?”

    “네, 우리 쪽에서는 경전본 책임자 세 사람과 강현욱 고문이 참석했습니다.”

    “강현욱 고문이라니.”

    현욱의 이름이 거론되자 원정의 얼굴색이 바뀌었다.

    “은호야, 그 사람…….”

    “밥 주세요, 어머니. 오랜만에 어머니 밥 먹고 싶어요.”

    하지만 원정의 말을 끊어 버린 은호 때문에 뒷말을 이을 수 없었다. 평소보다 밝게 웃는 은호를 바라보며 원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앉아 있어. 국 데워 올게.”

    원정이 다이닝룸을 떠나자 은호가 윤규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다 드셨어요?”

    “막 일어선 참이다.”

    “그래도 잠시 앉으세요.”

    은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윤규가 미간을 좁혔다.

    “할 이야기라도 있니?”

    “네.”

    은호가 서늘한 눈빛을 기이하게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원정이 집사와 함께 다이닝룸으로 들어왔다.

    “네가 올 줄 알았으면 백합 넣고 끓이는 건데, 가자미 미역국이야. 괜찮겠니?”

    “그럼요. 괜찮습니다.”

    집사가 은호 몫의 식사를 올려 두고 나가자 비로소 은호가 숟가락을 들었다.

    맛있다는 말도 없이 은호는 조용히 국과 밥을 먹었다. 그렇게 한참을 먹더니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얼굴에서 웃음기를 완전히 지워 낸 은호는 주위의 공기를 얼려 버릴 만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런 은호가 원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머니.”

    “응?”

    원정의 목소리 끝이 가늘게 떨렸다.

    “이젠 해주가 안 예쁘세요?”

    이번에는 입꼬리가 파들거린다. 그런 원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은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예뻐하셨었잖아요.”

    “은호야, 그게…….”

    “강현욱 고문과 해주, 그런 사이 아닙니다.”

    원정에게는 말할 기회를 주지 않은 은호가 말을 이었다.

    “어머니가 오해하신 거예요.”

    물잔을 들어 올려 입술을 축인 은호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물었다.

    “그 사진, 누가 주던가요?”

    오늘 새벽, 해주가 출장을 떠나자마자 원정의 비서를 닦달했다. 적당히 어르고 적당히 협박해서 원하는 답을 받아 냈다.

    “박경은 그 여자 아닌가요?”

    은호의 질문이 많이 당황스러운지, 원정의 얼굴이 파리하게 굳어 갔다.

    “어머니도 잘 생각해 보세요. 박경은 그 여자가 어떤 식으로 어머니에게 접근했는지.”

    “접근이라니, 그런 거 아니야. 우린 그냥 우연히 운동하다가…….”

    “상상 이상으로 무서운 여자던데요.”

    원정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살벌한 전적을 가진 여자였다. 물론, 영혼의 색이 비슷한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그 여자가 해주에게 조금이라도 위해를 가하면, 제가 전면에 나설 겁니다. 그때는 어머니에게도 불똥이 튈지 몰라요.”

    새파랗게 질린 채 한마디로 더 하지 못하는 원정을 바라보며 은호가 말을 이었다.

    “어머니.”

    은호의 고요한 목소리에 원정이 한기라도 느끼는지 바들바들 떨었다.

    “저 서른둘입니다. 여덟 살이 아니고요.”

    원정의 눈동자가 커다래지면서 놀란 듯 입술이 벌어졌다.

    “그게 무슨…….”

    “지난 24년간, 제가 무슨 생각 하면서 살아온 줄 아세요?”

    은호의 입술이 비릿한 웃음을 그렸다.

    “강해지자.”

    24년 전, 여덟 살이었던 은호의 머릿속은 오직 그 생각 하나로 가득했었다.

    “최고의 자리에 오르자. 힘을 가져서 내 것을 지키자. 더는 빼앗기지 말자.”

    그리고 차근차근 제 뜻을 이루기 위해 시간을 밟아 왔다.

    “그것 하나였어요.”

    그렇게 최고의 자리에 앉았고, 원하는 것도 손에 넣었다. 그런데 감히 그의 것을 건드린다?

    “내가 가진 유일한 내 것이 지해주, 내 아내예요. 어머니.”

    명백한 경고였다.

    “내 여자 건드리지 마세요.”

    윤규를 통해 한번 경고를 한 것 같은데, 통하지 않으니 직접 할 수밖에.

    “더는 안 봐 드려요.”

    제 할 말을 마친 은호가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화사한 미소를 얼굴 가득 머금었다.

    “잘 먹었습니다, 어머니.”

    더는 당신의 아들이 아니라는 듯, 사뭇 비즈니스적인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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