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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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모님, 아니에요. 이거 아니에요.]

    원정이 던진 사진 한 장을 주워 든 여자가 손을 달달 떨었다. 여름 교복을 깨끗하게 입은 은호가 이 집 대문을 들어서는 사진이다.

    [아닌데, 은호가 여길 와?]

    [다 설명할 수 있어요.]

    하얗고 파리한 얼굴에 눈물길이 생겼다.

    [사모님.]

    [다 필요 없고, 결정해.]

    꿈인 것이 뻔한데, 기다란 머리채를 잡고 죄다 뜯어 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강하게 일었다.

    [네가 이렇게 버티고 있으면, 은호가 불행해져. 그걸 몰라? 그러니 잘 생각하고 결정해.]

    재수 없는 년이 눈물도 잘 흘리지. 저 눈물이 그 사람 눈을 흐리게 했을까.

    [네가 사라지든가, 아니면 은호까지 시궁창에서 살게 하든가.]

    [은호는, 은호는…….]

    [그러니까 너만 사라지면 되는 거야. 그러면 은호는 내 아들로 살 거야.]

    [지금도 사모님 아들이잖아요. 다들 사모님 아들이라고 알고 있어요. 은호도, 은호도 그렇게 알고 있고요.]

    [그래, 그래야지.]

    그래야 마땅하다. 신화건설 막내딸 나원정의 인생에 오점을 남길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말이야, 이숙향 씨.]

    그래야 하는데, 자꾸 이 재수 없는 여자가 발목을 붙든다.

    [은호가 자꾸 여길 찾아오는 걸 보면, 무의식중에라도 이숙향 씨가 엄마라는 걸 아는 게 아닐까? 우리 은호가 참 많이 똑똑하잖아.]

    기껏해야 제 가정교사 정도로 알고 있을 여자다. 은호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여자를 집에서 쫓아냈다. 연결될 그 어떤 끈도 없다. 그런데도 일주일에 한 번은 이 집을 찾았다. 분명히 뭔가 있다.

    [지나치게 똑똑해서 내 오점을 드러낼 아들이라니. 난 그런 아들은 필요 없는데.]

    [사모님.]

    여자가 원정의 발목을 잡았다. 올려다보는 시선이 퍽 애달프다. 차윤규가 이 꼴을 보면 뭐라고 할까. 제가 물고 빨던 여자가 제 마누라 발목을 붙들고 늘어지는 걸 보면 속이 뒤집힐까?

    [알잖아. 내 남편 품에 널 집어넣은 게 나라는 거. 난 자식만 얻을 수 있다면 똑같은 짓 100번도 할 수 있는 사람이야.]

    결혼 전부터 자궁에 문제가 있었다. 물론, 문제가 있다는 것은 결혼 후에 알게 되었다. 이혼은 불가능했다. 창성금융과 신화건설의 결합은 약간의 이권을 얻기 위해 단행한 그저 그런 정략결혼이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원정은 그의 정략결혼 상대자인 차윤규를 사랑했다. 그를 놓지 않기 위해 선택한 것이 혼외자였다.

    대신 한 가지 원칙은 분명했다. 어떤 여자에게서 자식을 얻든지, 그 아이는 나원정의 아이로 자라게 한다는 것.

    [은호를 내 자식으로 살게 할 수 없다면, 다른 자식을 얻으면 돼.]

    그런데 그런 그녀의 원칙에 금이 생기고 있었다. 은호가 이 집을 드나들며 제 생모를 만나고 있었다니.

    [이숙향 씨가 사랑하는 차윤규 부회장님에게 다른 여자를 품게 하면 된다고. 이숙향 씨는 은호와 시궁창으로 돌아가고 말이야.]

    눈이 뒤집히고, 세상이 뒤집히는 기분이다. 그녀가 낳지는 않았지만, 핏덩어리일 때 데리고 와서 그녀의 아들로 키웠다. 애지중지, 치마폭에 감싸서 소중하게 보듬었다. 정말이지 예쁘고, 보물 같은 아이였다.

    그런 아이를 이 끔찍한 여자에게 빼앗긴다? 절대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사모님, 사모님 잘못했어요. 살려 주세요.]

    예상대로였다. 은호를 건드리자 여자가 무너졌다.

    [은호, 다시는 안 봐요. 안 볼게요. 여기 못 찾아오게 할게요. 아니, 이사 갈게요.]

    여자의 말에 원정이 코웃음을 쳤다. 이사? 웃기는 소리다.

    [왜 이래? 그 사람이 이숙향 씨 안 찾을 것 같아? 어디로 이사 가든 찾아낼걸?]

    아이를 낳으라며 여자를 품에 안겼더니, 아이를 만들면서 사랑에 빠져 버렸다. 은호를 온전한 그녀의 아들로 만들기 위해 윤규와 거래를 해야만 했다.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는 이 여자를 가정교사로 집에 들이기로 말이다. 그리고 무려 7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 여자와 남편을 공유해야만 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뭐든 시키는 대로 할게요.]

    [그래? 그럼 죽어.]

    여자가 죽길 바랐다. 그래서 식탁 위에 놓인 커터 칼을 던져 주었다. 제발 이대로 콱 죽어 버리라며 저주를 던졌다.

    [소식 기다릴게.]

    커터 칼로 저 아름다운 얼굴을 난도질하고 싶다는 욕망과 싸우며 그 집을 떠나왔다.

    그리고 그날, 여자는 죽었다.

    요란하게 천둥이 울렸다.

    잠에서 깬 원정은 온몸이 식은땀에 젖어 있었다.

    “하필 그런 꿈을…….”

    아마 해주를 만나고 와서일 것이다.

    오늘 낮, 잠시 만났던 해주에게서 그 여자의 모습이 겹쳐 보여 치를 떨었다. 그랬더니 대번에 이런 꿈을 꾸고 말았다.

    어깨를 부르르 떤 원정이 건너편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는 윤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때마침 하얀 번개가 방 안을 밝혔다.

    그녀가 평생을 바쳐 사랑했던 차윤규. 그가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당신이 그날의 진실을 알게 된다면, 뭐라고 할까? 내게 헌신한 지난 24년을 경멸하게 될까?”

    숙향의 시신이 발견된 것은 다음 날 낮이었다.

    은호가 집에 들어오지 않아 실종 신고를 했고, 혹시나 해서 경찰에게 숙향의 집을 알려 주었다.

    결국 은호는 숙향의 집 거실 캐비닛 안에서 발견되었다.

    작은 몸을 동그랗게 말고 기절해 있는 것을 발견한 경찰이 병원으로 옮겼다. 그리고 거실에는 숙향이 손목에서 피를 쏟은 채 죽어 있었다.

    그 사건은 다음 날 아주 자그마한 기사로 다뤄지고는 세상에서 지워졌다.

    <낳자마자 죽은 아들 때문에 정신병 앓던 가정교사 이 모 씨, 8세 제자 유괴한 후 커터 칼로 손목 그어 자살. 유괴된 아이는 캐비닛에 감금되어 기절한 채 발견되었다.>

    커터 칼을 던져 준 이가 원정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없었다.

    숙향은 죽었고, 원정은 입을 닫았다.

    물론 그 자리에는 또 한 사람의 목격자가 존재했다. 차은호, 그녀와 숙향의 아들.

    하지만 의식을 되찾은 은호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날 왜 그 집에 갔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해 진실은 비교적 쉽게 왜곡될 수 있었다.

    그 후, 이숙향은 원정에게서는 물론이고 윤규와 은호에게서도 깨끗이 지워졌다.

    모든 것이 너무나 쉬웠다.

    물론 처음부터 쉬웠던 것은 아니었다. 모든 것이 쉬워지도록 처음부터 공을 많이 들였다는 게 맞을 것이다.

    신률을 통해 숙향에게 저주를 퍼붓는 굿을 했다. 그리고 숙향의 집에 부적을 붙였다. 이렇듯 악살을 받게 하기 위한 기초 작업을 착실하게 진행했다. 물론 심리전도 빼놓지 않았다. 윤규에게는 숙향이 다른 남자를 만나더라며 조작된 사진을 내밀었고, 은호에게는 가정교사 선생님을 다시는 만나지 말라며 엄히 가르쳤다.

    윤규와 숙향의 사이가 나빠지고 있다는 보고를 막 받았을 때다. 은호가 숙향의 집을 주에 한 번꼴로 찾는다는 보고가 함께 올라왔다.

    웃기는 일이었다. 남편인 윤규가 숙향과 만난다는 것보다 은호가 그 여자 집을 찾는다는 사실에 더 심장이 무너졌다.

    그래서였다. 숙향의 집을 찾아간 원정은 신률이 마지막의 마지막에 쓰라며 주었던 최상급 악살을 식탁 아래에 붙였다.

    커터 칼을 던져 주면서였다.

    그리고 신률의 악살은 정말이지 최상의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그래,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는 별것 없어. 또 하면 되는 거야.”

    은호를 위해서. 그리고 그녀를 위해서.

    번개가 내리쳐 하얗게 색이 바랜 방 안에서 원정이 창백하게 웃었다.

    * * *

    출발이 늦어져 도착 역시 늦어져 버렸다.

    차에서 내리기 전, 은호가 고개를 들어 해주의 창을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자고 있을까, 가늠하기 위한 그의 오랜 버릇이기도 했다.

    “정 실장님.”

    차에서 내리기 직전 정 실장을 불렀다.

    “네, 부회장님.”

    “유전자 검사 결과는 모레 받을 수 있는 겁니까?”

    “네, 내일 맡기면 모레 나올 것 같습니다.”

    “그럼 내일 아침 일찍 맡깁시다. 사촌 형님 연구소라니까, 독촉도 조금 하고.”

    결국, 모레가 아니라 내일 저녁에는 받아 볼 수 있게 만들라는 말이었다.

    정 실장이 지체하지 않고 대답했다.

    “네, 부회장님.”

    그의 대답이 만족스럽다는 듯 빙긋 웃어 보인 은호가 차에서 내렸다.

    “그럼 내일 봅시다.”

    요란한 비와 함께 천둥 번개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의 기억에 해주는 천둥 번개를 무서워한다. 의연한 척하지만, 번개가 치는 날이면 늘 잠을 뒤척였다. 불안한 발걸음으로 2층 거실을 거닐다가 서재에 들어가 일을 하는 해주를 몇 번이나 목격했기 때문이다.

    “안 자겠지?”

    약간의 기대를 품고 현관문을 열었을 때다. 해주가 그의 품으로 와락 안겨 들었다.

    “왜 이제야 와요.”

    그의 가슴에 몸을 제대로 밀착시킨 해주가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얇은 아사 잠옷 너머로 아찔한 몸의 곡선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그녀를 살며시 보듬어 안은 그가 등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무서웠어?”

    “네.”

    네, 라고 대답하는 목소리 끝이 파들거리며 떨렸다. 그러자 심장 한편이 찌릿하게 떨리는 기분이다.

    “나 원래 천둥 번개 무서워해요.”

    “알아.”

    깜찍한 고백에 빙긋 웃음을 흘린 은호가 그녀의 머리에 입술을 부딪쳤다. 그러자 떨리는 담갈색 눈동자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떻게 알아요? 한 번도 이야기한 적 없었는데?”

    “말했잖아. 너한테 관심 많았다고.”

    뭉근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자 말간 눈동자가 한층 더 짙어졌다.

    “그래서 일찍 오려고 했는데, 길이 많이 막혔어.”

    시선으로 그녀의 얼굴을 매만진 은호가 그녀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만히 포갰다.

    “대신 천둥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미치게 만들어 줄게.”

    그러고는 깊게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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