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모바일 뱅크 쪽에서 기획안이 늦게 올라왔다. 해주와 점심을 먹고 나면 오후 내내 외부 일정이라 회사로 돌아올 시간이 없다. 그래서 해주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결재를 마쳤다.
결재를 마치자마자 분수대 앞으로 달려갔는데, 해주가 없다. 약속한 5분에서 1초도 늦지 않았는데 말이다.
“뭐야? 지해주. 어디 간 거야?”
낯선 상실감이 밀려들었다.
전화를 걸어 보려 휴대전화를 꺼냈다. 해주에게 문자가 들어와 있었다.
<나도 서류 정리 덜 끝나서 사무실이에요. 느긋하게 내려와요.>
하기야. 나만 바쁜 게 아니지.
해주의 메시지 하나에 상실감이 빠르게 희석되어 갔다.
입꼬리를 희미하게 끌어 올린 은호가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꽂고 회사 정문을 바라보았다.
어떤 표정으로 저 문을 열고 나올지 조금은 기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지해주, 빨리 와.”
혼잣말로 조용히 해주를 부른 은호는 제 마음이 조금은 웃겨 난처한 생각도 들었다.
가지고 싶었던 여자를 가지게 된 지금, 더 가지고 싶어 안달을 내다니. 웃기지 않나. 이 또한 욕정의 연장선인지, 어디서든 해주의 흔적을 찾는 제가 웃겼다.
그리고 그녀에 관한 거라면 아주 작은 흔적도 놓치지 않게 되었다.
이를테면, 지금 뒤쪽에서 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입생로랑의 향수 냄새 같은 것.
뒤를 돌아보려 한 순간 하얀 손이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말랑한 몸이 그의 등에 부닥치고 해주의 향기가 짙게 밀려왔다.
코트 주머니에서 손을 뺀 은호가 해주의 손을 덮었다. 이 작고 하얀 손을 볼 때면 이상하게도 심장이 아린다.
아마도 8년 전, 그 불쾌했던 주막에서 사람들의 괴롭힘을 묵묵히 감당하고 있던 해주가 떠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주먹을 꼭 말아 쥔 채 말없이 참아 내던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그가 건네던 카디건을 받아 들 때, 그녀의 손바닥에는 반달 모양 손톱자국이 빨갛게 새겨져 있었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린 은호가 해주의 손등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그러고는 그녀의 손을 잡으려 손바닥을 펼쳤을 때다. 선명하게 새겨진 빨간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미간을 슬며시 좁힌 은호가 그녀의 손을 꼭 쥐고서 뒤를 돌았다.
“지해주.”
조용히 이름을 부르자 담갈색 눈동자가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눈시울과 코끝이 빨갛다.
그러자 어금니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나 배고파요.”
눈꼬리에 고운 주름을 잡고서 생긋 웃는 모습에 목 언저리가 뻐근해졌다.
지난 3년, 해주는 늘 이랬다.
평범한, 아니 평범함에 조금 못 미치는 배경을 가진 그녀가 그의 아내가 되면서 겪게 된 수모. 그에 따른 크고 작은 사건들. 그 사건들을 감내하던 해주는 늘 이랬다. 이렇게 참고 견디며, 예쁘게 웃었다.
“가자. 예약해 뒀어.”
빨간 손톱자국이 새겨진 하얀 손을 꼭 거머쥔 채 은호가 걸음을 옮겼다.
“걸어서 가요?”
“응. 한 블록 떨어진 곳이야.”
은호의 대답에 해주의 눈이 동그래졌다.
한 블록이 아니라, 반 블록이 떨어져도 차를 이용해야 하는 것이 재벌가 로열패밀리의 올바른 처신이라 배웠다.
결혼 초, 걷는 것을 좋아했던 해주가 운동화 차림으로 편의점에라도 가면 고아 출신의 서민 며느리라 그런 거라며 조롱을 당하곤 했다. 그럴 때면 은호의 얼굴에 먹칠할 셈이냐며 원정의 타박이 돌아왔다.
그 뒤로는 완벽한 차림새로 차를 타고 나가지 않는 이상은 외출을 삼갔다.
“그래도 차를 타고…….”
아무래도 차를 타고 가는 게 좋을 듯해 주차장으로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런데 끌려오기는커녕, 오히려 은호가 그녀를 더 힘껏 잡아당겨 제 곁에 바짝 붙여 세웠다.
“나도 걷는 거 좋아해.”
무심하게 흘리는 은호의 말에 해주가 미간을 좁혔다.
“거짓말.”
건강관리를 위해 러닝 머신 위를 달리는 것 외에는 길 위에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사람이다. 일분일초를 아껴 가며 하루를 빡빡하게 사용하는 사람이 걷는 게 좋다니, 명백한 거짓말이다.
“거짓말하지 말아요.”
잡힌 손을 살짝 빼내며 나무라자 은호의 입꼬리가 슬며시 위를 향했다.
“정정할게.”
그러고는 해주의 손을 단단히 고쳐 잡았다.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들어 손깍지를 끼고는 힘을 꼭 주었다.
“난 너랑 이렇게 걷는 게 좋아.”
별 뜻 없이 내뱉은 말일지도 모르는데, 심장이 요동을 쳤다. 그래서였다. 입술을 꼭 닫고서 그의 곁을 가만히 따른 게 말이다.
정확하게 한 블록을 걸어 들어간 곳은 한우를 구워 먹는 한식집이었다.
미리 예약해 둔 모양이었다. 은호가 들어가자 곧장 방으로 안내되었다. 이미 상이 차려져 있고, 각자의 앞에 작은 화로가 놓였다.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는, 지극히 차은호다운 선택이었다.
“점심인데…… 과하지 않아요?”
직원이 들고 들어오는 한우를 바라보며 해주가 물었다.
“너 고기 먹이려고.”
코트를 벗어 직원에게 건넨 은호가 자리에 앉기 무섭게 화로에 고기를 올렸다.
빨간색 살이 지글거리며 익는 것을 바라보며 해주 역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고기 한 점을 집어 화로에 올렸다.
“둬, 내가 구워 줄 거야.”
“……?”
“우리 지금 데이트 중이잖아.”
손을 멈춘 해주가 놀란 듯 바라보자 은호가 웃으며 말했다.
“너한테 잘 보이려고 무진장 애쓰는 거야, 지금.”
이런 멘트는 차은호답지 않은데…….
“그럼 난 뭐 해요?”
집게를 내려놓은 해주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은호를 바라보았다.
“내가 구워 주는 고기 알차게 먹고, 오늘 밤에 몇 번 할 수 있을지 고민해.”
해주의 뺨이 순식간에 빨갛게 물들었다.
“아직도 그렇게 부끄러워?”
귓등까지 올라가는 붉은 기에 은호가 픽― 웃음을 흘렸다.
“뭐, 그래도 할 때는 과감해지는 게 지해주니까. 부끄러워하는 모습도 귀엽다고 해 줄게.”
빠르게 고기를 구운 은호가 해주의 그릇에 고기를 쌓아 주었다.
은호가 얼른 먹으라며 신호를 보내 고기 한 점을 입 안에 넣었다. 고기는 입 안에서 녹아 없어질 만큼 연하고 맛있었다.
“은호 씨.”
“응?”
여전히 고기를 굽고 있는 은호에게 해주가 조용히 물었다.
“언제까지 내게 욕정을 느낄 것 같아요?”
“왜?”
은호의 시선이 언뜻 해주에게 닿았다.
“얼굴의 유효기간은 석 달이고, 사랑의 유효기간은 3년이래요.”
지수에게 들은 말을 전했다. 그리고 그녀의 걱정 역시 털어놓았다.
“욕정에도 유효기간은 있겠죠?”
그녀를 원하는 은호의 욕망은 과연 언제까지 이어질까.
“없을 것 같은데?”
고민도 없이 단숨에 대답이 돌아왔다.
“왜요?”
“널 원하는 내 마음이 점점 짙어지고 있으니까.”
은호의 대답에 해주가 숨을 참았다.
“지금도 그래.”
이대로라면 심장이 가슴을 뚫고 튀어나올지도 모르겠다.
“네 입에 들어가는 게 고기가 아니라 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거든.”
가운데가 아려 해주가 주먹으로 가슴을 꾹 눌렀다. 저토록 무심한 얼굴로 야한 고백을 던지는 은호가 미치도록 좋았다.
“나와 네 관계는 일반적이지 않아.”
고기를 굽던 집게를 내려놓은 은호가 해주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어떤 미친놈이 여자 하나 갖겠다고 8년을 기다려.”
열병을 앓듯 해주를 앓았다.
“그냥 기다린 줄 알아?”
어떻게 하면 이 여자를 가질 수 있을까, 매일 고민했다.
“매일 널 꿈꾸고, 꿈속에서 매일 널 안았어. 내 옆에 데리고 와서도 매일 열망했어. 네가 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하고 또 노력했어.”
“거짓말. 무심했으면서.”
해주의 눈시울이 다시 빨개지고 있었다.
“무심했다니. 잘못 안 거야.”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은호가 나직이 속삭였다.
“조금씩, 한 걸음씩 너한테 다가가고 있었어. 네가 눈치 못 채게 말이야.”
그렇게 3년이 걸렸다.
“그날 키스도…… 그런 의미였어요?”
“응, 왠지 그날은 네가 받아 줄 것 같았거든.”
부회장 취임식이 있었던 날을 떠올린 은호가 엷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만 보고 나가려고 했는데, 네가 안 자고 있더라. 눈이 마주쳤는데, 네 눈에서 나와 비슷한 감정이 읽혀서.”
벽을 허물고 싶었다.
“그래서 키스했어.”
해주의 가면을 벗기고, 상황을 반전시키고 싶었다.
“그동안 힘들었어.”
목이 바짝 타들어 가고, 영혼이 갈급해져 갔다. 그래서 스스로 기권을 선언하고 무리수를 던졌다.
“난 3년이나 이렇게 살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거든. 기껏해야 1년, 그 안에는 네가 나한테 넘어오겠지, 생각했다고.”
여전히 눈시울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는 해주가 한숨을 터트리듯 웃었다.
“하! 자의식 과잉이세요.”
“맞아. 내가 너를 너무 몰랐어.”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린 은호가 해주 쪽으로 몸을 좀 더 기울였다.
“너한텐 처음부터 저돌적으로 들이댔어야 했는데 말이야.”
그러고는 은밀하게 속삭였다.
“지해주가 의외로 내 몸에 약하더라고.”
웃어 줄 줄 알았는데, 해주의 눈에서 기어코 눈물이 떨어졌다. 그러자 심장이 쿵― 하고 땅에 처박히는 기분이다.
“내가 말했지. 우린 일반적이지 않다고. 그러니까 다른 생각은 하지 마.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듣지 마.”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을 훔쳤다.
“나만 보고, 나만 들어.”
자그마한 머릿속에 얼마나 복잡한 마음이 들어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더는 혼자 아프게 두지는 않을 것이다.
“좋아요.”
해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엷게 웃었다.
“그냥 우리 뜨겁게 연애해요. 사랑도 나누고.”
눈물을 떨구며 흘리는 미소가 애달팠다.
“그러니까 오늘 일찍 와요. 너무 늦게 오면 그냥 자 버릴 거야.”
애달픈 미소로 던지는 작은 협박이 사랑스러워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혼자 있는 건 외로우니까요.”
사랑스럽다니. 낯설기 짝이 없다.
* * *
식당 앞에 정 실장이 대기하고 있었다. 회사까지 해주를 태워 준 은호는 그녀가 내리자마자 표정을 굳혔다.
“정 실장님, 보안실에 연락해서 오늘 11시 50분에서 12시 5분 사이, 분수대 앞 CCTV 확보하라고 해요.”
“부회장님 메일로 보내라고 할까요?”
“응, 그래요.”
해주가 회사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은호가 출발을 지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은호의 차가 서울을 벗어났다.
“오늘 몇 시쯤 돌아올 수 있을까요?”
일찍 오라는 해주의 말에 머릿속으로 스케줄을 가늠해 보던 중이었다.
“지금 가셔서 기획재정부 미팅하시고, 황경순 씨 어머니 청주에서 6시 미팅하시면, 9시쯤에는 돌아올 수 있으십니다.”
9시, 너무 늦으려나.
“조금씩 서두릅시다.”
“네, 부회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