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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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층에서 내린 해주가 로비를 가로질렀다. 정문 앞 분수대, 은호와 만나기로 한 곳이다. 시선을 앞에 두고 걷던 해주가 걸음을 멈췄다. 휴대전화 알림이 울렸기 때문이다.

    <내려갔어? 5분만 기다려 줘. 모바일 쪽 결재 서류 하나가 아직 안 올라왔어.>

    은호가 5분 정도 늦어진다는 연락이었다.

    “뭐, 5분 정도야.”

    어깨를 으쓱한 해주가 답장을 보냈다.

    <나도 서류 정리 덜 끝나서 사무실이에요. 느긋하게 내려와요.>

    그러고는 정문을 나섰다. 제법 쌀쌀한 날씨였지만, 로비는 어쩐지 답답하게 느껴졌다. 밖으로 나오자 그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사랑의 유효기간이 3년이라니. 그건 좀 슬프네.”

    겨울이 바짝 다가선 늦가을, 회색빛이 도는 하늘을 바라보며 해주가 미간을 좁혔다.

    구름에 해가 가려져 있는데도 눈이 부시다니 웃기는 일이다. 그게 꼭 제 마음 같아서 서글프기도 했다.

    사랑은 아닌데, 그저 육체적 욕망일 뿐인데, 그래도 차은호가 눈이 부시다.

    화요일, 호텔에서의 하룻밤. 그리고 매일매일 이어지는 뜨거운 정사.

    차은호와의 육체적 관계는 여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아찔한 쾌락에 눈을 뜨게 했다. 그가 그녀에게 몸을 담그는 내내 울부짖으며 그를 받아들이는 스스로가 짐승 같아서 조금은 싫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수치심마저 상쇄시키는 쾌락에 빠져 더는 거부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그것보다 훨씬 더 그녀를 아찔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결혼하고 3년. 무심, 무정, 무감으로 일관하던 은호가 연애를 선언하고는 변했다.

    남들 앞에서만 보여 주던 보여 주기식 다정함이 이젠 둘만 있을 때도 이어졌다. 아니, 둘만 있을 때는 훨씬 더 짙은 감정을 드러냈다.

    그게 굳이 욕정만은 아닌 듯해 묘한 기분이 들었고, 그만큼 설렜다.

    이를테면, 오늘 아침처럼 미정에게서 그녀를 구해 준 것. 그녀를 대신해서 화를 내 준 것. 불같이 질투하는 것. 등을 다정히 쓰다듬고 눈물을 핥아 주는 것. 보내기 싫다는 듯 애절하게 바라보는 것…….

    생각을 이어 가던 해주는 그녀를 검질기게 붙들던 까만 눈동자를 떠올리며 귓등을 붉게 물들였다.

    이렇게 하나하나 곱씹다 보니 정말로 은호와 뭐라도 된 듯 여겨졌다.

    따지고 보면 법적 부부에 합법적인 섹스 파트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을.

    “진짜 부부로 살지만 정말로 부부가 될 수는 없고, 연애하자고는 했지만 사랑을 할 수는 없다니.”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연애를 구성하는 한자는 둘 다 사랑을 뜻하는데, 사랑이 배제된 연애를 하자니. 그건 결국 연애가 아니잖아.

    쓴웃음을 지은 해주가 분수대를 바라보며 섰다.

    재작년에 조경 공사를 다시 하면서 심혈을 기울여 만든 분수대다. 분수대 가운데에는 이탈리아 미술관에서나 봄 직한 조각상이 서 있다. 예쁘긴 한데 철이 지나서일까, 쓸쓸해 보였다.

    지난주부터 가동을 멈춘 분수대가 어째 이 계절에는 어울리지 않는 불청객처럼 느껴진다.

    그게 꼭 지난 3년간의 제 모습 같아 입 안이 썼다. 가동을 멈추면 불청객이 되는 존재. 그게 그녀의 처지와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차은호 씨, 나도 결국 쓸모를 다하면 당신에게 불청객……이 되겠죠?”

    그러고 싶지 않은데…….

    입 속에 담았던 말이 소리가 되지 않고 그대로 삼켜졌다. 차마 내뱉지 못하는 제 속마음이 짠해 해주가 쓰게 웃으며 발끝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때였다.

    자동차 경적이 요란하게 울렸다. 어쩐지 익숙하게 느껴져 해주가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세단 한 대가 분수대 앞까지 천천히 다가왔다. 뒤 창문이 열리며 원정이 얼굴을 내밀었다.

    원정이 왜 이곳에 있는지, 상황을 파악할 겨를도 없이 짧은 명령이 던져졌다.

    “타렴.”

    싸늘하게 말한 원정은 그녀와 시선을 맞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한 해주가 곤란함을 담고 대답했다.

    “은호 씨와 점심을 먹기로 했어요, 어머니.”

    그러니 탈 수 없다고, 이러지 말아 달라는, 완곡한 부탁이었다.

    “잠깐이면 돼. 타.”

    시선을 살짝 돌려 해주를 바라보는 원정의 눈빛이 날카로운 칼 같아 심장이 아렸다.

    “어서.”

    원정의 차가 빠져나가는 길을 가로막아 뒤로 차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급한 성미에 경적을 누르는 사람도 있었다.

    “안 탈 거니?”

    결국 해주가 체념한 얼굴로 차에 올랐다. 그러자 원정이 운전석을 두 번 두드려 출발을 명령했다.

    기사가 차를 몰아 큰길로 나갔다.

    “어머니? 은호 씨가 기다릴…….”

    “5분이면 돼. 그 정도도 시간 못 내니?”

    해주의 말을 간단히 무시한 원정이 운전기사에게 조용히 명령했다.

    “김 기사, 회사 중심으로 크게 한 바퀴만 돌아요. 천천히.”

    “네, 사모님.”

    차가 느리게 움직이며 회사에서 멀어져 갔다. 체념한 해주가 두 손을 꼭 맞잡고는 해주의 말을 기다렸다.

    “네가 결정을 좀 내려 주면 좋겠어.”

    그러고는 좀 더 싸늘한 목소리가 흘렀다.

    “은호가 불임이든, 네가 불임이든 이제 그런 건 상관없어. 나는 은호가 소중하고, 은호만 지키면 돼.”

    무릎 위에 올린 제 손만 바라보던 해주가 고개를 들어 원정을 돌아보았다.

    “어머니, 그게 무슨…….”

    “네가 옆에 있는 한, 은호에게 안 좋은 일이 계속 생길 거야.”

    심장이 뭉툭한 둔기에라도 두드려 맞은 듯 퍽퍽하게 아팠다.

    원정이 신률에게서 점괘를 받아 온 모양이다. 그것도 안 좋은 쪽으로.

    “여태 잠잠하던 홍염살이 불거져 저렇게 스캔들을 일으키는 것도, 네가 복사꽃 사주로서 제대로 된 역할을 못 해서 그런 거래.”

    원정에게 있어 신률의 점괘는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해주를 바라보는 원정의 눈빛에 분노와 경멸이 어려 있었다.

    “너 때문에 내 아들이…… 죽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야.”

    결혼해서 지금까지, 원정은 해주에게 넘치는 사랑을 부어 주었다. 물론 그게 신률의 점괘 때문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정말로 ‘복사꽃 사주’라는 것이 존재하는지는 모르지만, 그녀가 그 ‘복사꽃 사주’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넘치게 사랑을 부어 준 것은 사실이다.

    그깟 점괘를 믿는 건 아니었지만, 그 점괘에 기대어 원정의 사랑을 받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점괘 때문에 미움을 받게 된 건가. 입 안이 무척이나 썼다.

    “어머니 그건…….”

    “해주야, 나 좀 살려 줘.”

    원정이 간절한 눈빛으로 해주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아니, 우리 은호 좀 살려 줘.”

    눈시울을 빨갛게 물들이며 애원했다.

    “너도 알잖아. 나, 은호 낳고 바로 자궁 적출 수술 했어. 내게 유일한 자식이 은호고, 은호가 내 전부야.”

    왜 모를까. 결혼하기 전부터 원정에게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이야기다.

    “그런 내 아들이 너 때문에 죽는다는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니?”

    “은호 씨가…… 죽는대요?”

    그저 점괘일 뿐인데, 심장이 난도질당한 기분이다. 차은호가 죽는다니.

    “그래, 그러니까 박경은 씨에게 네 자리 넘겨주고, 넌 그냥 떠나. 위자료 넉넉하게 챙겨 줄 테니까.”

    “어머니.”

    눈시울을 빨갛게 물들인 해주가 애원하듯 원정을 불렀다. 그러자 원정이 그녀의 손을 매정하게 뿌리쳤다.

    “이젠 어머니라고 부르지도 마. 끔찍하니까. 넌 이제 내 아들 잡아먹을 괴물에 지나지 않아.”

    여태 쥐고 있던 손이 오염되기라도 했다는 듯 손수건에 손을 닦은 원정이 치를 떨었다.

    “난 적어도 네가 날 닮았다고 생각했어. 아니, 나처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손수건을 의자 앞 포켓에 구기듯 넣은 원정이 싸늘하게 말을 이었다.

    “창성의 안주인으로 창성을 위해 희생하고, 더 큰 마음으로 은호를 품어 줄 거라고 말이야.”

    순간, 알게 모르게 원정의 표정이 뒤틀렸다.

    “그런데, 넌…….”

    곁을 돌아보는 눈빛에 칼날이 어린 듯 살기가 느껴졌다.

    “넌 오히려 그 여자를 닮았어.”

    분노와 경멸에 두려움이 혼재된 원정의 눈빛은 광기라고 해도 좋을 만한 감정으로 뒤덮여 갔다.

    “그 여자를 닮은 네게 은호를 맡길 수는 없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원정은 이제 그녀를 아껴 주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끔찍하게 미워한다는 것. 그리고, 그녀 때문에 은호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 그 사실들이 해주의 머릿속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러니 정리해. 내 아들 곁에서 떠나. 더 끔찍한 꼴 당하기 전에.”

    “어머니…….”

    커다란 담갈색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그런 해주를 가만히 바라본 원정이 핸드백을 뒤적였다.

    그러고는 사진 몇 장을 꺼내 들었다.

    “아, 그리고 너 남자 있더라?”

    빈정거리듯 말한 원정이 그녀 앞으로 사진을 던졌다. 무릎 위에 쏟아진 사진을 집어 든 해주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 집 앞으로 찾아온 현욱. 그의 차에 올라타는 해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은호의 난입. 현욱을 밀치는 은호.

    그날, 그 시간의 일들이 시시각각 촬영되어 있었다.

    몰래 촬영당했다는 공포보다 원정의 오해가 더 크고 무서웠다.

    사진을 손에 꼭 쥔 해주가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 이거 아니에요. 이런 거 아니에요.”

    “아닌데 은호가 폭력을 행사하니?”

    “설명할 수 있어요.”

    “우리 은호가 그럴 애야?”

    원정이 발작이라도 하듯 소리를 바락 질렀다. 눈동자는 희번덕거리고 호흡은 불규칙하다. 여태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충격이라면 충격이었다.

    “어머니.”

    “다 필요 없고, 더 추해지기 전에 결정해. 대답 기다릴 테니까.”

    해주의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내려.”

    싸늘한 명령에 밖을 보니 어느덧 회사가 가까워져 있었다. 손가락으로 눈물을 정리하는 해주를 원정은 경멸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은호에게는 아무 말 하지 말고.”

    “네.”

    “네 시아버지에게도.”

    “……네.”

    차에서 내려서고 검은 세단이 멀어져 갔다.

    거지 같은 기분이다.

    가동을 못 해 불청객이 된 분수대, 결국 그녀는 그런 존재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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