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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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려움 때문일까, 다리에 힘이 풀린 미정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서늘한 얼굴로 바라본 은호가 해주의 손을 잡아당겨 카페를 떠났다.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미정이 손을 꼭 말아 쥐었다. 당최 떨림이 진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데도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은호가 저를 바라보던 눈빛과 저를 향해 던지는 목소리가 공포스러워 심장이 터질 듯할 뿐이다.

    저게 해주의 남편이자 창성금융그룹 후계자인 차은호란 얘기지? 제 아들 현욱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얼굴을 보는 것은 결혼식 이후 처음인데, 저런 느낌의 남자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상대를 잘못 건드렸다는 예감에 심장 한편이 섬뜩해지던 참이다.

    “일어나세요, 선생님.”

    미정 앞으로 손 하나가 불쑥 내밀어졌다. 빨갛게 매니큐어 칠한 손을 가만히 바라보던 미정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은 여자가 측은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어서요. 사람들이 봐요.”

    기어코 미정의 팔을 잡은 여자가 그녀를 일으켜 주었다.

    “선생님이 여기 이러고 계시면 현욱 선배가 속상할 거잖아요.”

    미정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우리 현욱이를…… 알아요?”

    “그럼요. 잘 알죠. 선생님도 잘 아는걸요?”

    방긋 웃은 여자가 미정을 데리고 천천히 카페를 나섰다.

    “저도 정심여고 나왔어요, 선생님.”

    친절한 여자였다.

    “차는 가지고 오셨어요?”라는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자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제가 도와 드릴게요.”

    고맙게도 엘리베이터에까지 같이 오른 여자가 그녀의 손등을 위로하듯 도닥였다.

    “해주는 말만 저렇게 하는 거지, 현욱 선배 배신 못 해요.”

    배신을 못 하다니? 미정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게 무슨……?”

    미정의 물음에 여자는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금세 입을 열었다.

    “해주, 현욱 선배와 깊은 사이예요.”

    당최 무슨 말인지 어안이 벙벙한 채 바라보자 여자의 미간이 걱정스레 좁혀졌다.

    “모르셨죠?”

    그러고는 좀 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현욱 선배가 괴로워하는 게 그것 때문이잖아요. 해주가 야망 때문에 남편을 못 놓는 게 속상해서.”

    “아니야. 우리 현욱이는 해주와 아무 사이도…….”

    미정이 뒷말을 잇지 못한 이유는 여자가 손에 들린 휴대전화를 내밀어 사진 한 장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해주, 현욱 선배와 심각한 사이 맞아요. 선생님.”

    사진을 바라본 미정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 * *

    은호가 로비로 내려온 것은 현욱의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

    [-부회장님, 해주 출근했나요?]

    평소의 강현욱답지 않게 다급한 목소리였다.

    [강현욱 고문, 웃기시네. 해주 곁에서 떨어지라고 했을 텐데 이젠 나한테 전화 걸어 해주를 찾아요? 모자라는 거야? 아니면 겁이 없는 거야?]

    하지만 현욱은 은호의 말을 제대로 듣고 있지 않았다.

    [-해주 좀 찾아 주세요. 어머니가 해주를 찾아간 것 같아요.]

    [뭐?]

    [-내가 가야 하는데, 전 지금 출발해도 시간 못 맞춰요. 청담동 집에서 출발했으면 벌써 도착했을 시간인데…….]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미친 여자가 해주를 찾아갔다니. 강현욱, 너 결국 일을 이렇게 만들지?

    [-차은호 부회장님, 부탁입니다. 내 어머니를 막아 줘요. 더는 해주를 괴롭히지 않게.]

    현욱의 마지막 말은 반 정도밖에 듣지 못했다. 은호는 곧장 사무실을 나섰다.

    해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를 받은 것은 지수였다.

    손님이 찾아와서 1층 커피숍으로 내려갔다는 말을 들은 은호는 앞뒤 가리지 않고 1층으로 내려갔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해주가 그 여자를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그 여자 앞에서는 여전히 열아홉 살인 해주가 얼마나 떨고 있을지, 오직 그것만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로비에 닿은 은호의 눈에 해주의 뒷모습이 들어왔을 때는 심장이 터질 듯했다.

    불과 1시간 전, 차에서 내리려는 해주를 붙잡고 저 자그마한 머리통에 입술을 부닥쳤다. 그와 똑같은 샴푸 냄새를 풍기는 여자가 사랑스러워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그의 여자가 그 예쁜 머리통을 조아리며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성난 걸음이 단숨에 카페까지 이어졌다.

    [너 이혼한다며? 돌아와, 해주야. 내가 잘할게.]

    [우리 현욱이 마음 알잖아. 걔는 너밖에 없어. 너 아니면 죽어. 아니 죽겠대.]

    [내가 네 은인이잖아. 너 나한테 빚 많잖아. 네 입으로 그랬잖아. 갚겠다고.]

    다른 건 기억나지 않는다.

    그 여자의 표정, 말투, 저를 쳐다보던 눈빛.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았다.

    미친 여자가 지껄이던 말과 파리하게 질린 채 눈시울을 붉히던 그의 여자.

    그 두 가지만이 그의 시간과 공간을 채울 뿐이었다.

    앞뒤 잴 것도 없이 해주를 데리고 나온 은호는 제가 그 미친 여자에게 던진 말을 곱씹어 보았다.

    “젠장, 강현욱더러 당장 죽어 버리라는 말을 전하라고 할걸.”

    욕지거리를 흘린 은호가 옥상정원의 철제 쓰레기통을 발로 걷어찼다.

    그러자 그의 손안에 들어와 있는 자그마한 손이 움찔하며 굳었다.

    그제야 해주를 놓아준 은호가 넥타이에 손가락을 넣어 틈을 벌렸다. 화가 치밀어 가슴이 몹시도 답답했기 때문이다.

    해주 때문에 화가 난 게 아닌데, 그를 바라보는 해주의 눈에 두려움이 일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너 이혼한다고 그랬니? 강현욱 그 자식에게?”

    여전히 눈시울을 빨갛게 물들인 해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새끼 죽는다고 하면 갈 거야?”

    그러자 좀 더 빨리 고개가 저어졌다.

    “그 미친 여자가 아직도 네 은인이야? 빚을 갚아?”

    순간, 해주가 그의 가슴에 머리를 툭― 하고 기댔다. 심장이 발아래로 떨어지는 기분이다.

    “은호 씨, 구해 줘서 고마워요.”

    해주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다.

    파들거리며 떨리는 어깨가 애처로워 가슴 가운데가 뻐근하다.

    젠장,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을 목구멍으로 욱여넣은 은호가 해주의 등에 손을 얹었다.

    “다음에 또 그 여자가 널 찾아오면, 혼자 감당할 생각 하지 말고 내게 먼저 말해.”

    그러고는 천천히 등을 쓸어 주었다.

    우는 것은 이 여자인데, 이상하게도 그의 목이 따끔거렸다.

    “제발.”

    * * *

    살짝 지각한 해주로 인해 회의가 늦어졌다. 11시 반 정도에 마칠 예정이었는데,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야 회의가 끝났다.

    내년도 프리미엄 CS카드 VIP 고객들에게 부여할 혜택과 여러 가지 서비스에 관한 아이디어 회의였다.

    창성금융그룹의 미래지향적이고 획기적인 아이디어는 모두 경영전략본부에서 나온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톡톡 튀는 아이디어들이 대거 터져 나왔다.

    “그럼 오늘 회의한 내용 1팀, 2팀 팀장님 두 분이 최종 정리하셔서 올려 주세요. 경쟁사인 DHF와의 차별화 전략 잊지 마시고요. 내일은 창성생명 쪽에서 올라온 건에 대해 다룰 테니 각자 아이디어 두 개씩 만들어 오세요. 내일 회의에서 뵙죠.”

    태블릿을 닫은 해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실을 빠져나와 제 사무실로 들어가자 지수가 뒤를 따랐다.

    “애인이랑 점심 드시러 가셔?”

    콧소리가 양양한 걸 보니 놀릴 심산인가 보다. 곱게 웃은 해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커다란 핸드백에 태블릿을 집어넣은 해주가 옷걸이에 걸어 두었던 가죽 재킷을 가지고 와서 입었다.

    그런 해주를 바라보며 콧잔등에 주름을 잡은 지수가 한마디 툭 던졌다.

    “지해주 요 앙큼한 것.”

    “……?”

    무슨 말이냐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바라보자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지수가 팔꿈치로 옆구리를 푹 찔렀다.

    “애인님이 차은호 부회장님이더라?”

    어떻게 알았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지수가 해주의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너 아까 정신없어서 내 책상에 네 전화기 두고 갔어.”

    아, 입술을 동그랗게 벌린 해주가 휴대전화를 받아 들었다.

    “애인님에게 걸려 오는 전화가 하도 간절해서 너 없다고 말해 주려고 내가 대신 받았었어.”

    대신 전화를 받았다는 말에 해주가 미간을 좁혔다. 왜 남의 전화를 받냐는 힐난이 섞여 있었다.

    “미안, 사실 애인의 정체가 궁금하기도 했고 말이야.”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네 것, 내 것의 경계 없이 막역히 지내던 사이이다. 전화 정도야 늘 대신 받아 주었기에 더는 나무라지 않았다. 그러자 지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애인이 부회장님이라니. 어쩐지 안심되면서도 왠지 김새는 이 기분. 너는 알까?”

    사실, 요 근래 은호를 둘러싸고 생기는 스캔들에 해주까지 숟가락을 얹을까 봐 여간 걱정한 게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차은호, 당신도 지해주 때문에 전전긍긍해 봐, 하는 심술이 내재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차은호가 해주의 애인이라니, 김이 새도 너무 팍 샜다.

    입술 끝을 꼭 깨물고 한숨을 쉬자 해주가 방긋 웃었다.

    “김새게 해서 미안한데, 나 늦었어. 지금 데이트 가야 해.”

    그러고는 사무실을 나섰다.

    그런 해주의 뒤를 지수가 졸졸 따랐다.

    “결혼하고 3년 지나면 다들 권태기에 이혼 위기가 찾아오는 게 정상인데 말이야.”

    물론 해주의 결혼 생활 역시 다를 바는 없어 보였다. 부부 싸움 끝에 집을 뛰쳐나오고, 술이 잔뜩 취해서는 이혼하겠다고 선언까지 한 것을 보면 말이다. 그때는 정말이지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하는 듯 위태롭기까지 했는데.

    “비결이 뭐니?”

    그런데 결론이 아름답다 못해 지나치게 이상적이다. ‘남편의 애인화’라니.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해주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을 툭 던졌다.

    “진정성이 담뿍 담긴 부부 싸움?”

    “그 싸움 끝에 얻어 낸 결론이 ‘다시 연애하자’였어?”

    “응.”

    사실, ‘다시 연애하자’가 아니라 ‘연애하자’였지만. 생긋 웃은 해주가 말을 이었다.

    “우선 사귀어 보고, 더 살지 말지 결정하려고.”

    남은 계약 기간을 연애를 빙자한 섹스로 채우려 한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한 해주는 그저 숫자를 더하는 엘리베이터를 바라볼 뿐이다.

    “야! 뭘 더 살지 말지 결정해. 3년 지났는데도 남은 연애 감정이 있다면 앞으로 30년은 문제없어.”

    그러자 해주의 시선이 지수에게로 향했다.

    “얼굴 보고 설레는 건 3개월, 몸으로 어필할 수 있는 건 1년, 그나마 의리로 치댈 수 있는 사랑의 유효기간이 3년 아슬아슬이야. 이제 지겨워질 때가 됐는데 여전히 설레면 백년해로지.”

    사랑의 유효기간이 3년이라니. 그럼 욕정은? 그건 유효기간이 어떻게 되는데? 해주의 담갈색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하지만 지수는 그런 그녀의 동요를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축하해, 지해주. 차은호 부회장님 같은 남편과 백년해로라니.”

    해주의 어깨를 두드리며 활짝 웃는 지수를 바라보며 해주가 씁쓸히 물었다.

    “넌? 승우 씨랑 백년해로 가능해? 사랑의 유효기간, 그거 아직 짱짱한 거야?”

    그러자 미간을 좁히고서 잠시 생각한 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까지는 아닌데…… 난 우리 남편의 볼록하고도 말랑말랑한 배를 만지지 않으면 잠을 못 자. 평생의 꿀잠을 위해서라도 백년해로해야지.”

    지수의 말에 해주가 소리 없이 웃었다.

    지수의 목소리에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결혼하고 4년, 아직도 연애하듯 사는 건 지수 부부인 것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 것도 모른 채 해주가 지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서 있었다.

    “얼른 가, 부회장님 기다리시겠다.”

    지수가 그녀의 등을 밀어 주고서야 엘리베이터에 오른 해주는 1층 버튼을 눌렀다.

    “갔다 올게.”

    문이 닫히려던 찰나였다.

    “해주야.”

    엘리베이터 문을 막아선 지수가 동그란 눈에 힘을 듬뿍 주며 말했다.

    “힘내. 기죽지 마.”

    “응.”

    방긋 웃은 해주가 엘리베이터 문을 닫았다. 천천히 닫히는 문 너머로 해주가 사라질 때까지 지수는 손을 흔들었다.

    완전히 문이 닫히고 손을 내린 지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쟤 왜 저렇게 아프게 웃지? 짠 내가 폴폴 나잖아. 사람 불안하게 왜 그러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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