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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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로 애인이 있어? 차은호바라기인 지해주가? 그게 말이 돼?

    “이리 줘 봐.”

    해주의 휴대전화를 낚아채듯 가지고 간 지수가 액정에 뜨는 메시지의 일부를 눈에 담았다.

    <몸은 괜찮아? 어젯밤에 너무 과격하게 한 것 같아서 신경 쓰이는데. 점심 같…….>

    과격하게 하다니, 뭘? 알 듯 말 듯, 야릇한 말에 지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해주야!”

    그런 거 아니지?

    “너 정말…….”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고 있자 해주가 제 휴대전화를 낚아채듯 빼앗았다.

    “이리 줘. 왜 남의 메시지를 함부로 보니?”

    새침한 얼굴로 지수를 나무란 해주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해주…….”

    “이지수 팀장님.”

    뭐라 말을 꺼내는 지수에게 해주가 명확한 선을 그었다.

    “그만 나가시고 회의 준비나 잘해 주세요. 10시에 회의 시작하겠습니다.”

    더는 묻지 말라는 무언의 명령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2학기에 짝이 되고 지금까지 십여 년을 함께했다. 누구보다 해주를 잘 알기에 지수는 할 말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네, 본부장님.”

    지수를 내보낸 해주는 그제야 은호가 보낸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

    “애인이라니.”

    어젯밤, 은호가 그녀의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더니 제 이름을 ‘애인’이라고 바꿔 놓은 모양이다. 하필 그걸 지수에게 들켰으니. 민망함에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해주가 은호에게 답장을 보냈다.

    <좋아요. 점심 같이 먹어요. 회의 끝나고 연락할게요.>

    보내기 버튼을 누른 해주가 휴대전화를 책상 위에 막 올려 두려던 참이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아침 8시 50분. 이런 이른 시간에 전화할 사람이 없을 텐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해주가 발신자를 확인했다. 그러고는 얼음처럼 굳어 버리고 말았다.

    <최미정 선생님>

    왜 미정이 전화를 한 건지, 입 안이 까슬거리고 목구멍이 조여 왔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발밑이 아득해진다.

    어쩔 줄 몰라 머뭇거리던 해주가 결국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조금 전의 패기는 어디로 간 건지, 목소리가 땅 아래로 기어들어 가는 듯하다.

    -나야.

    미정의 쌀쌀한 음성에 해주가 마른침을 삼켰다.

    “네, 선생님.”

    조용히 대답하자 수화기 너머가 잠잠해졌다. 그러기를 한참. 미정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나 좀 만나.

    만나자는 말에 심장이 타들어 갈 듯 아렸다. 만나지 않을 거라고 말해야 하는데, 목구멍이 뻑뻑해져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결국 체념한 듯, 탄식 같은 목소리가 입술을 갈랐다.

    “……언제요?”

    -지금 회사로 가고 있어.

    청담동 집에서 출발했다면, 차로 15분 내외. 주차까지 끝내면 20분 정도.

    “10시에 회의가 있어요.”

    만날 수 없는 뜻을 우회적으로 건넸다. 하지만 미정의 귀에는 닿을 수 없는 말이었나 보다.

    -금방 가. 1층 커피숍에서 만나. 잠깐이면 되니까.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잠시 만나자고 한 것뿐인데도 목이 조여 오는 듯했다.

    “뭐, 어때. 이제 그만 당당해져, 지해주. 너도 할 만큼은 했어.”

    떨리는 손끝을 말아 쥔 해주가 사무실을 나섰다.

    * * *

    지수에게 회의 자료를 넘긴 해주는 회의 시작 전에는 돌아올 거라고 말하고 1층으로 내려왔다. 출근 시간이 지나자 복잡하던 로비 역시 조용히 정돈된 느낌이다.

    커피숍으로 향하던 해주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회사로 오고 있다는 말에 곧장 아래로 내려왔는데, 미정은 이미 커피숍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슴 속에 커다란 북이라도 들어앉았는지, 가슴을 두드리는 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쉽게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힘주어 뗀 해주가 커피숍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미정의 시선이 해주에게 닿았다.

    “왔니?”

    해주를 향해 던지는 미소가 미지근하다.

    “잘 지내셨어요?”

    두 손을 앞으로 포개어 얌전히 인사한 해주가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해주를 담아내는 미정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그런 미정을 해주가 조용히 마주 보았다.

    “어디 편찮으셨어요? 조금 마르셨어요.”

    “아니야. 안 아파.”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 미정이 미리 시켜 둔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다 커피를 조금 흘렸다. 손이 떨렸기 때문이다.

    그런 미정을 바라보며 해주는 어금니에 힘을 더했다.

    6년 전, 현욱이 해주에게 마음을 드러내면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누구보다 해주를 예뻐하던 미정이 가면을 벗어던진 순간이었다.

    해주를 눈에 담으면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을 만큼 고통스럽다고 울부짖었다. 그러면서도 눈앞에 없으면, 불안감에 몸을 뒤틀었다. 그녀의 눈을 피해 현욱과 함께 있지 않을까 하는 망상 때문이었다.

    이런 미정 때문에 해주 역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행여 해주가 현욱의 마음을 받아 줄까 노심초사하면서도, 반대로 해주가 현욱을 밀어내서 제 아들이 상처받을까 걱정했다.

    이런 미정의 이상 증세는 결혼 후에도 이어졌다.

    현욱을 가까이하지도 밀어내지도 말라는 미정의 당부를 해주는 묵묵히 받아들였고, 현욱과는 어정쩡한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미정에 대한 해주의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최미정은 지해주의 은인이니까.

    하지만 이제 더는 이런 식의 관계를 이어 나갈 수 없다.

    “선생님, 전화로 말씀드렸다시피.”

    찻잔을 꼭 쥔 미정의 손을 바라보며 해주가 입을 열었다.

    “더는 선생님 부탁 못 들어 드려요.”

    단호하게 선을 그을 때가 왔다.

    “저, 할 만큼 했어요.”

    오랫동안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고등학교 3학년 여름에 부모님 사고로 돌아가시고, 바닥이 와르르 무너지던 그 순간에 선생님이 제 손 잡아 주셨어요.”

    갑작스러운 비보에 넋이 나가 있는 해주의 곁을 미정이 지켜 주었다. 장례 절차며 경찰 조사까지 미정의 도움을 받아 처리할 수 있었다.

    “채권자들 들이닥쳐서, 있는 재산 없는 재산 다 빼앗기고 거리에 나앉게 된 순간에도 선생님이 절 받아 주셨어요.”

    고아가 된 것도 기가 막힌 일인데, 집도 절도 없는 신세가 된 해주는 하루아침에 거리에 나앉게 되었다. 찜질방을 전전하던 해주를 집으로 데리고 간 것 역시 미정이었다.

    “예쁜 방, 맛있는 음식, 대학 입학금까지. 정말 너무너무 감사드려요.”

    그때는 미정을 천사라고 생각했다. 돌아가신 부모님이 그녀만 두고 간 게 너무너무 미안해서 선물처럼 보내 준 천사라고.

    “그래서 열심히 살았어요. 아르바이트 열심히 하면서 장학금도 놓치지 않았고요.”

    아르바이트한 돈은 최소한의 용돈만 남기고는 다 미정에게 주었다. 대학 입학금도 갚아야 했고, 무엇보다 공짜로 먹고 자는 게 나날이 미안해졌기 때문이다.

    “틈틈이 집안 살림도 거들었어요.”

    몸이 약한 미정을 위해서 도우미 아줌마가 오지 않는 날은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선생님을 정말 좋아하고, 선생님의 은혜에 감사드려요. ……진심으로요.”

    진심이었다. 미정에게 받은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고 싶었다.

    “그래서 그런 제안도 받아들인 거예요.”

    현욱이 제대한 후, 해주를 바라보는 미정의 눈빛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을 보며 고통스러웠다. 텅 비어 가던 미정의 눈빛에 광기가 깃든 것은 6년 전이었고 말이다.

    그렇게 악몽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젠 안 하려고요.”

    머리를 쥐어뜯기고, 뺨을 맞고, 산부인과에 끌려다녔다. 그리고 그런 일이 있었던 날 밤에는 여지없이 미정의 눈물 어린 사과를 받아야 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려요. 저 현욱 선배에게 조금도 마음이 없어요. 한 번도 선배를 남자로 생각한 적 없었어요.”

    은호와 재회한 날도 그런 일이 있었던 밤이었다. 그날, 그 밤. 까만 눈동자가 그녀의 고통을 다정하게 매만지는 듯해 몹시도 설렜다.

    그렇게 은호는 그녀에게 구원자가 되었다. 은호를 위해서라도 미정을 끊어 내야 한다.

    “밀어내지 말라는 말씀, 이제 못 지켜요. 남편이…….”

    “해주야.”

    찻잔을 매만지던 미정의 손이 해주에게 다가왔다. 흠칫 놀라 뒤로 물러나는 해주의 손을 미정이 기어코 붙들었다.

    “내가 잘못했어.”

    두 손으로 해주의 손을 잡은 미정이 울먹거렸다.

    “우리 현욱이.”

    물기 어린 목소리의 미정이 간절히 애원했다.

    “받아 주면 안 돼?”

    “선생님!”

    잡힌 손을 비틀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미정은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너 이혼한다며.”

    오히려 더욱 힘을 더하며 붙들고 늘어졌다.

    “돌아와, 해주야. 내가 잘할게.”

    길게 찢어진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우리 현욱이 마음 알잖아. 걔는 너밖에 없어. 너 아니면 죽어. 아니 죽겠대.”

    미정의 말에 소름 끼친 해주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지금 미정의 말투, 눈빛, 목소리. 광증을 드러낼 때의 미정이다.

    “내가 너 데리고 온다고 했어.”

    “선생님!”

    “나랑 같이 가자. 응?”

    “이러지 마세요.”

    하얗게 질린 해주가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함께 일어난 미정이 해주 앞으로 다가왔다.

    “회사도 그만둬. 내가 너 미국 보내 줄게. 우리 다 같이 미국 가서 살자. 응?”

    해주의 팔을 두 손으로 붙든 미정이 거칠게 흔들었다.

    흰자위를 희번덕거리는 미정을 바라보며 해주는 이제 희다 못해 파리하게 질려 갔다.

    “내가 네 은인이잖아. 너 나한테 빚 많잖아. 네 입으로 그랬잖아. 갚겠다고.”

    그때였다. 미정의 몸이 튕기듯 밀쳐졌다.

    “은인 같은 소리 하시네.”

    언제 온 건지, 어떻게 알고 온 건지, 해주 앞을 은호가 막아섰다.

    “최미정 씨가 무슨 은인이야. 미친 집착병 환자지.”

    손을 뒤로 돌려 해주의 손을 굳게 잡은 은호가 서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 경고, 귓등으로 들었나 본데, 잘 들어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은호가 목소리만큼 차가운 시선을 미정에게 던졌다.

    “강현욱 고문, 이 업계에서 발붙이고 일하게 하고 싶으면 두 번 다시 내 아내에게 얼쩡거리지 말아요.”

    아주 더러운 기분이었다.

    돌아와? 미국으로 같이 가?

    은인이라는 탈을 쓰고 가스라이팅에 학대까지 서슴지 않은 인간이 어디서 감히…….

    느릿하게 미정에게로 다가선 은호가 고개를 슬쩍 기울이며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나 되게 성질 더러워.”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 성대를 긁었다.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말아 올리고는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그 모습이 소름 끼치는지 미정의 어깨가 파들거리며 떨렸다.

    이 정도로 떨다니, 배포도 없는 주제에 누구 앞에서 까불어.

    코웃음을 흘린 은호가 조용히 뇌까렸다.

    “내 걸 건드리는 인간에게는 특히 더 잔혹하게 굴지.”

    은호의 차가운 시선이 미정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까불지 마, 최미정 씨. 계속 이러면 재미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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