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4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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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두 사람 외에는 아무도 없는 밀폐된 공간, 은호가 당연하다는 듯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허리를 바짝 끌어안고 입술을 겹쳐 왔다.

    단숨에 깊게 파고든 그가 입 안을 헤집었다. 거칠게 스치고, 뜨겁게 얽히는 감각에 벌써부터 등줄기가 찌릿하다.

    12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두 사람을 토해 내자 가느다란 손목을 이지러질 듯 잡은 은호가 걸음을 서둘렀다.

    다급한 발소리는 카펫이 숨겨 주었지만, 뜨거운 열기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그가 닿아 있는 손목이 불에 데기라도 한 듯 뜨거워 심장까지 열기가 일었다.

    H호텔 12층의 스위트룸.

    그와 신혼 첫날밤을 보낸 바로 그 방이다.

    잠금장치에 초록색 불이 들어오고 문이 열렸다.

    쿵.

    거칠게 밀어 버린 문이 요란한 소음을 만들어 냈고, 그가 해주를 방 안으로 들였다.

    문이 닫히기 무섭게 입술이 맞물렸다.

    턱을 거칠게 움직인 은호가 그녀를 잡아먹을 듯 삼켜 댔다. 숨을 쉴 수 없고, 혀뿌리가 얼얼한데도 그녀의 몸은 더한 자극을 원하는 모양이다.

    마치 애원하는 듯 그를 뜨겁게 받아들이며 열렬히 호응했다.

    그의 손이 까만 시폰 소재의 드레스 슈트 첫 단추를 끌렀다.

    자그마한 단추가 배꼽 아래까지 빼곡히 자리한 옷에 은호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해주가 입술 끝을 지그시 물고 웃었다. 사실 애타는 그의 얼굴이 보고 싶어 고심 끝에 고른 옷이다.

    그녀에 대한 마음이 사랑이 아니라 욕정이라고 말하는 차은호를 조금은 괴롭히고 싶었다면 이해할까.

    그녀의 바람대로 안타깝게 일그러지는 미간을 바라보자 조금은 만족스러운 기분이다.

    그렇게 다섯 개쯤 풀었을까. 다시금 입술이 맞물리고 안을 헤집는다. 조금의 틈도 허용하지 않은 그가 입 안 가득 저를 밀어 넣고 그녀를 깊게 빨아들였다.

    그때였다.

    부욱― 소리와 함께 드레스 슈트 앞섶이 벌어졌다. 힘을 이기지 못하고 튕겨 나간 자그마한 단추가 바닥을 굴렀다.

    “은호 씨.”

    놀란 해주가 소리치자 은호의 입술이 사악한 미소를 그려 냈다.

    “새로 사 줄게.”

    거침없이 드레스 슈트를 찢어 버린 은호가 그녀의 몸에서 옷을 벗겨 냈다.

    까만색 레이스 속옷만 남겨 둔 그가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당연히 침대로 향할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커다란 창문 앞에 놓인 유리 테이블. 그곳으로 걸어간 그가 테이블 위에 그녀를 내려놓았다.

    “도대체 뭘 하려고…….”

    가늠할 수 없는 행동에 해주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러자 매혹적인 미소를 흘린 은호가 넥타이를 풀며 답했다.

    “뭘 할 거라니? 몰라서 묻는 건 아니지?”

    우아한 동작으로 넥타이를 풀어 내린 그가 재킷을 벗어 소파 위로 던졌다.

    그 사소한 모습 하나에도 색기가 느껴져 입 안이 바짝 말라 드는 기분이다. 갈급함에 혀끝으로 입술을 쓸자 그의 엄지가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손가락이 슬며시 입술 안으로 침범하자 저도 모르게 혀끝으로 손가락을 매만졌다.

    은호의 한쪽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간 것은 그녀의 반응이 만족스럽다는 뜻이리라.

    느릿하게 움직이며 입술을 희롱한 손이 그녀의 속옷을 벗겨 냈다.

    차가운 공기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지만, 심장은 뜨거운 열기에 휩싸여 머릿속마저 불태우고 있다.

    커다란 손이 드러난 몸을 어루만지자 나른한 숨이 입술을 가른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본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3년 전에 말이야. 이 방에 발을 들인 네가 제일 먼저 한 게 뭔 줄 알아?”

    갑작스레 3년 전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면서도 손의 움직임을 늦추지는 않았다. 단단해진 곳을 집요하게 매만진 그가 입술을 가져가 혀끝으로 쓰다듬었다.

    “이 테이블 앞으로 쪼르르 달려가서는 테이블에 기댄 채 밖을 내려다봤어. 등이 깊게 파인 크림색 원피스를 입고서 말이야.”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은호의 손길에 녹아내릴 것 같은 해주는 어느덧 그의 셔츠 단추를 끄르고 있었다.

    “내가 그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아?”

    그의 셔츠를 벗기는 해주를 뜨거운 눈으로 바라본 은호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 미소가 어찌나 야한지, 그의 옷을 벗기는 손이 다 떨릴 지경이었다.

    “어떤 기분이었는데요?”

    그의 셔츠를 바닥으로 내던진 해주가 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그때 내 머릿속은 차은호라는 남자로 가득해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는데, 당신은 어땠을까? 날 조금이라도 생각했을까?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해주가 손끝으로 드러난 그의 가슴을 가만히 쓸었다.

    그의 호흡이 흐트러지길 바라며 던진 작은 도발이었다.

    도발이 통한 것일까. 탄식 같은 짧은 숨을 내뱉은 그가 그녀의 몸을 밀어 테이블에 누였다.

    다급한 손이 레이스 속옷을 찢을 듯 벗겨 냈다.

    “네 원피스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이 테이블 위에 눕혀서 범하고 싶었어.”

    서늘한 테이블의 감촉에 온몸에 힘이 들어갔지만, 옷을 벗고 그녀에게 다가서는 은호의 검은 눈빛에 다시금 나른해져 갔다.

    “이렇게 말이야.”

    그녀 안으로 그가 가득 밀려들었다.

    빠듯하게 들어서는 그로 인해 영혼까지 충만해지는 기분이다.

    거칠게 몸을 움직이는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해주는 달뜬 호흡을 뱉으며 생각했다.

    이래도 되는 걸까. 이렇게 좋아해도 되는 걸까. 이렇게 그에게 빠져들어도 괜찮은 걸까. 과연 그의 말대로 욕정이란 사랑보다 짙은 감정일까. 이렇게 100일을 지내고, 우리 둘은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까.

    복잡한 생각이 뇌리를 빼곡하게 채우고 있건만, 몸은 착실하게 밀려드는 쾌락에 정직하게 대답한다.

    나른하게 일그러지는 은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절정을 맞은 해주는 울부짖듯 신음하며 쾌락의 끝을 맛보았다.

    그녀와 함께 절정을 달린 은호가 무너지듯 그녀를 덮쳐 왔다.

    움직임을 멈추고도 몸을 빼내지 않은 그가 한참을 더 그녀 안에 머물렀다.

    * * *

    ‘금융인의 밤’이 있고 일주일이 훌쩍 지났을 때다.

    창성금융그룹 게시판에 한바탕 난리가 일었다. 다들 경은의 변신에 주목하고 있었다.

    <봤어? 박경은 씨 말이야. 헤어스타일 바꿨어. 이쯤 되면 범죄 아니니? 지해주 본부장님 뱅 헤어를 그대로 따라 한 거 있지.>

    “이쯤 되면 범죄지. 범죄야.”

    게시판을 보던 지수가 혀를 끌끌 찼다. 그러자 그녀의 어깨 너머로 함께 게시판을 보던 경전본 1팀 윤 과장이 고개를 격렬하게 끄덕였다.

    “범죄네요. 스토킹인 거죠.”

    콧날을 따라 미끄러진 안경을 검지로 끌어 올린 윤 과장이 말을 이었다.

    “이제는 저 여자가 차은호 부회장님을 원하는 건지, 지해주 본부장님이 되고 싶은 건지, 헷갈리는데요?”

    “그렇지?”

    윤 과장의 말에 지수가 동의를 표했다.

    처음에는 그저 차은호에게 홀린 n번째 여자 정도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것 같은 생각이 스멀스멀 들었다.

    은호보다는 오히려 해주 쪽이 더 가능성이 큰 것 같은 느낌이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때마침 해주가 사무실로 걸어 들어왔다.

    눈꼬리를 곱게 접으며 해주가 밝게 인사했다.

    “좋은 아침.”

    통이 넓은 청바지에 세련된 가죽 블레이저, 금색 굽이 반짝이는 앵클부츠, 빨간 립스틱과 한 손에 든 텀블러. 예쁜 얼굴에 비율까지 완벽한데 스타일까지 멋지니 같은 여자라도 반할 수밖에?

    해주의 모습을 찬찬히 눈에 담은 지수가 활짝 웃으며 그녀를 맞아 주었다.

    “우리 경영전략본부의 자랑 지해주 본부장님.”

    두 팔을 넓게 벌린 지수가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승전을 축하드리옵니다.”

    그러고는 해주를 품에 꼭 안아 주었다. 놀란 해주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물었다.

    “승전이라니?”

    “네가 개싸움에서 이긴 거지.”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개싸움이라니. 해주가 미간을 구겼다.

    그러자 윤 과장이 지수의 말을 거들었다.

    “박경은, 그 여자 말이에요.”

    더 이상은 비밀도 아니라는 듯, 윤 과장의 목소리가 제법 컸다. 그러자 경전본 직원들의 시선이 죄다 이쪽으로 집중되었다.

    “오늘 출근하는데, 본부장님이랑 머리 모양 똑같이 해서는 점프 슈트까지 빼입은 거 있죠?”

    “……?”

    무슨 소리냐며 해주가 인상을 찌푸리자 윤 과장이 재빨리 제 휴대전화를 꺼냈다.

    손가락으로 액정을 몇 번 두드리자 사진 몇 장이 떠올랐다.

    윤 과장이 해주의 눈앞에 사진을 디밀자 한숨이 절로 흘렀다.

    “하!”

    기가 막힐 노릇이다. 지난 화요일 ‘금융인의 밤’에 입었던 드레스 슈트와 디자인이 비슷한 점프 슈트에 빨간색 립스틱. 심지어 머리 모양은 그날과 똑같다.

    인상을 잔뜩 구긴 해주가 제 머리카락을 슬며시 만지며 혼잣말하듯 조용히 읊조렸다.

    “삭발해도 따라 하려나?”

    정말이지 솔직한 궁금증이었다.

    옷차림은 물론이고 자동차, 머리 모양, 화장법, 표정, 말투, 행동거지, 걸음걸이까지. 복사하듯 베껴 내는 경은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차라리 그녀가 삭발해 버리면 더는 못 따라 하지 않을까, 하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수와 윤 과장은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아마도?”

    “아마도요?”

    동시에 같은 대답을 내놓은 두 사람을 바라보며 해주가 미간을 찡그렸다.

    “그럼 삭발해?”

    “미쳤니?”

    농담처럼 던진 말에 지수가 정색하며 소리쳤다.

    “누구 좋으라고 삭발을 해.”

    지수의 동그란 이마에 주름이 가득 들어차는 것을 본 해주가 쌩긋 웃었다.

    “이지수 팀장은 인상 펴시고.”

    손가락 끝으로 지수의 이마 주름을 꾹 눌러 준 해주가 화사하게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럼 다들 좋은 하루.”

    해주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지수가 재빨리 뒤를 따랐다.

    “지해주, 너 뭐 좋은 일 있어?”

    사무실까지 따라 들어온 지수가 문을 닫으며 물었다.

    “설마, 애인이랑 잘되어 가는 거야?”

    “아마도?”

    가죽 블레이저를 벗어 옷걸이에 걸며 해주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아……마도?”

    놀란 얼굴로 되묻자 해주가 혀를 쏙 내밀며 웃었다.

    “애인이랑 잘되어 가는 거 맞아.”

    “미쳤어. 어떻게 차은호 부회장님 같은 남편을 두고…….”

    반쯤은 장난처럼 물어본 건데. 해주의 대답에 지수가 기함했다.

    “너 당장 그만둬. 그것도 범죄야.”

    그때였다. 책상에 올려 둔 해주의 휴대전화에서 메시지 알람이 울었다. 저도 모르게 액정 화면으로 시선을 던진 지수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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