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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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갑게 반들거리던 검은 눈동자에 얼핏 두려움이 어렸다. 차은호에게 이런 눈빛이 가능하다니. 연기라기엔 너무나…… 너무나 애달프잖아.

    가슴 가운데가 먹먹해진 해주가 가느다란 한숨을 토했을 때다.

    살며시 다가온 은호가 해주의 목덜미를 가만히 매만진다.

    “갈 거야?”

    그러고는 퍽 유혹적인 눈빛을 보냈다.

    애달프게 아른거리는 눈동자가 색정적으로 보일 수 있다니, 이 또한 아이러니하다. 아니, 이런 상황에서조차 그의 손길 하나에 심장이 허물어지는 제가 더 아이러니한 건가.

    “보내 줄래요?”

    해주의 목소리 끝이 가늘게 흔들리자 은호의 한쪽 입꼬리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아니.”

    목덜미를 매만지던 손가락이 느리게 움직이며 귓바퀴를 쓸었다.

    “가고 싶어?”

    유혹적인 은호의 눈빛에 열기가 더해지자 이상하게도 숨이 가빠진다.

    “가고 싶다면, 보내 줄 건가요?”

    은호의 눈빛 하나에 온몸이 나른해진 해주가 힘겹게 물었다.

    이번에도 역시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

    “그럼 왜 물어요.”

    좀 더 바짝 다가선 은호가 그녀의 빨간 입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안 보내고 싶어서.”

    귓바퀴를 쓸던 엄지가 뺨을 스쳐 입술 근처를 배회한다.

    “내 오랜 꿈이에요.”

    그 야릇한 움직임에 해주의 가슴이 들썩였다. 그러자 은호의 입술이 좀 더 짙은 미소를 그려 냈다.

    “알아.”

    나른하게 대답한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아직 시간 있잖아. 조금만 더 생각해 봐.”

    진짜 부부가 되기로 한 100일, 연인이 되기로 한 100일. 아, 이젠 85일 남았나? 그 유예기간 동안 최선을 다해 해주를 잡을 생각이다.

    “지금부터 85일이 지난 후에도 내가 아쉽지 않다면, 가도 좋아.”

    절대 그렇게 만들지는 않을 거고 말이야.

    얼굴을 내려 해주의 입술까지 다가간 은호가 나른하게 말했다.

    “키스하고 싶은데.”

    닿을 듯 가까워진 두 입술 사이에서 호흡이 뜨겁게 섞여 들었다.

    흥분한 걸까. 조금 전보다 호흡이 빨라진 해주가 조금은 몽롱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립스틱 얼룩져요.”

    “깨끗하게 먹어 치울게.”

    이미 코앞까지 다가서 있던 은호가 결국 입술을 겹쳤다.

    먹어 치울 거라더니. 입술을 삼킨 그가 맛이라도 보듯 혀끝으로 부드럽게 매만졌다. 강하게 빨아들이고 부드럽게 놓아주기를 반복하며 키스를 이어 나갔다.

    둥, 둥, 둥.

    클럽 음악의 비트가 심장 소리와 맞물려 온몸을 두드려 댔다. 그러자 나른한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발끝까지 내려간다.

    커다란 손이 등을 어루만지고 터트릴 듯 몸을 조였다.

    해주 역시 은호의 목에 두 팔을 두른 채 깊게 반응했다.

    입술을 열고 그를 받아들이며 심장의 열기에 모든 것을 내주었다.

    그래서였다. 문이 열리고 현욱이 룸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음악 소리가 커졌지만, 고막이 터질 듯 울려 대는 심장박동으로 키스에만 몰두했다.

    충격을 받은 것은 현욱이었다.

    그가 들어왔다는 것도 모른 채 은호와의 키스에 여념 없는 해주는 지나치게 야했다. 그래서 더 낯설었다.

    그러면서도 눈을 떼지 못했다.

    해주와의 키스를 얼마나 꿈꿨는데, 해주의 몸을 저렇게 더듬고 싶었는데.

    가짜 결혼이기에 그저 형식적인 결혼 생활을 하겠거니 생각하며 자위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현욱이 걸음을 돌린 것은 제 뒤를 따라온 여자의 인기척 때문이었다.

    당황한 현욱이 클럽을 가로질러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막 입구를 벗어난 현욱을 누군가 붙들었다. 조금 전 그 여자다.

    해주와 무척이나 닮은 분위기를 가진 한국대학교 후배.

    “현욱 선배.”

    그의 팔을 붙든 여자가 이름을 불러 주자 그제야 현실 감각이 돌아왔다.

    야한 동영상을 훔쳐보다 들킨 아이처럼, 화끈거리던 심장이 조금은 진정되는 기분이다.

    “그러지 말고, 저랑 술 한잔할래요?”

    “……?”

    대학 후배라고는 하지만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

    “나도 기분이 별로거든요. 선배처럼.”

    평소의 현욱이라면 거절했을 일이다. 낯선 사람과 가지는 술자리라니. 생각만 해도 불편하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좋아요.”

    웃기게도 눈앞의 여자에게서 해주가 겹쳐 보여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딱, 한잔만 하죠.”

    * * *

    H호텔 클럽의 프라이빗 룸.

    몇 번이나 문이 열렸다 닫혔지만, 키스를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 없었다.

    해주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숨결조차 달아서 오래도록 탐했다.

    장담했던 대로 빨간 입술이 원래의 색을 찾기까지 이어진 지독한 탐식이었다.

    더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은호가 입술을 떨어뜨렸다.

    은호가 물러나자 해주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열렸다. 빼곡하게 들어찬 긴 속눈썹 사이로 담갈색 눈동자가 아롱거렸다.

    그런 그녀를 뜨거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주머니에서 호텔 카드키를 꺼내 들었다. 그러면서도 다른 손은 끝없이 해주의 몸을 더듬고 있다.

    “올라갈래?”

    나른한 눈빛의 해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주의 입술 가에 살짝 번진 붉은 립스틱을 손가락으로 쓸어 낸 은호가 뭉근히 미소 지었다.

    그녀의 손을 꼭 쥔 은호가 당장에 프라이빗 룸을 나섰다. 홀을 가로질러 클럽 입구로 걸어가는 두 사람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어이, 차은호. 어디 가는 거야?”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샴페인을 마시던 진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당장에라도 제 손에 들어와 있는 여자의 목을 물어뜯고, 몸을 먹어 버리고 싶을 뿐이다.

    간신히 사람들의 시선을 따돌린 은호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해주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집어삼킬 듯 입술을 겹쳤다. 살점을 물어뜯고 턱을 삼키며 목덜미를 탐했다.

    잇새로 미끄러지는 감각이 미칠 듯 좋다. 혀끝에 닿는 살결이 달아서 입 안에서 녹여 버리고 싶다.

    그 순간 은호는 직감했다.

    그가 해주에게 미쳐 가고 있음을 말이다.

    오랜 시간 품었던 욕망이 해소된 순간, 더 짙은 욕망이 덧칠되고 있었다.

    색색으로 덧칠된 욕망은 언젠가는 검디검은 우주가 되어 그를 덮칠 것이다.

    이젠 이 여자가 그의 우주인가…….

    * * *

    대모산 자락, 신률의 집으로 향하는 원정의 발걸음이 조심스러웠다.

    윤규로부터 더는 신률을 찾아가지 말라는 경고 섞인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오래전 그 일이 있었던 때부터 지금까지, 윤규는 그저 원정에게 약하디약한 존재였다. 그녀가 하는 말이라면 토를 달지 않고 다 받아 줄 만큼 그녀에게 신실한 남편이었다.

    그런데, 그런 윤규가 최근에는 조금 변했다.

    [더는 은호 부부를 흔들지 마. 그런 무당 나부랭이 말에 휘둘리지 말라는 말이야.]

    해주에게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윤규에게 전한 순간이었다.

    신률에게 들은 이야기라는 걸 직감한 윤규는 벼락같이 화를 냈다. 그래도 그렇지, 무당 나부랭이라니.

    [무당 나부랭이라니……. 여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신률 도사님은…….]

    [부끄러운 줄 알아. 창성금융그룹의 회장 사모라는 사람이 무속 신앙 신봉자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야.]

    그녀의 치성을 무속 신앙 신봉자로 폄훼하다니, 억울하기만 했다.

    [내가 도사님께 치성드리러 다닌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이에요? 알 만한 사람들은 다…….]

    [당신은 24년 전에도 그랬지.]

    충격이었다. 어떻게 24년 전의 일을 입에 담아. 원정이 히스테리를 부리듯 고함을 바락 질렀다.

    [여보!]

    [조금이라도 은호를 생각한다면, 당장 그만둬.]

    마치 시간을 거슬러 24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33년 전인가. 서슬 퍼런 얼굴의 윤규는 서늘한 목소리로 선전포고를 던졌다.

    [아니, 한 번만 더 내 귀에 그런 소리가 들리면 그때는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어젯밤의 윤규를 떠올린 원정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어떻게 24년 전 이야기를 꺼낼 수 있어?”

    서운한 듯 입술을 볼통하게 내민 원정이 신률의 집으로 들어섰다.

    밤이 깊었건만, 신률의 집은 여전히 사람들로 붐볐다.

    커다란 슈트 케이스에 현금을 가득 넣어 온 사람도 있었다.

    대한민국 돈은 ‘대모산 살모사’인 신률이 몽땅 끌어 담고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만큼, 그를 찾는 의뢰인들의 스케일은 남달랐다.

    그들을 흘깃 쳐다본 원정이 커다란 선글라스에 얼굴을 숨기며 뒷마당으로 향했다.

    조명이 환히 켜진 정자 위에서 신률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둘러 다가간 원정이 정자에 오르자 신률이 말없이 자리를 권했다.

    “도사님.”

    자리에 앉기 무섭게 본론부터 꺼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은호는 해주 일이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덤비고, 회장님도 이제는 저더러…….”

    그녀가 원한 것은 은호가 하루빨리 아이를 갖는 거였는데, 그게 뭐가 잘못이라고 이러는 건지. 억울한 마음이 치솟아 목이 메었다.

    원정이 훌쩍이자 소리 없이 혀를 찬 신률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24년 전에도 하신 일입니다. 그때는 어디 다들 조용했나요.”

    윤규에 이어서 신률까지 24년 전의 일을 거론하자 원정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왜 다들 그때 일을 기억나게 하는 거야. 왜.

    “하지만 그때는…….”

    그날의 일이 떠올라 원정의 손과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런 원정을 바라보며 신률이 서늘히 미소 지었다.

    “좀 쉬우셨겠죠. 상대가 미천한 존재이다 보니.”

    미천한 존재. 그래, 미천한 존재였지.

    원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어려울 것 없습니다. 작은 사모님도 따지고 보면, 미천한 존재기는 하니까요.”

    “하지만 은호가…….”

    “차은호 부회장님을 위한 길입니다. 작은 사모님은 이제 복사꽃 사주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어요.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더럽혀졌다고요. 다른 남자의 손을 탄 순간, 더는 홍염살의 해악을 막아 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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