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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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성금융 측으로부터 ‘금융인의 밤’ 초대장을 받기는 했지만 참석할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밤새 고열에 시달리며 고민을 거듭한 현욱은 그저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마음을 정했다. 차은호 부회장과 해주의 관계가 더는 계약관계에 머무르지 않는 듯한 느낌적인 느낌이었다.

    해주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다 내려놓고 떠나는 것이 도리일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양승태 교수의 전화 한 통이 그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해주 군 말이야. 이혼할 거라는 소문이 돌아.]

    [무슨 말씀이세요? 이혼이라니요?]

    [-재경은행 회장 사모 입에서 나온 말인데, 해주 군 시어머니가 이혼 변호사를 선임했다는군. 이미 다음 며느리까지 점찍어 둔 모양이고 말이야.]

    [정말이십니까? 교수님?]

    [-자네도 창성금융 사모에 대해 알 만큼 알잖아. 지독한 무속 신앙 신봉자인데, 그 도사인지 뭔지가 해주 군에 대해 나쁜 점괘를 내놓았다나 봐.]

    끔찍한 소식을 전한 양 교수는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조금 더 서둘러서 해주 군을 빨리 구해야겠어. 그 똑똑하고 착한 아이가 그런 집안에 휘둘리게 둘 수는 없지 않은가.]

    양 교수의 말을 떠올린 현욱이 H호텔 로비를 빠른 걸음으로 가로질렀다.

    클럽 앞에 다다른 현욱은 숨을 골랐다. 해주를 다시 본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우면서도 설렜기 때문이다.

    해주는 그에게 있어 그만큼 소중한 존재였다. 그런데, 그런 해주가 이혼을 한다니. 어젯밤과는 또 다른 의미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클럽 안으로 들어간 현욱이 안을 둘러보았다.

    화려하게 번쩍대는 조명과 고막을 찢을 듯 울리는 클럽 음악이 ‘금융인의 밤’이 아니라, 말 그대로 클럽에 온 듯한 착각이 들게 했다.

    “어디 있는 거야?”

    요란하게 치장한 사람들 틈으로 해주를 찾아내려는 현욱의 눈빛이 간절했다.

    그리고 늘 그랬듯 금세 해주를 찾을 수 있었다.

    샴페인 잔을 들고 창성금융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지해주. 과연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아름다운 자태다.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해주가 사람들에게 고개를 까딱여 인사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그런 그녀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우아한 발걸음이 클럽 뒤쪽의 정원으로 이어졌다. 조용하게 이야기 나누기를 원했던 현욱이기에 서둘러 그녀의 뒤를 밟았다.

    막 정원으로 들어서려는 해주를 현욱이 붙들었다.

    “해주야, 너 이혼한다는 말이 사실이야?”

    해주의 어깨를 잡아당겨 돌려세운 현욱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해주라고 생각했는데, 해주가 아니야?

    어떻게 해주가 아닐 수 있지? 멀리서 봤을 때는 똑같았는데? 완전히 다른 사람을 어떻게 착각할 수 있어. 그것도 해주를.

    충격이었다.

    “죄송합니다. 사람을…… 착각했네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현욱을 바라보며 상대방 역시 놀란 모양이었다.

    그런데 의외의 상황이 펼쳐졌다.

    “강현욱 선배?”

    분명 처음 보는 여자인데 그를 알은체했다.

    “……누구? 날 알아요?”

    먼저 알은체한 건 저면서 누구냐는 질문에는 몹시도 당황한 모양이다.

    밤색 눈동자가 파들거리며 떨리더니 간신히 대답을 내놓았다.

    “알죠. 저도 한국대학교 경영학과 출신인걸요?”

    그녀의 대답에 현욱이 멋쩍게 웃었다.

    “아, 그렇군요. 못 알아봐서 죄송합니다.”

    평소대로였다면 이름이나 학번 정도는 물어봤을 텐데, 해주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한 현욱은 그저 주위를 둘러보기 바빴다.

    그런 그에게 여자가 조용히 말을 걸었다.

    “지해주 본부장 찾으세요?”

    아까와는 달리 어딘지 모르게 싸늘한 음색이다.

    “어디 있는지 알아요?”

    “양승태 교수님과 룸에 들어갔어요.”

    맞아. 양 교수님도 오신다고 하셨지.

    고개를 끄덕인 현욱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물었다.

    “룸……이라면?”

    그러자 새침한 표정의 여자가 홀 너머를 가리켰다.

    “저쪽에 프라이빗 룸이 있거든요.”

    “고마워요.”

    짧게 인사한 현욱이 여자가 가리킨 방향으로 걸음을 돌렸다. 그런 현욱을 싸늘한 목소리가 붙들었다.

    “선배는 여전하네요.”

    “……?”

    걸음을 멈춘 현욱이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지해주바라기라고요. 한결같은 모습이 멋있긴 하지만, 답답해서 속 터져요. 선배.”

    * * *

    시끄러운 클럽 안에서 조용한 곳을 찾다 보니 프라이빗 룸 외에는 생각나지 않았다.

    하필 이런 곳에서, 하필 이런 차림으로 논문 지도 교수님과 마주하다니, 조금은 민망했다.

    이런저런 질문을 던진 양 교수가 해주의 표정을 살피더니 심각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차은호 부회장에게 이야기하지 않았군.”

    양 교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분명 은호에게도 컬럼비아대학교 장학생 선발에 대해 알려 주었다.

    서로 의논해 보고 결정하라며 시간을 준 셈이었다. 그런데 의논조차 하지 않았다니. 어쩌려고 이러는 건지.

    “해주 군, 이게 크고 중요한 기회인 건 알지? 자네의 오랜 꿈이기도 했어.”

    아끼는 제자였지만 기회를 주지 못했다. 실력 면에서는 늘 1순위인 해주가 장학생 선발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는 여러 가지 것들이 존재했다.

    그가 단독으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해주였을 텐데, 늘 다른 교수들의 반대에 부닥쳐야 했다.

    그녀의 입지가 나아진 것은 창성금융그룹의 며느리가 되고부터였다. 그렇게 해주의 남편인 은호가 창성금융그룹 부회장 자리에 오르는 것이 유력해지자, 그제야 다른 교수들이 찬성표를 던졌다.

    그런데 이혼 소문이 돈다? 해주의 유학에 얼음물을 끼얹는 경우의 수가 발생할지도 모르겠다.

    “망설이지 말고 바로 진행하면 좋겠어. 머뭇거리다가 다 된 밥에 코 빠뜨리게 된다고.”

    차마 시어머니 이야기를 꺼낼 수 없어서 양 교수는 쓴 입맛을 삼켰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해주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남편과…… 의논해 볼게요.”

    “그래, 다음 주까지는 답을 줘. 아니, 반드시 긍정적인 대답으로 가지고 와.”

    안타까움을 애써 감춘 양 교수가 해주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막 룸에서 빠져나오려 하는데, 해주가 그를 조용히 불렀다.

    “교수님.”

    해주의 목소리 끝에 물기가 어려 있어 왠지 가슴 한편이 먹먹해졌다.

    “만일에요, 제가 유학도 실패하고, 창성금융에서도 나오게 되면요.”

    입술 끝을 잘근잘근 씹으며 잠시 뜸을 들인 해주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저 학교에 시간강사 자리 하나 정도는 주실 수 있으세요?”

    애써 웃는 해주의 얼굴에서 울적한 그림자를 발견한 양 교수가 정색하며 야단쳤다.

    “그런 생각은 왜 해?”

    예쁘고, 똑똑하고, 마음씨까지 고왔던 해주를 참 많이 예뻐했다. 고아라는 이유로, 가진 것이 없다는 이유로, 여기저기서 천덕꾸러기가 되는 해주가 안타까웠다.

    그래서 창성금융그룹의 며느리가 된다는 소식에 많이 기뻤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거라는 창성의 후계자가 조금 못마땅하기는 했지만, 결혼하면 팔자가 피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뒷배경 없는 고아는 겨우 점쟁이의 점괘 하나에 제 자리를 빼앗길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그럴수록 독하게 마음먹고 딱 붙어 있어. 거기가 자네 자리니까.”

    순간 해주의 눈시울이 빨갛게 물들었다.

    커다란 눈망울에 물기가 어리며 갈색 눈동자가 아른거렸다. 그러더니 고개를 꾸벅 숙인다.

    “고맙습니다.”

    그때였다. 프라이빗 룸 문이 열리며 은호가 들어왔다.

    일어서 있는 양 교수를 바라보더니 미간을 슬쩍 좁혔다.

    “어디 가세요? 음식 시켜 뒀는데.”

    은호를 바라본 양 교수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어디로 보나 잘난 남자라 흠을 찾아낼 수 없다. 눈에 띄는 흠이라도 있으면 해주에게 당장 버리라며 엄포라도 놓을 텐데 말이다.

    “둘이서 오붓하게 먹어요.”

    코트를 단단히 고쳐 입은 양 교수가 해주를 슬쩍 가리켰다.

    “난 해주 군 얼굴 봤으니 그만 돌아가렵니다. 여긴 너무 시끄러워서 싫어.”

    못마땅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양 교수가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차은호 부회장.”

    그의 부름에 은호의 눈썹이 비스듬히 휘었다. 어찌 보면 오만하기 짝이 없는 모습인데, 오만함이라는 단어를 갖다 붙이기에는 지나치게 매혹적이다.

    그런 은호를 안타까이 바라본 양 교수가 말을 이었다.

    “잘 알겠지만, 지해주 본부장은 창성에도 차 부회장 개인에게도 꼭 필요한 존재예요.”

    “압니다.”

    “알면 좀 잘해 줘요. 얘한테 이런 옷…… 입히지 말고 말이야.”

    나무라는 목소리에 슬쩍 짜증이 섞여 들었다.

    “오죽 위기의식을 느끼면 이러겠어?”

    오늘 해주의 모습은 양승태 교수에게도 사뭇 충격이었다. 얌전하기만 하던 요조숙녀가 아이돌 가수처럼 느껴질 정도로 파격적으로 변신했다. 그만큼 남편의 스캔들이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씁쓸함을 삼킨 양 교수가 해주를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고는 문을 열었다.

    “갑니다.”

    그러자 자리에서 발딱 일어난 해주가 뒤를 따랐다.

    “교수님, 제가 배웅…….”

    “나오지 마. 자네는 자네 남편과 대화나 해.”

    해주의 코앞에서 문이 달칵― 하고 닫혔다. 잠시 열렸던 문틈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웅장한 음악 소리가 잦아들며 정적이 흘렀다.

    잠시 숨을 고른 해주가 은호를 마주 보았다.

    “컬럼비아 가게 된 거 알고 있었죠?”

    “왜 그렇게 생각해?”

    해주의 물음에 은호는 질문으로 답했다.

    “집 앞에서 현욱 선배랑 이야기하는 거 들었으면서, 묻지 않았잖아요.”

    모르고 있었다면 물었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그는 끝까지 묻지 않았다.

    “알고 있었으면서 왜 가만히 있었어요?”

    그녀가 유학을 떠난다는데, 그게 그에게는 아무 일도 아니었을까. 무시해도 좋을 만큼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을까.

    그런데,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대답이 돌아왔다.

    “네가 간다고 할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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