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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금융인의 밤 집행위원회가 대거 물갈이되었다. 현역에서 물러난 모 그룹 회장의 막내아들이 자리를 물려받으며 집행위원장이 되었고, 젊은 세대답게 행사 분위기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장소부터가 클럽에, ‘레드’라는 드레스 코드까지. 나이 지긋한 참석자들은 연신 미간을 찌푸렸다.
“삼화금융 회장님 말이야, 드레스 코드를 못 지켜서 방금 귀가하셨어.”
샴페인 두 잔을 가지고 온 진우가 한 잔을 은호에게 건넸다.
“그래?”
잔을 받아 든 은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그런 은호를 바라보며 진우가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차은호가 드레스 코드를 지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말이야.”
쓸데없는 짓이라며 무시할 줄 알았는데, 옷깃에 빨간색 부토니에르를 달고 나타날 줄이야.
진우의 시선이 제 옷깃에 닿아 있자 은호가 픽― 웃음을 흘렸다.
“해주가 달아 주더라.”
일찍 퇴근한다며 잠시 부회장실을 찾은 해주가 그의 옷깃에 꽂아 준 부토니에르다.
[장미석이에요. 과한 액세서리는 아니니 이 정도는 참아 줘요.]
군더더기를 싫어하는 은호가 제 옷깃에 꽂히고 있는 부토니에르를 못마땅한 듯 바라보자 해주가 슬쩍 한마디를 더 얹었다.
[내 남편이 파티장 입구에서 쫓겨나면 내가 너무 자존심 상하잖아요.]
그 한마디에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기어코 뜻을 이룬 해주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그게 2시간 전의 일이다.
왼쪽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한 은호가 미간을 슬며시 좁혔다.
“늦어, 지해주. 늦다고.”
마땅히 자리해야 할 곳에 해주가 없자 목구멍 안쪽이 빠듯해지고 입 안이 바짝 말라 갔다.
그때였다.
클럽 입구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오우, 둘 중 하나가 온 모양인데?”
진우는 아까부터 입구가 소란스러우면 같은 소리를 지껄여 댔다. 이곳에 모인 사람 대부분이 지해주와 박경은의 대결 구도를 보고 싶어 한다고 말이다.
오늘의 승자는 과연 누굴까. 누가 차은호의 마음을 사로잡을까. 내기를 건 그룹도 있다고 들었다.
“지해주는 요조숙녀, 박경은은 요부. 다들 박경은이 이길 거라고 점치더라. 남자는 결국 성욕에 무너지는 동물이라고 말이야. 근데…….”
말을 이어 가던 진우가 갑자기 입술을 닫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저건 박경은일까? 지해주일까?”
진우의 말에 은호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박경은이잖아.”
도대체 뭐가 닮았다고 그러는 건지, 당최 이해되지 않았다.
해주와 저 여자가 어떻게 헷갈릴 수 있는지. 아무리 해주의 옷을 가져다 입었다 해도 발뒤꿈치에도 못 미치는 여자를 말이다.
“금융인의 밤이 언제부터 가장무도회가 된 거야? 정말 해주 씨와 똑같이 꾸며서 왔네?”
기가 막힌다는 듯 진우가 헛헛한 웃음을 흘렸다. 해주의 우아한 발걸음까지 흉내 낸 여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부회장님?”
코앞까지 다가와서는 눈꼬리를 곱게 접으며 알은체하는 모습까지 영락없는 지해주다. 그런 경은을 바라보며 은호가 픽― 웃음을 흘렸다.
“안 부끄럽습니까?”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목소리에 빈정거림이 담겼다.
힐난 섞인 물음에 경은의 표정이 미묘하게 어긋났다.
“부끄러워할 일이…… 뭐가 있을까요?”
정말 모르겠다는 듯 깜빡이는 눈동자가 무구하기까지 하다.
“아이라인이라도 번졌을까요?”
한 손을 우아하게 들어 올린 경은이 제 뺨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그러고는 고운 눈웃음을 짓는다.
“부회장님 오신다고 해서 신경 써서 예쁘게 하고 왔는데, 마음에 드세요?”
마치 은호와 특별한 사이라도 된다는 듯 친근하게 말을 거는 모습에 기가 막힌 진우가 실소했다. 하지만 은호는 그런 경은을 그저 서늘히 담아낼 뿐이다.
은회색 실크 원피스. 해주가 입은 드레스와 똑같은 디자인의 옷이다. 목걸이도 그날 원정이 해주의 목에 걸어 주었던, 바로 그것이다. 귀걸이 역시 부적이라며 원정이 건넸던 거고. 머리 모양도, 화장법도, 손에 들린 클러치까지 해주와 다른 점이 하나도 없다.
경은을 찬찬히 훑은 은호가 픽― 웃음을 흘렸다. 서늘한 웃음에 깃든 경멸이 잔혹하기까지 했다.
“하나는 틀렸어, 박경은 씨.”
그러고는 경은의 발끝을 시선으로 가리켰다.
“해주가 그날 신었던 구두는 그게 아니야.”
빈정거리며 내뱉는 말에 경은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 갔다. 딱 하나 놓쳤는데, 하필 그걸 은호에게 들켰으니 당황스럽기는 했을 것이다.
“뭐, 내가 미국에서 가지고 온 거라 한국에서는 구할 수 없었을 거야.”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친절하게 설명해 준 은호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가 런던에서 말했잖아.”
런던에서 열렸던 파티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해주를 그대로 흉내 낸 경은이 마치 저가 해주인 양 그의 곁을 맴돌았다.
그래서 아주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흉내 낼 수 없는 게 있다고 말이야.”
못 알아들을까 봐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을 다해 가르쳐 주었다.
“향기가 달라.”
하필 그 모습이 사진에 찍혀 기사화되긴 했지만, 나름 경고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왜 다른 줄 알아?”
어째 이 여자는 발전이 없다.
“영혼이 달라서야.”
피곤하게도 말이다.
“해주는 당신처럼 남의 인생이나 탐내는 짝퉁이 아니거든.”
잔혹한 빛을 띠고 싸늘하게 반들거리던 눈동자가 어느덧 경은의 어깨 너머를 향했다. 그러고는 시릴 만큼 차갑던 눈동자에 뭉근한 기운이 더해졌다.
“오리지널이란 저런 거지.”
은호의 시선이 닿은 곳에 해주가 존재했다.
막 클럽 안으로 들어온 해주가 인파를 가르고 다가왔다. 그 모습이 마치 슬로 모션의 영화를 보는 듯 느껴진다.
시폰 소재의 까만색 드레스 슈트가 그녀의 걸음을 따라 찰랑거렸다. 상큼하게 내딛는 걸음마다 까만 바짓단 사이로 빨간 구두코가 보였다 사라졌다. 가지런히 내린 앞머리와 높이 올려 묶은 포니테일이 짙은 스모키 화장을 한 해주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은호의 시선이 제게 닿아 있다는 것을 안 건지, 빨갛게 색칠한 해주의 입술이 고운 호선을 만들어 냈다.
기대하라더니, 기대 이상이잖아.
은호의 입꼬리가 슬며시 위를 향했다.
“와우, 내 눈이 제대로 된 거 맞아?”
해주가 돋보이는 건 비단 은호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손등으로 눈을 비빈 진우가 좀 더 자세히 보려는 듯 눈매를 좁혔다.
“무슨 소리야?”
“저기 해주 씨 맞지?”
손가락 끝으로 정확히 해주를 가리킨 진우가 은호를 돌아보았다.
“너희 부부, 요즘 무슨 일 있어?”
얼굴을 잔뜩 찌푸린 진우가 해주와 은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너도 네 와이프도, 오늘 색기가 장난 아니야.”
원래도 잉꼬부부로 유명했지만, 오늘따라 묘한 분위기가 두 사람 사이를 감돌았다. 서로를 향하는 시선에 꿀이 떨어지는 건 평상시와 마찬가지인데, 오늘은 거기다 야릇한 열감이 더해졌다. 그게 왜 그렇게 야해 보이는지, 진우가 입을 헤벌리고 물었다.
“요즘 속궁합 최고조인 거지? 응? 그런 거지? 하루에 막 두 번, 세 번 하는 거지?”
진우가 저급한 말을 농담처럼 입에 올리자 대번에 은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허튼소리 그만하고 침이나 닦아. 네가 침 흘리는 여자, 내 아내니까.”
“나도 네 아내인 거 알아.”
장난스럽게 손등으로 입술을 훔친 진우가 해주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조심해, 차은호. 너 잘못하다가는 마누라 뺏기겠어.”
빈말이 아니었다.
여태 해주는 지나치게 정갈하고 깨끗해서 차마 다가갈 수 없는, 그런 어려운 존재였다. 과연 차은호가 그런 아내에게서 100% 만족을 얻을까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박경은이 나타났을 때, 다들 경은 쪽에 무게를 실었던 거고 말이다.
하지만 틀린 생각이었다.
이쪽이야말로 요부다. 성녀를 가장한 요부.
“이야, 해주 씨.”
가까이 다가온 해주를 반갑게 맞아 준 진우가 손뼉을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오늘 너무 아름다운 거 아닙니까?”
진우의 환호에 대답 대신 눈꼬리를 접으며 사뭇 도도한 미소를 지어 보인 해주가 은호 앞에서 멈춰 섰다.
“나 왔어요.”
그러자 은호가 해주의 허리를 살며시 감싸 안았다.
“늦었어, 달링.”
그녀를 바짝 끌어다 붙인 은호가 뜨거운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하체와 가슴이 부닥친 것으로도 모자라 은호의 손이 은근히 허리 아래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조금도 당황한 기색 없이 해주가 고운 눈웃음을 보냈다.
“차가 막혔어요.”
오히려 한술 더 떠 은호의 옷깃을 손가락 끝으로 농밀하게 쓰다듬었다.
“기다렸어요?”
수줍은 듯 올려다보는 눈빛이 퍽 색정적이다.
“기다렸지. 네 말대로 기대하면서.”
도발하는 듯한 해주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은호가 시선을 느른하게 내렸다.
새빨간 입술을 잠시 눈에 담더니 시폰 소재의 드레스 슈트를 잠잠히 훑었다.
중세 시대의 옷처럼 목 부분에 풍성하게 잡힌 셔링, 풍성한 퍼프형 소매, 잘록하게 손목을 조이는 퍼프스, 목에서 배꼽 아래까지 빼곡하게 들어찬 단추. 얼핏 보면 얌전한 디자인의 옷이건만, 속이 훤히 들여다보여 안에 맞춰 입은 레이스 소재의 속옷이 비쳐 보였다.
순간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 당장 옷을 입히고 싶기도 하고, 당장에라도 옷을 벗겨서 그를 박아 넣고 싶다.
“어때요? 기대한 대로인가요?”
그런 걸 노린 건지, 질문을 던지는 해주의 표정이 앙큼하다. 그의 반응을 즐기는 듯 보이기도 하고 말이다.
“기대 이상이야. 예뻐.”
일단은 조금 더 관망하기로 한 은호가 빙긋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쓸었다.
“미치게 예뻐서 탈이지만.”
주위 사람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밀어를 속삭이는 모습에 진우가 휘파람을 불었다.
“이럴 거면 방 잡고 올라가. 보는 사람들 가슴 설레게 하지 말고.”
아니나 다를까. 주위의 시선이 쏟아지고 있었다. 워낙 인물이 출중한 두 사람이기에 마치 섹시 화보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다.
“안 그래도 그러려고.”
진우의 말에 슬쩍 웃어 보인 은호가 클럽 입구를 눈짓했다.
“갈래?”
살포시 미소 지은 해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양승태 교수님 오시기로 했어요.”
“양 교수?”
은호의 미간에 실금이 그려졌다. 양 교수라면 컬럼비아 건으로?
“할 이야기가 있으시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