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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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밑이 아득해질 만큼 짙은 키스가 이어졌다. 이제는 봐주지 않겠다던 선언을 지키기라도 하려는 듯 저돌적이고도 야만적인 키스였다.

숨 쉴 틈도 없이 밀려드는 은호를 받아들이며 해주가 거친 숨을 토했다.

입 안에서 뒤섞인 타액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들자 묘한 쾌감에 허리가 들썩였다.

이러면 안 되는데, 밀어내야 하는데.

지금은 화를 낼 타이밍인데…….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해주의 몸은 솔직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의 목을 끌어안고, 가쁜 숨을 내뱉으며, 그가 퍼붓는 키스에 열띤 호응을 보낸다.

‘미쳤어.’

하지만 멈추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때였다. 은호의 손이 그녀의 재킷 단추를 끌렀다. 그러고는 이내 블라우스 속을 파고들었다.

얇은 블라우스 안으로 들이닥친 손이 속옷을 헤집고 몸을 자극해 왔다. 힘껏 움켜쥐었다가 살살 달래는 손길에 해주의 입술을 뚫고 가느다란 신음이 연신 흘렀다.

순간, 은호가 키스를 멈췄다.

까만 눈동자가 이채를 띠며 해주를 담아냈다. 그러고는 그녀의 손을 잡고서 제 책상으로 이끌었다.

대뜸 그녀를 안아 올려 책상에 앉힌 은호가 재킷을 벗겨 바닥으로 던져 버렸다.

“은호 씨.”

당황한 해주가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 없는 그는 블라우스 단추를 풀기에 여념이 없었다. 자그마한 단추를 성마르게 풀어 내리는 커다란 손이 어딘지 모르게 다급해 보였다. 그런 그의 손에 해주가 제 손을 얹었다.

“은호 씨, 여기 사무실이야.”

아무리 급해도 어떻게 여기서…….

해주가 고개를 가만히 저었다.

이마저도 웃기는 일이었다. 발그레 상기된 얼굴과 들썩이는 가슴, 바짝 말라 가는 입술. 해주의 모든 것이 그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앙큼하게도 이러면 안 된다고 고개를 젓다니.

그런 그녀를 빤히 들여다보던 은호가 인터폰을 눌렀다.

-네, 부회장님.

“정 실장님, 지금부터 1시간, 여기 아무도 들이지 마세요. 정 실장님도 출입 금지입니다.”

-……네.

조금은 당황한 듯 들리는 대답이었지만, 은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인터폰을 껐다.

“이젠 사무실 아니야. 내 사적 공간이지.”

그러고는 블라우스 단추에 다시금 손을 댔다.

“넌 그냥 가만히 있으면 돼.”

기어코 블라우스를 벗긴 은호가 속옷마저 벗겨 냈다.

눈부시게 드러난 몸을 감상하듯 바라본 은호가 손을 가져다 댔다. 천천히 자극하는 손길이 무척이나 야해 해주가 어깨를 떨었다.

“즐겨. 미치게 만들어 줄 테니까.”

이내 입술이 맞물렸다.

* * *

즐겨, 미치게 만들어 줄 테니까.

그 짧은 한마디를 끝으로 말이 없었다. 미치게 만들어 준다는 제 말을 기어코 지켜 낸 은호 때문에 그야말로 해주는 엉망이 되었다.

밤이 아닌 시간에, 침실이 아닌 곳에서 나눈 사랑이 끔찍한 수치심과 아찔한 쾌감을 동시에 가져다주었다.

눈꼬리를 따라 흘러내리는 눈물까지 죄다 들이마신 은호는 그녀에게 옷을 입혀 주었다. 벗겨 낸 역순으로 하나씩 입히는 손길이 아주 정성스러웠다.

책상 위에 흐드러지듯 누운 해주는 그가 도와주어서야 간신히 일어날 수 있었다.

아직도 몸과 마음이 나른하기만 했다.

오늘 아침만 해도 통증으로 정신이 없었는데, 통증이 사라진 지금은 쾌락만 온전히 남았다.

“당신 나빠.”

은호가 그녀의 재킷 단추를 다 잠그고 난 후였다.

“미워, 차은호.”

물기 어린 목소리로 원망을 퍼붓자 은호가 그녀의 귓바퀴에 입술을 가져갔다.

“좋았잖아.”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인 그가 귓바퀴를 잘근잘근 씹었다. 귓불을 삼키고 목덜미를 더듬었다. 잇새로 미끄러지는 말랑한 감촉과 해주의 짙은 살냄새가 또다시 정욕을 불러일으킨다.

“미쳐서는 울부짖었으면서.”

놀리듯 뱉은 한마디에 해주의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아니었다고는 하지 마. 너 완전히 즐겼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즐겼다. 완전히 미쳐서는 욕망을 폭발시켰다. 무서울 정도로 빠져들어서는 은호가 가져다주는 쾌락의 늪에서 허우적거렸다.

목덜미에서 입술을 떨어뜨린 은호가 해주를 조용히 눈에 담았다.

“사랑보다 짙은 감정이 욕망이랬잖아.”

동의할 수 없는 말이다. 사랑보다 짙은 감정이 욕망이라니. 그를 욕망하는 이유가 사랑 때문인 것을.

해주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은호가 엷게 웃었다.

“나를 사랑하려 들지 말고, 욕망해. 해주야.”

문득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왜 사랑은 안 돼요?”

그에게 몸을 허락한 것은 결국 사랑 때문이었다. 언젠가 헤어지게 되더라도 후회 없는 시간을 가지고 싶어서 말이다.

그런 그녀에게 ‘사랑하려 들지 말고 욕망하라’는 그의 말은 참으로 잔혹했다.

“왜 당신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그렇게까지 부정해요? 지극히 본능적인 감정이잖아요.”

질문을 던진 해주가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의 입에서 어떤 대답이 나오든지 상처를 피할 길을 없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까만 눈동자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영원하지 않으니까.”

웃음기가 사라진 검은 눈은 사막처럼 메말라 퍼석거리게 느껴졌다.

“그리고, 지나치게 무모하니까.”

영원하지도 않은 것이 무모하기까지 하다니. 그가 생각하는 사랑이란 정말이지 쓸모없는 감정의 찌꺼기인 모양이다.

결국 해주는 실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따지면 욕망도 무모하기는 마찬가지인 것을. 천하의 차은호가 사무실에서 한낮에 정사를 가지다니. 미친 짓이잖아.

웃음을 삼킨 해주가 입술을 열었다.

“그럼 당신이 말하는 욕망은…… 영원하기는 한가요?”

“응. 아마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은호가 그녀의 입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적어도 널 향한 욕망은 영원할 것 같거든.”

“무슨 대답이…… 그렇게 불명확해요? 아마도라니.”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면서 영원을 논하다니. 해주가 코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그녀의 입술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은호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불명확한가?”

나른히 중얼거린 은호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런 은호를 바라보며 숨을 참은 해주가 간신히 대답했다.

“불명확하죠.”

“그럼 겪어 봐. 겪어 보면 알 거잖아.”

다시 한번 입술이 맞물렸다.

끝난 줄 알았는데, 다시 이어진 키스에 당황할 새도 없이 그가 안으로 밀려들었다.

도대체 지난 3년을 어떻게 견뎠나 싶을 정도로 지독한 탐심이었다.

무심하고 무정하고 무감하던 차은호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돌변할 수 있는지, 정말이지 의문이었다.

“겪어 보고 판단해.”

깊고 나른한 키스가 끝나고 입술을 물린 은호가 조용히 속삭였다.

“내가 널 어디까지 욕망하는지. 얼마나 원하는지 말이야.”

슬며시 그녀에게 몸을 부닥친 은호가 다시 단단해진 제 몸을 확인시켜 주었다.

“아직 시간 조금 더 남았는데, 한 번 더 할래?”

“싫어요.”

그의 가슴을 힘껏 밀어낸 해주가 기겁하며 고개를 저었다.

“오늘 저녁 ‘금융인의 밤’에 제대로 된 걸음걸이로 참석하고 싶어요.”

해주의 정색한 말에 은호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럼 6시에 1층에서 봐.”

‘금융인의 밤’.

대한민국의 돈줄을 쥐고 있는 금융 그룹 관계자들의 연말 파티이다.

매년 H호텔 연회장을 빌려서 하더니, 올해는 지하 1층의 클럽을 빌렸다고 들었다.

“난 옷을 좀 갈아입어야 해서 청담동에 들렀다 가려고요.”

올해는 특별히 드레스 코드까지 주어졌다. 박경은 그 여자도 참석할 것이고, 현욱도 오겠지.

“가서 봐요, 차은호 씨.”

재킷을 반듯하게 고쳐 입은 해주가 슬쩍 웃으며 발길을 돌렸다. 그런 그녀를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던 은호가 입을 열었다.

“뭘 얼마나 변신해서 나타나려고?”

그러자 몸을 빙그르 돌린 해주가 뒤를 돌아보았다.

“글쎄요? 내 고삐를 푼 건 당신이니까.”

“……?”

“기대하라고요.”

* * *

남산 끝자락의 H호텔 입구가 고급 세단들로 붐볐다. 줄줄이 들어선 자동차에서 내린 금융인들이 서로 인사 나누기 바빴다.

호텔 정문 앞으로 은호의 차가 들어서자 주위의 시선이 몰려들었다. 최근에 부회장 자리에 오르며 ‘최연소 부회장’이란 타이틀을 거머쥔 은호는 이어서 터진 몇 건의 스캔들로 인해 세간의 관심을 받고 있었다.

그런 그가 차에서 내려서자 시선이 좀 더 노골적으로 변했다. 개중 몇은 다가와서 먼저 인사를 건넸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저 뒷말을 주고받기 바빴다.

그때였다. 미리 와 있던 진우가 가까이 다가섰다.

“역시 차은호. 등장만으로 분위기를 휘어잡아 버렸어.”

“까분다, 또.”

서늘한 은호의 말에 멋쩍게 웃은 진우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해주 씨는?”

이런 자리에 올 때는 늘 해주와 함께였는데, 어째 해주가 보이지 않아 진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올 거야. 옷 갈아입으러 갔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은호가 호텔 안으로 들어가자 진우가 뒤를 따랐다.

“오― 신경 쓰이나 보다.”

은호가 걸음을 멈추고 진우를 돌아보았다.

“신경 쓰인다니? 해주가 뭘?”

“박경은.”

당연하다는 듯 내뱉는 진우의 대답에 은호가 미간을 좁혔다.

“박경은? 그 여자를 왜?”

“넌 사내 게시판 안 봐?”

“그딴 걸 왜 봐?”

지극히 차은호다운 대답에 진우는 실소할 수밖에 없었다. 쓸데없는 감정 소모 따위는 하지 않겠다는 은호의 확고한 신념이기도 했다. 하지만 더는 그러면 안 될 건데…….

“좀 봐라. 그걸 봐야 해주 씨가 얼마나 힘든지 알 것 아니야.”

한숨을 내쉰 진우가 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서는 사진 한 장을 보여 주었다.

“이 사진 좀 봐. 이게 누군 거 같아?”

사진 속에는 해주를 그대로 흉내 낸 경은이 웃고 있었다.

“이 드레스 좀 봐. 오늘 입고 올 거라며 박경은이 올린 건데, 양평에서 열렸던 파티에서 해주 씨가 입었던 거랑 똑같아.”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박경은 말이야, 지해주 카피캣이라고 소문났어. 차은호에 미쳐서는 지해주가 되고 싶어 그러는 거라고 말이야.”

진우의 말에 은호의 한쪽 눈썹이 삐뚜름하게 올라섰다.

“끔찍하지 않겠어? 누군가가 자신을 똑같이 따라 한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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