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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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성껏 눌러쓴 글씨와 수십 장에 달하는 사진.

    은호의 눈매가 불쾌함으로 일그러졌다.

    “미친 거 아니야?”

    민영의 제보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쉽게 믿을 수는 없었다. 사실을 확인한 지금은, 불쾌할 뿐이다.

    서랍을 열어 편지와 사진을 쓸어 넣은 은호가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정 실장이 빠르게 답했다.

    -네, 부회장님.

    “정 실장, 내가 알아보라고 한 것 어떻게 됐어요?”

    -오늘 저녁까지 답변 준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저녁이라…….”

    미간을 좁힌 은호가 말꼬리를 길게 뺐다. 그러자 정 실장이 기민하게 대답을 내놓았다.

    -당겨 보겠습니다.

    “부탁해요.”

    -네, 부회……. 어, 본부장님?

    본부장? 은호의 한쪽 눈썹이 비스듬히 휘어졌다.

    -부회장님, 지해주 본부장님 오셨습니다.

    해주가? 점심시간 내내 찾았는데 자리에 없더니.

    “들어오라고 해요.”

    인터폰을 끈 은호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해주를 맞을 준비를 했다.

    책상을 벗어나 소파 옆으로 다가갔을 때쯤 해주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앞머리가 이마를 가린 긴 생머리. 8년 전, 처음 만난 그날의 그녀를 떠오르게 한다.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이 그녀가 발을 디딜 때마다 물결치듯 출렁거렸다.

    매니시한 테일러드슈트에 깃이 넓은 셔츠블라우스는 웃기게도 그녀의 섹시한 몸을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듯했다.

    스커트를 입은 모습도 좋았지만, 이건 이것대로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왔어?”

    어느새 코앞까지 해주가 다가섰다.

    하얀 얼굴에 왠지 모르게 상기된 뺨. 그런 그녀를 사랑스럽다는 듯 내려다본 은호가 조용히 물었다.

    “계속 찾았는데, 자리에 없더라?”

    “미팅했어요.”

    도톰한 입술이 야무지게 움직였다.

    “미팅?”

    “네, 만날 사람이 좀 있어서.”

    해주의 대답에 은호의 미간이 바짝 좁혀졌다.

    “강현욱은…… 아니지?”

    더는 강현욱을 만나지 말라고 경고했다. 한 번만 더 그 새끼를 따로 만나면, 죽여 버리는 수가 있다고 말이다. 물론 현욱을 죽이겠다는 말이었다.

    어젯밤, 집요하게 키스를 퍼부으며 던지는 질투 어린 요구에 해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만나요. 더는…….]

    그녀의 대답이 신음으로 뒤덮이도록 몰아세운 그는 기어코 원하는 답을 얻어 냈다. 그리고 오늘 아침 한 번 더 확인시켰다.

    그녀의 몸에 저를 묻고 거침없이 움직이면서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이제 더는 안 봐줘. 뒤로 물러나는 것도, 딴 놈 만나는 것도 안 돼. 알았어?]

    쉼 없이 신음을 흘리는 그녀가 눈꼬리에 눈물을 매달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서 도망가는 것도 안 돼. 이혼은 꿈도 꾸지 마. 나, 너 못 보내니까.]

    못 보낸다. 죽어도.

    그가 미칠 듯 욕망하는 존재는 지해주가 유일하니까.

    그의 으름장에 야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해주를 떠올리자 어느덧 아래가 뻐근해졌다.

    그런 은호를 조금은 당돌한 눈으로 바라보던 해주가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당신, 누구 편이에요?”

    “누구 편이라니?”

    은호가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세웠다. 그런 그를 빤히 쳐다보던 그녀가 재킷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러고는 음성 녹음 하나를 들려주었다.

    -내가 지해주, 당신 남편의 아이를 가질 거야. 나원정 여사님, 아니, 어머니가 원하는 게 그거니까. 내가 차은호의 아이를 갖고, 창성의 안주인이 되는 것. 지해주라는 여자를 지워 버리는 것.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존재로 만드는 것.

    다시 버튼을 눌러 소리를 끈 해주가 고개를 도도하게 들어 올렸다.

    “말해 봐요, 차은호 씨.”

    목소리 끝이 파들거리며 떨렸다.

    “당신은 누구 편이에요?”

    맑은 담갈색의 눈동자에 설핏 물기가 어렸다. 곧 눈물을 쏟을 듯 위태롭기만 하다.

    “해주야.”

    왜 그런 질문을 하냐고, 타이르는 목소리다. 그러자 울음을 참기라도 하는 듯 입술을 삐죽인 해주가 다시 음성 파일 하나를 들려주었다.

    -그날, 호텔 주차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해 줄까요? 차은호 부회장님이 내 몸 어디를 만졌는지, 어디를 좋아했는지, 가르쳐 줘요? 영국에서 새벽까지 그 방에서 뭘 했는지 말해 줘요?

    다시 소리를 끈 해주가 울먹이며 말했다.

    “당신이 말해 봐요.”

    여태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모습이다.

    정갈하다 못해 차갑기까지 한 해주는 어떤 형태로든 그에게 질척이지 않았다.

    “주차장에서 뭐 했어요? 어디를 만졌나요? 어디가 좋았어요? 영국에서 그 여자와 뭐 했어요?”

    칭얼거린 적도, 성낸 적도, 이성을 잃은 적도 없다. 계약서의 현신처럼 모든 것이 절제된 최적의 여자였다.

    그랬던 해주가 민낯을 드러내듯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나한테 한 걸, 그 여자에게도 했어요?”

    꼭 말아 쥔 손과 얼마나 짓씹었는지 붉게 피 맺힌 입술이 가늘게 떨린다.

    처음 보는 모습인데, 낯선 모습인데.

    싫지 않다.

    “질투하는 거야?”

    “네, 질투예요.”

    싫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미친놈처럼 욕망이 들끓는다.

    “당신은 현욱 선배와 날 질투해서 주먹질까지 했는데, 난 이것도 못 물어봐요?”

    붉어진 눈시울로 날 선 시선을 보내는 게 색정적이다. 이대로 당겨서 안아 버릴까.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무뚝뚝한 말이 입술을 가르고 흘러나왔다.

    “내가 말했지. 이 여자는 미친년이고, 강현욱은 다르다고. 그 새끼는 네게 빚을 지우고 대가를 바라는 남자, 엄연한 남자라고.”

    “미친년은 여자 아닌가요?”

    짜증스럽게 고개를 저은 해주가 반박했다.

    “옷 벗고 설치는데, 별수 있어요?”

    그러더니 상처받은 얼굴로 뒷말을 이었다.

    “그날도 그랬죠? 호텔 주차장에서 박경은 그 여자 때문에 시각적으로 흥분해서…… 그래서 내 방에 들어온 거죠? 그래서 내게 키스한 거죠?”

    하, 은호가 대답 대신 실소하고 말았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모른 척 넘어간 거야?

    “말하라고, 차은호.”

    대답 없는 은호에게 해주가 울분을 터트렸다.

    “제발 말해. 당신 입으로 말하라고.”

    “뭐라고 말할까? 뭐라고 말하면 네가 안심할까?”

    화가 나서 한 말은 아니었다. 단순한 의문이었고, 솔직한 심정이었다.

    “어차피 믿을 마음이 없으면 안 믿겠지. 내가 뭐라고 하든.”

    해주와 은호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감정 중 하나가 바로 신뢰였다. 무조건적인 믿음. 그 믿음이 지난 3년을 흔들림 없이 지탱해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신뢰가 무너졌다면, 그 어떤 말도 통하지 않겠지.

    “그래서 변명조차 안 하겠다는 건가요?”

    변명이라. 변명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쓴웃음을 지은 은호가 싸늘히 말했다.

    “마음대로 생각해.”

    그의 말에 해주가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안 그래도 피가 맺혔는데, 또 저러지. 안타까운 생각에 몸을 움직였을 때다.

    “지옥에나 떨어져요, 차은호 씨.”

    끝까지 눈물을 떨구지 않은 해주가 하얗게 질린 채 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이내 은호에게 붙들린 해주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거칠게 그녀의 몸을 잡아당긴 은호가 그녀를 제 앞에 반듯하게 세웠다.

    “하나는 분명해.”

    담갈색 눈동자가 물기를 담고 하늘거리며 떨렸다.

    “내가 욕정을 느끼는 존재는 이 세상에서 너 하나야.”

    놀란 듯 벌어진 입술 안쪽으로 터져 버린 상처가 보였다. 그러자 저도 모르게 화가 치밀었다.

    “네가 믿든 말든 상관없어.”

    이 작고 여린 여자가 얼마나 요물인지, 결국 민낯을 드러내게 만드는 모양이다.

    “난 널 욕망해. 이런 순간에도 네 안에 날 들이고 싶어. 널 엉망으로 범하고 싶어.”

    미치도록 그녀를 원하는 남자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말았다.

    “누구 편이냐고?”

    더는 감출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난 내 편이야. 지독히도 이기적인 놈이니까.”

    이미 가졌고, 앞으로도 가질 여자라서 진심을 드러내기에 거리낌이 없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안고 싶었어. 그런 널 가지기 위해 오랫동안 참고 기다렸어. 처음부터 이럴 목적으로 널 내 곁에 뒀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봤어.”

    시작부터 욕정이었다. 젖은 채 살결을 드러낸 블라우스를 당장에라도 벗기고 가지고 싶었다. 두 번째 만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얌전히 앉아 있는 그녀를 어쩌지 못해 성난 아랫도리가 터질 듯 아팠다.

    그런 그녀를 다시 찾아냈고, 곁에 두었다.

    “그리고 기어코 널 가졌지.”

    해주의 두 팔을 굳게 잡은 은호가 더 바짝 그녀를 끌어다 붙였다.

    “웃기는 게 뭔지 알아? 가졌는데, 더 가지고 싶어.”

    여린 팔이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부러져 버릴 듯 안쓰러웠다. 그러면서도 차라리 그의 손안에서 부서져 버렸으면, 하는 강한 욕망이 들끓었다.

    그를 올려다보는 눈동자에 수많은 감정이 교차했다. 그중 하나를 끄집어낸 그가 조소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사랑이냐고는 묻지 마. 나는 사랑 따위 하지 않으니까.”

    사랑이라는 감정을 가장 경멸하는 그에게 사랑을 바라지 말라는 명백한 경고였다.

    “이건 사랑보다 더 짙은 욕망이야.”

    거짓으로 더럽혀질 사랑보다 솔직한 욕망이 백배 천배 숭고한 감정일 것이다.

    “미칠 듯 원하는 널 두고, 다른 여자를 안는다? 웃기지 말라 그래.”

    그에게 지해주 이외에 다른 여자는 없다.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나 차은호야. 너 하나만 원하는 차은호.”

    결국, 해주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

    그 눈물이 마치 심장에 소금을 뿌리는 듯 가슴 가운데가 아렸다.

    사랑은 아니다. 욕정이지.

    그저 그가 가지고 싶은 여자의 눈물이라 아린 것뿐이다. 하지만 그 고통이 심장을 가르고 폐부를 쪼갠다.

    욕지거리가 절로 흘렀다.

    “젠장.”

    소리 없이 눈물을 떨구는 해주를 잡아당긴 은호가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키듯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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