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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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서 얼굴을 볼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회사 안에서 만났다가 또 다른 루머를 낳을까, 걱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외부에서 따로 만났을 때 더한 루머를 만들어 낼 수 있겠다 싶어 결국 옥상정원을 선택했다.

    “정면 돌파.”

    그래, 정면 돌파가 맞지.

    엘리베이터에서 조그마한 목소리로 파이팅을 외친 해주가 옥상 층에 닿았다.

    옥상정원은 그녀에게 있어 추억의 장소이고, 안식처이다. 굳이 이곳으로 정한 것은 조금이나마 용기를 얻고 싶어서였다.

    박경은, 그녀 뒤에는 해주의 시어머니 원정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뒤에는 신률이 존재하겠지.

    어쩌면 보잘것없는 지해주 따위, 한 손으로 치워 버릴 수 있을 만큼의 권한을 가진 여자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호락호락 져 줄 마음 역시 없다.

    “부딪쳐 보는 거야.”

    적어도 차은호는 지해주 편일 테니까.

    옥상정원으로 발을 들인 해주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까, 가늠하는 중이었다.

    그러다 경은을 눈에 담았다.

    순간, 소름이 온몸에 끼치며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저 여자…… 진짜 뭐야?”

    그녀의 지정석이라고 해도 좋을 자리에 경은이 앉아 있었다.

    불과 어제까지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였던 길고 굽슬굽슬한 머리, 펜슬 스커트와 블라우스, 작은 귀걸이와 스틸레토 힐. 눈을 감고 바람을 느끼고 있는 모습까지.

    지해주, 그녀다.

    “하, 기가 막혀서.”

    까만색 바지 정장을 입은 해주가 기다란 생머리를 나풀거리며 다가갔다. 그러자 경은이 닫혀 있던 눈꺼풀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짙은 밤색 눈동자가 기이한 빛을 띠며 해주를 천천히 훑었다.

    “왜요?”

    가슴 앞으로 팔짱을 두른 해주가 삐딱하게 말했다.

    “스타일이 바뀌어서 적응이 안 돼요? 머리를 어떻게 바꿔야 할까, 옷은 어떻게 입어야 하나, 고민되나요?”

    그러자 경은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바꿔도 되나요?”

    질문을 던지는 경은의 얼굴이 지나치게 무구해 오히려 섬뜩하기만 했다.

    팔짱을 푼 해주가 경은의 맞은편에 앉았다.

    “박경은 씨, 이러는 이유가 뭔가요?”

    분명히 목적이 있는 행동이다.

    그녀를 따라 하고, 은호에게 접근하고, 불쾌한 루머를 만들어 내고.

    도대체 이 여자가 원하는 것은 뭘까?

    “우리 어머니가 시키셨나요? 날 흉내 내고, 내 남편을 유혹하고, 날 모함하고, 내 자리를 차지하라고?”

    “글쎄요. 어떨 것 같아요?”

    무구하기만 하던 얼굴에 웃음기가 설핏 어렸다. 입꼬리를 반듯하게 끌어 올리는 모습에서 사악함을 엿보았다면 지나칠까.

    “미친 짓이라는 생각 안 들어요?”

    “왜 이게 미친 짓이에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좋은 것은 항상 본부장님만 가져야 해요? 나도, 나 같은 사람도 가질 수 있어요.”

    충격적이었다. 이 여자는 지금의 상황이 비정상적이라는 것조차 가늠하지 못한다.

    “나원정 사모님 좋은 분이시고, 차윤규 회장님도 너무나 좋은 분이죠.”

    얼굴에 홍조까지 띠며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모습이, 지나치게 진심이다.

    “차은호 부회장님.”

    은호의 이름을 입술에 올릴 때는 목소리 끝이 흔들렸다.

    “너무 매력 있는 분이고, 미치도록 섹시해요.”

    마치 꿈을 꾸고 있기라도 한 듯, 밤색 눈동자가 하늘거리며 떨렸다.

    “탐나요. 가지고 싶어요.”

    은호에 대한 열망을 숨김없이 드러낸 경은은 완벽하게 사랑에 빠진 여자다.

    하지만 그걸, 그의 아내 앞에서 드러낼 수 있을 만큼 미친 여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가질 수 있어요.”

    순간, 눈빛이 달라졌다.

    확신에 찬 밤색 눈동자가 섬뜩한 빛을 발했다. 지해주 너 하나만 치워 버리면 다 내 것이야.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그래요?”

    해주가 코웃음 쳤다.

    “어디 한번 해 봐요. 내 남편을 내게서 가져갈 수 있는지.”

    더는 이야기할 가치가 없는 듯하여 해주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건투를 빌 테니까.”

    싸늘하게 내깔긴 해주가 뒤를 돌아섰을 때다.

    “두 분 결혼.”

    경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가짜잖아요.”

    멈칫한 해주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경은의 밤색 눈동자가 의기양양한 빛을 띠며 번뜩였다.

    “그래서 아기가 생기지 않는 거잖아요. 아니, 못 가지는 거죠. 진짜 부부가 아니니까.”

    해주가 아랫입술 안쪽 살을 힘주어 깨물었다. 그녀의 결혼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박경은이? 어떻게?

    머릿속을 빠르게 정리하고 있는 해주를 바라보며 경은이 비릿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스캔들의 전말에 대해 알고 싶지 않아요?”

    주객이 전도된 듯, 이번에는 경은이 팔짱을 둘렀다. 고개를 슬쩍 들어 올린 모습이 도도하기 짝이 없다.

    “그날, 호텔 주차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해 줄까요?”

    해주는 실소할 수밖에 없었다.

    “차은호 부회장님이 내 몸 어디를 만졌는지, 어디를 좋아했는지, 가르쳐 줘요?”

    눈앞의 여자는 완벽하게 미쳤다.

    “영국에서 새벽까지 그 방에서 뭘 했는지 말해 줘요?”

    망상에 절어 현실을 바라보지 못하는 정신병자.

    “당신, 미쳤군요.”

    기막힌 나머지 웃으며 뱉어 낸 말에 경은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미쳤다고? 내가? 웃기지 마. 누굴 정신병자 취급하는 거야?”

    이젠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모양이다.

    “내가 지해주, 당신 남편의 아이를 가질 거야.”

    경은이 해주에게 천천히 다가섰다.

    “나원정 여사님, 아니, 어머니가 원하는 게 그거니까.”

    그러고는 아주 상냥한 목소리로 하나하나 가르쳐 주었다.

    “내가 차은호의 아이를 갖고, 창성의 안주인이 되는 것. 지해주라는 여자를 지워 버리는 것.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존재로 만드는 것.”

    기이하게 입매를 비틀어 비릿한 웃음을 만들어 보인 경은이 해주에게 고개를 기울이며 조용히 속삭였다.

    “당신 남편, 되게 뜨거운 남자야.”

    끈적거리는 목소리가 불쾌하기 짝이 없다.

    “그걸 아주 기막히게 잘한다, 이 말이야.”

    해주의 시선이 제게 닿을 듯 다가선 경은에게 날카롭게 꽂혔다.

    “침대에서 얼마나 거친 줄 알아? 평소의 신사적인 모습은 찾을 수 없어. 짐승이야, 짐승.”

    “알아.”

    해주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경은이 하는 말이 하나도 틀린 게 없기 때문이다. 차은호는 짐승이다. 적어도 침대에서는 말이다.

    “내 남편이잖아.”

    그가 얼마나 뜨거운지, 얼마나 야한지, 얼마나 집요한지, 얼마나 거친지. 오늘 아침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 결혼이 누가 가짜래?”

    불쾌한 것은 이 여자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거다. 주먹을 꼭 말아 쥔 해주가 싸늘하게 말을 이었다.

    “내 남편의 잠자리 성향은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러니까 웃기는 소리 그만하고, 꺼져.”

    해주의 말에 경은의 안색이 눈에 띄게 파리해졌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 해주가 픽― 웃음을 흘리고는 다시금 발길을 돌렸다.

    그렇게 몇 걸음 내딛던 해주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 회사 계속 다니고 싶으면 다녀요. 안 말릴 테니까. 하지만, 지금부터는 나와 불편해질 각오는 해야 할 거야.”

    목적이 무엇이든, 이젠 마냥 참지만은 않을 것이다.

    “나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 아니거든.”

    오늘 보자고 한 건 이런 이유에서였다.

    “창성의 안주인?”

    비켜 줄 생각 따위 없다는 걸 명확히 하기 위한 것.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야. 박경은 씨.”

    박경은이든, 그 뒤에 있는 존재든, 더는 참아 줄 수 없는 노릇이다.

    이젠 가짜가 아니니까. 아니, 가짜를 벗어나기 위해 이제 막 첫걸음을 뗐으니까.

    “거짓말을 하려면 차은호가 어떤 남자인지 제대로 파악부터 하든지. 그것도 아니면 내가 어떤 인간인지 자세히 알고 오든지.”

    결심을 굳힌 해주가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공부나 제대로 하고 덤벼요.”

    * * *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해주가 10층 버튼을 눌렀다. 나름의 선전포고를 한 터라 몹시도 더웠다. 손으로 파닥거리며 부채질을 하는데 엘리베이터가 13층에서 멈췄다.

    회장실과 부회장실이 있는 13층.

    감출 수 없는 기대감에 손을 내린 해주가 옷매무새를 다잡았다.

    문이 열린 순간, 해주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아가씨?”

    의외의 인물이었다. 나민영이라니.

    “새언니?”

    민영 역시 놀란 모양이다.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불안함을 숨기지 못했다.

    “오빠 만나러 왔어요?”

    “근처에 왔다가 고모부도 뵙고, 오빠도 만나고. 겸사겸사.”

    은호에게는 유일한 사촌 혈육이다. 민영이 은호를 무척이나 따른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고 말이다. 근처에 왔다가 겸사겸사 들렀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다만, 민영의 불안한 태도가 몹시도 신경 쓰일 뿐.

    “아가씨, 나한테는 볼일 없어요? 연락한다고 했었잖아. 아직 못 만났어요?”

    “뭘……요?”

    하, 뭘요? 기억을 못 해?

    안절부절못하는 민영의 눈동자가 거짓말임을 명백히 드러내 주었다.

    “황경순, 걔 엄마 만나서 편지랑 그런 거 받아서 준다면서요?”

    “내가 그랬나?”

    시치미를 뗀 민영이 딴청을 피우듯 시선을 옮겼다.

    “그랬잖아요. 나 대신 만나 본다고. 무슨 편지인지 궁금하다고.”

    그러자 입술을 감쳐문 민영이 눈을 하릴없이 깜빡거렸다.

    “음, 이젠 하나도 안 궁금해요.”

    마른침을 삼키느라 민영의 목선이 파도를 탔다. 그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태연하게 해주를 돌아보았다.

    “찜찜하잖아. 죽은 애가 새언니 거론한다는 게.”

    미간을 좁힌 민영이 해주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그래서 그냥 잊어버리려고. 그러니 새언니도 잊어요. 응?”

    토닥토닥, 정답게 어깨를 두드린 민영이 어색하게 웃었다.

    10층을 지나친 엘리베이터는 어느덧 로비에 닿아 있었다. 문이 열리자 방긋 웃어 보인 민영이 도망치듯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갈게?”

    “아가씨!”

    해주가 부르는데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어져 갔다.

    “뭐야? 나민영.”

    평소답지 않다. 지나치게 평소답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

    “내가 찜찜하니 됐다고 해도 자기가 궁금해서 안 되겠다고, 만나 보겠다더니.”

    뭔가 있는 게 틀림없는데…….

    “그리고, 왜 꼬박꼬박 새언니?”

    수상한 구석이 한두 개가 아닌 민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해주가 13층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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