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커다란 수건으로 느슨하게 아래를 가린 은호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수건 속에 감춰진 것을 떠올린 해주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때 불쑥 은호의 목소리가 던져졌다.
“너무 노골적인 시선이잖아.”
놀리듯 장난스러운 목소리이기도 했다.
“부끄럽게.”
그러고는 그녀 앞으로 천천히 다가섰다.
“원하면 한 번 보여 줄 수도 있는데.”
수건 끝에 손을 가져간 은호가 곧 수건을 벗을 듯 아슬함을 연출했다.
“보여 줄까?”
“미쳤나 봐.”
얼굴이 빨개진 해주가 얼른 뒤를 돌아섰다.
“왜 부끄러워해? 어젯밤에 실컷 봐 놓고선.”
물 냄새와 샤워 코롱에 섞인 그의 섹시한 체향이 갑작스레 끼쳐 왔다. 그녀의 등 뒤로 다가선 그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
“해주야.”
나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다. 끝이 조금 갈라진 것도 같다.
“해주야.”
대답 없이 숨만 쌕쌕 내쉬자 한 번 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네.”
조용히 대답하자 그의 입술이 귓바퀴에 뜨겁게 내려앉았다.
“해주야.”
용건도 없으면서 이름을 부른 그가 좀 더 강하게 그녀를 안았다.
“네.”
“지해주.”
커다란 손이 어느덧 가운 안을 파고들었다. 둥근 몸을 감싸며 손을 놀리자 해주의 입술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렀다.
어느덧 허리 부근에서 단단해진 그가 느껴진다. 아침인데, 이제 막 자고 일어났는데. 욕망은 어젯밤과 한 치의 다름도 없다.
당장에 그를 받아들여도 이상하지 않을 기분이다.
아플까? 아프겠지, 처음은 다 아프다잖아. 그래도 손가락까지는 괜찮았는데.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배회하는 와중 가운이 벗겨졌다.
툭,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지는 가운을 눈에 담는 순간 입술이 목덜미를 덮쳐 왔다.
“오늘 병가 쓸래?”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뜨거운 입술이 나른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너무 자주 쓰잖아요.”
해주의 목소리 역시 나른하게 잠겨 들었다.
“부회장 직권으로…… 하루 더 쓰게 해 줄게.”
그러고는 그녀의 몸을 번쩍 안아 올렸다.
그대로 그녀를 침대 위에 올린 그가 수건을 벗고 침대 위로 올라왔다.
“그, 그게…….”
손가락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것을 바라보며 기가 질렸다.
무서워. 그러면서도 너무나 간절히 원해. 얼른 하나가 되고 싶어. 아― 그래도 무서운걸.
마른침을 삼킨 해주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물리자 목소리만큼 나른한 얼굴이 다가왔다. 그리고 이내 입술이 맞물렸다.
키스는 늘 그랬듯 아찔했다. 머릿속이 온통 무지갯빛으로 찬란히 빛나고,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호흡은 가빠지고, 근육은 나른해진다.
입 안을 가득 채운 그와 부대끼며 사랑을 나누자 더한 짓이 하고 싶어졌다.
“해요.”
헐떡이는 가운데 뱉어 낸 말이다. 이미 머릿속이 하얘져 무슨 말을 했는지 의식하지도 못했다.
“해 줘요.”
어느새 애원하고 있었다.
그가 정성껏 어루만지는 곳을 다른 것이 채워 주길 바란다.
그리고 드디어 그가 들어왔다.
천천히, 그러면서도 강렬하게 밀려 들어오는 그를 받아들이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해주야.”
천천히 움직이는 그가 애달프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해주야.”
아찔한 통각과 아득한 쾌감이 어우러지며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줄곧 무서웠다. 마음이 아닌 몸이 먼저 이어진 관계의 끝에 허무가 존재하면 어쩌나 두려웠다.
하지만 두려움 이상으로 그를 사랑하는 제 마음이 짙었다. 단 한 번도 저를 향한 감정이 사랑이라고 말해 주지 않는 그를 사랑하게 된 숙명이라고 생각한다.
대신, 저 역시 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을 참이다.
운명이든, 욕정이든, 사랑이든.
함께할 수만 있다면 뭐든 좋다고 말이다.
* * *
청담동 집.
벌써 5년도 더 전에 독립한 현욱은 해주의 결혼과 동시에 이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의 모친인 미정의 간곡한 부탁 때문이었다.
[너라도 내 눈앞에 있어. 그래야 해주가 널 만나는지 아닌지 알 수 있을 거잖아.]
정말이지 끔찍했는데, 해주를 위해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이 집에 들어와야지 미정이 해주를 괴롭히지 않을 테니까.
피곤한 한숨을 내쉰 현욱이 여전히 끔찍하기만 한 제집을 바라보았다.
“정말, 도망가고 싶다.”
하지만 여전히 그럴 수 없다.
밤새 술을 퍼마시고 떡이 되어도 돌아와야 하는 곳이다.
해주를 위해서. 그리고 미정을 위해서.
비틀거리며 현관을 들어서자 파리한 얼굴의 미정이 뛰어나왔다.
“현욱아, 왜 이제 집에 들어오는 거니?”
해주만큼 여린 몸이다. 제겐 아픈 손가락인 엄마, 최미정.
밤새 잠 한숨 못 자고 저를 기다린 모양이다.
제 엄마의 근심 가득한 얼굴을 흐린 눈으로 바라본 현욱이 제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를 미정이 바짝 뒤쫓았다.
“너 아침까지 술 마셨니? 왜?”
아무런 대답도 해 주지 않은 현욱이 침대에 털썩 몸을 누였다.
“너 설마…….”
눈두덩에 손을 올린 채 누운 현욱을 바라보며 미정이 손을 떨었다.
“해주 때문이니?”
해주를 입에 담는 미정의 목소리란, 정말이지 끔찍하다.
해주, 해주, 해주.
군대 가기 전, 미정에게 수백 번도 더 들었던 이름이었다.
딸 삼고 싶을 만큼 예쁜 제자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휴가를 나와 해주를 눈에 담고, 반해 버렸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듯했다.
제대 후, 한집에 살고부터는 미칠 것만 같았다. 재채기와 가난과 사랑은 숨기지 못한다고 하더니, 결국 그의 마음을 미정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 뒤로 악몽이 시작되었다.
저를 향한 미정의 집착이 숨 막히도록 집요해 차라리 죽어 버렸으면, 싶은 마음도 들었다.
“나가세요. 자고 싶으니까.”
“현욱아.”
“나가시라고요.”
“해주 이년을…….”
떨리는 목소리로 해주의 이름을 짓이긴 미정이 방을 벗어나려 했다.
욕지거리를 내뱉은 현욱이 침대에서 일어나 미정을 붙잡았다.
“왜요? 또 해주 찾아가서 뺨 때리시게요? 아니면 또 수면제라도 드시려고요?”
날카로운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해주 그냥 두세요.”
현욱이 미정을 거칠게 흔들었다.
“어머니 때문에 내가.”
커다란 눈이 희번덕거리자 붉게 충혈된 흰자위가 보였다.
“내가 해주를…….”
고통 가득한 목소리로 해주를 입에 담은 현욱이 처절하게 외쳤다.
“해주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어머니 때문에 그 애가 다른 남자 품에 안기는데도 막지도 못하고.”
해주를 간절히 원했다. 죽도록 갖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얼마나 불행한지 아세요?”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저를 사랑하지 않는 해주와 해주라면 발작을 일으키는 미정 때문이었다.
“이게 다 어머니 때문이에요. 어머니 때문에 내가 불행하다고요.”
미정만 아니었으면, 해주가 저를 사랑해 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차은호가 아니라.
“해주 때문이 아니라고요. 아시겠어요?”
[선배도 알잖아요. 내가 이 남자 좋아했다는 것.]
[내가 좋아했던 남자는 차은호, 이 남자 하나예요.]
어젯밤 싸늘하게 내려앉던 해주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히 들리는 듯하다.
지해주, 그의 전부였던 여자.
“해주 괴롭히지 마세요. 만약 괴롭히면.”
미정의 팔을 잡은 현욱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번에는 제가 약을 먹을 겁니다. 어머니가 아니라.”
처신을 잘하라던 해주의 말이 떠올랐다.
어떻게 해야 처신을 잘하는 걸까. 어떻게 해야 미정의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괴롭기만 하다.
“현욱아, 엄마가…… 엄마가 잘못했어.”
미정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부들부들 떠는 현욱의 손에 제 손을 겹친 미정이 결국 눈물을 떨구었다.
“엄마가 해주 다시 데리고 올까?”
다정한 목소리다. 그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던 오래전 엄마의 목소리다.
“그러면 될까?”
하지만 어차피 거짓이다. 그의 엄마 최미정은 결국 저 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한 게 없는 사람이니까.
“그러면 우리 아들이 행복할까?”
“나가세요.”
현욱은 망설이지 않고 방문 밖으로 미정을 밀어냈다.
“보기 싫으니까 나가시라고요.”
그러고는 문을 잠가 버렸다.
문밖에서 미정이 울부짖는 소리가 한참 동안 울렸다.
* * *
더 이상 병가를 낼 수는 없어 출근을 감행했다.
발을 내딛는 것조차 아팠지만, 이상하게도 기분은 붕 뜬 듯해 묘하기만 했다.
결혼 3년 만의 첫 경험.
그 누구에게 내색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점심시간에도 식당에 내려가지 않은 해주는 소파에 누워 잠을 청했다. 하지만 잠조차 오지 않았다.
아침에 한바탕 난리가 났기 때문이다.
출근길, 엘리베이터 안에서 경은과 마주쳤다. 윤규가 퇴사 명령을 내렸건만, 노동청에 진정서를 낸 경은은 퇴사를 미뤘다. 계속되는 그녀의 출근에 은호의 미간이 불쾌하게 좁혀졌다.
엘리베이터가 3층에 닿았을 때다. 회계과 직원 네댓 명이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인사를 했다.
그중 하나가 대뜸 경은에게 ‘안녕하세요, 본부장님.’이라며 인사한 게 화근이 되었다.
[손희정 대리, 오늘 렌즈 안 꼈어요? 어디다 대고 인사합니까?]
필터를 하나도 거치지 않은 은호의 목소리가 조용한 엘리베이터 안을 거칠게 울렸다.
[죄송합니다. 너무 비슷하셔서.]
[뭐가 비슷하다는 거야? 하나도 안 비슷한데. 어디서 굴러먹다 온 인조인간을 가지고 말이야.]
창성의 황태자 차은호. 차갑기는 했지만, 직원들에게 모질지는 않았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거친 질감 그대로를 드러냈다.
[당장 사과해요. 내 아내, 지해주 본부장은 이쪽이니까.]
게시판이 난리가 났다.
스캔들은 거짓이다. 차은호 부회장은 여전히 일편단심 ‘아내바라기’였다. 그럼 그런 가짜 뉴스는 누가 퍼트린 거냐. 박경은 본인이냐. 부끄러운 줄 알아라.
은호의 확고한 태도를 목격한 회계과 직원들이 제대로 소문을 내준 모양이었다. 게시판은 온통 스캔들을 부인하는 게시 글로 뒤덮였다.
그와 더불어 해주의 소식도 전해졌다.
지해주 본부장이 머리를 잘랐더라. 옷 스타일도 달라졌더라. 그럼 이제 짝퉁도 머리를 자를 차례냐. 기대된다. 등등.
“그건 또 생각 못 했네.”
누워 있던 해주가 몸을 일으켰다.
“정말 따라 자르려나?”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도대체 그 여자가 원하는 건 뭘까?
그녀의 자리? 아니면 차은호?
뭐가 되었든 불쾌하기는 마찬가지다.
책상으로 걸어간 해주가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네, 회장실입니다.
“지해주입니다, 박경은 씨.”
인터폰 너머가 잠잠했다. 앙큼하게 게시판에서는 잘만 떠들더니, 왜 입을 닫아.
인상을 찌푸린 해주가 서늘하게 말했다.
“좀 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