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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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른 말하고 가요. 저 이제 선배랑 예전처럼 못 지내니까.”

    현욱이 창성의 고문인 이상 공식적인 만남은 지속될 것이다. 하지만, 사적으로 만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 되어야 한다. 아니, 이번이 마지막이 되게 할 작정이다.

    “무슨 소리야?”

    해주의 말에 현욱의 미간이 좁혀졌다.

    “선배도 알잖아요.”

    미정은 제 감정을 굳이 현욱에게 감출 생각도 없었다.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누구 눈치도 보지 않고 마구 퍼부었으니까.

    “내가 선배에게 이만큼이라도 곁을 내주는 건 선생님 때문이라는 것 말이에요.”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당시 담임이었던 미정의 집에 들어가서 살게 되었을 때는 정말이지 좋았다. 혼자라는 게 막막했는데, 미정이 울타리가 되어 주어 무척이나 기뻤다.

    덕분에 혼자라는 막막함과 공포를 지울 수 있었다.

    그다음 해, 대학에 들어갔을 때도 좋았다. 미정과 해주, 둘이서 알콩달콩 가족처럼 지냈으니까.

    문제는 그녀가 대학교 2학년이 되면서다. 군대 갔던 현욱이 돌아와 같은 과 2학년에 복학하면서였다.

    그때부터 해주의 삶은 피폐해져만 갔다.

    “선생님이 약 먹고, 손목 긋고 할 때마다 죽고 싶었던 건 나였어요.”

    현욱이 해주에게 관심 있다는 걸 알고는 그녀가 보는 앞에서 수면제 한 통을 다 먹었다. 구급차를 부르고, 응급실에서 위세척하는 것을 지켜봤다. 미정은 간신히 살아났고, 해주는 짐을 챙겼다.

    [선생님, 저 현욱 선배에게 그런 마음 조금도 없어요. 친하게 지낸 건 선생님 아들이니까, 선생님이 너무 좋아서 선생님 아들과도 잘 지낸 거였어요. 제가 이 집에서 나갈게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렇게 해주가 돌아서고 미정이 손목을 그었다.

    “난 이제 남편도 있고, 내 삶도 있는데. 아직까지 나와 선배를 연결 짓다니…… 너무하잖아요.”

    그 뒤로 악몽 같은 삶이 시작되었다.

    현욱에게 웃어 줘도 뺨을 맞고, 웃지 않아도 뺨을 맞았다.

    어렸던 해주는 차마 미정을 버릴 수 없어서 그 집에 머물렀다. 그녀의 광증은 현욱이 독립해 나가면서 잠잠해졌다.

    다시 평화가 찾아왔지만, 현욱이 집을 찾아올 때마다 반복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선배에게 마음이 있어도 안 돼, 없어도 안 돼. 도대체 이런 관계가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은호가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았다면, 결국 목숨을 버린 쪽은 해주였을 것이다.

    결국, 생명의 은인은 차은호인가.

    은호를 떠올린 해주가 먹먹함에 입술 끝을 질끈 물었다.

    “그럼 네 진짜 마음은 뭔데?”

    현욱의 목소리가 떨렸다.

    “엄마 때문에 나한테 마음 표현 못 한 거 아니었어?”

    예전에도 비슷한 질문을 받은 적 있다. 아니라고 분명히 대답했고 말이다.

    “엄마 때문에, 내가 아닌 네 남편 선택한 거 아니었냐고.”

    “하―”

    그런데도 여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정말 그 엄마에 그 아들이다.

    “우리 엄마 때문에 네 남편과 그런 식으로 결혼한 거잖아.”

    미정 때문에 시작한 것은 맞지만, 은호에 대한 마음이 없었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결혼이다.

    “해주야.”

    현욱이 갑자기 해주의 팔을 붙들었다.

    “나 때문에 네가 불행하게 사는 거, 더는 못 봐.”

    팔이 아플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이혼해, 해주야. 이혼하고, 나랑 같이 미국 가자. 컬럼비아 가서 공부해. 내가 네 뒷바라지 할게.”

    뭐에 씌기라도 한 건지, 현욱은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다.

    적어도 지금까지 어정쩡한 관계나마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지극히 이성적이고 정상적인 현욱 때문이었는데.

    “네 남편도 내 엄마도 모두 버리고, 우리 도망가자. 응?”

    그때였다. 운전석 문이 벌컥 열리며 현욱의 몸이 당겨졌다.

    “이 새끼가.”

    은호였다.

    무시무시한 힘으로 현욱을 차에서 끌어 내린 그가 주먹을 날렸다.

    “은호 씨!”

    놀란 해주가 차에서 내려 달려갔지만 이미 현욱을 바닥에 내팽개친 뒤였다.

    뒤로 나자빠진 현욱이 손등으로 입술에 흐르는 피를 닦았다.

    “감히 내 집 앞에서 내 아내를…….”

    “은호 씨, 아니야. 아니에요. 할 이야기가 있어서 잠시…….”

    “이 새끼 만나지 말라고 했지. 가만히 안 둔다고 분명히 말했어.”

    해주의 손목을 낚아채듯 잡은 은호가 거칠게 말했다.

    “은호 씨.”

    그의 눈동자 속에 까만 불꽃이 성난 듯 일렁거렸다. 더한 분노를 폭발시키기라도 할 듯 이글거리더니 어느새 잦아들었다.

    화를 억누르고 있는 게 틀림없다.

    “가자.”

    은호가 그녀를 집으로 이끌었다.

    여기까지 하겠다는 무언의 의지였다.

    말없이 그를 뒤따르며 그에게 잡힌 손목을 바라보았다.

    은호의 손이 떨고 있었다. 힘 조절조차 되지 않는지, 뼈가 부러질 듯 아프다. 그런데도 속없이 좋았다. 은호가 그녀를 두고 질투를 폭발시킨 듯하여 너무나 좋았다.

    그때였다.

    “어차피 가짜 남편이면서.”

    비척대며 몸을 일으킨 현욱이 비릿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당신 해주와 계약 결혼 한 거잖아.”

    웃음기도 어려 있었다.

    “계약에 의한 쇼윈도 부부, 그런 주제에 진짜 남편 행세는.”

    걸음을 멈춘 은호가 뒤를 돌아보았다.

    차갑게 번뜩이는 날 선 눈빛과 고집스레 다물어진 입술. 은호의 주먹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그런 은호를 잡아당기며 해주가 그러지 말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은호와 현욱 사이에 발을 들였다.

    “가짜 아니야.”

    현욱에게 던진 말이지만, 은호에게 던진 말이기도 했다.

    “적어도 난 가짜가 아니었어요.”

    꼭꼭 숨겨 두었던 본심이다.

    “선배도 알잖아요.”

    그래, 현욱은 분명히 알고 있다.

    “내가 이 남자, 좋아했다는 거.”

    축제 이후, 차은호라는 남자에게 사로잡힌 그녀가 첫사랑의 열병을 앓았다는 걸.

    “내가 좋아했던 남자는 차은호, 이 남자 하나예요. 선배가 아니라.”

    적어도 지수와 현욱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은호가 유학을 떠난 날, 해주가 많이 울었으니까.

    “그러니까 이제 이런 불편한 상황 만들지 말아요. 최미정 쌤 앞에서도 처신 똑바로 해 주고요.”

    더는 미정과 현욱을 은인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은인이라는 이유로 하나로 여태 할 만큼은 했다.

    “그리고 지금 난 충분히 행복하니까, 흔들지 말면 좋겠어요.”

    여기서 더 흐트러진다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일이 커질 것이다. 더는 참지 않겠다고 선언한 은호는 진심일 테니까.

    이게 열아홉 살 그녀에게 은인이 되어 준 최미정, 그녀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가 아닐까.

    “컬럼비아, 그건 내가 양승태 교수님께 직접 말씀드릴 거예요. 그러니 선배는 이 일에서 빠져요.”

    오래전부터 하고 싶던 이야기다. 미정의 협박이 입을 틀어막았던 이야기이기도 하고 말이다.

    “선배야말로, 나와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 * *

    충격받은 듯한 현욱을 남겨 두고 집으로 들어왔다.

    은호는 말이 없었고, 잡힌 손목은 아팠다.

    1층 거실을 지나 계단을 밟았다. 쿵쿵, 발소리가 심장 소리인 양 가슴이 아린다.

    곧장 그녀의 침실로 향한 은호가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파요.”

    손목이 너무 아파 울먹이자 그의 손이 그녀를 떠났다.

    아파서 죽을 것 같더니, 그의 손이 멀어지자 허전함이 밀려들었다. 그 묘한 감정에 헛헛한 웃음이 흘러나왔을 때다.

    그녀의 몸이 벽으로 떠밀렸다.

    “읏.”

    단단한 벽에 등이 부딪히자 입술을 가르고 신음이 흘렀다. 하지만 그 신음조차 제대로 흘리지 못했다. 은호가 입술을 뒤덮었기 때문이다.

    거친 키스였다.

    숨이 막히고, 심장이 터질 듯한 키스였다. 도망갈 수 없다는 걸 알기에 해주 역시 뜨겁게 그를 받아들였다.

    “오늘은 어디까지 가능해?”

    거친 숨을 내뱉으며 그가 물었다.

    “아직 키스만이야?”

    대답하지 못했다.

    “만지는 건? 아직도 옷 위로만 만져야 해?”

    그녀의 몸을 움켜쥔 그가 고통스럽게 물었다. 그런 그를 빤히 들여다본 해주가 그의 목에 둘렀던 손을 내렸다.

    그러고는 그의 넥타이를 끌렀다. 그녀가 아침에 매 준 버건디 컬러의 넥타이다.

    벗겨 낸 넥타이를 바닥에 던진 해주가 그의 재킷을 벗겼다.

    까만 눈동자가 정염에 휩싸여 흔들리는 게 보였다.

    그런 그의 눈동자와 시선을 맞춘 해주가 재킷을 벗고, 블라우스 단추를 열었다.

    그러고는 그의 커다란 손을 잡아 올렸다.

    “만져요. 옷 안으로.”

    그의 손을 제 가슴으로 이끈 해주가 그의 목에 다시 팔을 두르며 입술을 부닥쳤다.

    * * *

    엉망이 된 채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침 6시 반.

    “아침 6시 반?”

    시계를 확인한 해주가 후다닥 침대를 벗어났다. 은호는 이미 침실을 떠나고 없었다. 아니, 씻고 있으려나.

    욕실 쪽에서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씻는 모양이다.

    30분이나 늦게 일어나다니, 지해주답지 않은 일이다.

    의자 위에 올려 둔 나이트가운을 입은 해주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옷가지를 주섬주섬 주워 올렸다.

    어젯밤, 결국 그날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옷 안을 배회하던 손이 거칠게 그녀를 탐했다. 옷이 벗겨진 것은 당연했다. 아니, 찢어졌다는 표현이 맞겠다. 스커트 아래로 손을 넣던 그가 결국 치맛자락을 찢어 놓았다.

    아찔한 탐닉이었다.

    손이 거친 곳에는 입술 또한 머물렀다. 온몸 구석구석 붉은 자국을 만들었고, 야한 움직임으로 아래를 파고들었다.

    하마터면 해 달라는 애원을 입 밖으로 꺼낼 뻔했다.

    끝까지 참아 낸 해주가 자존심을 세웠고, 은호는 다음을 기약했다.

    하지만, 이미 몇 번이나 야릇한 클라이맥스에 치달은 기분이었다.

    어젯밤 일을 떠올리자 아랫배가 뒤숭숭해지고 다리에 힘이 들어간다.

    “미쳤어. 한 번도 못 해 봤으면서 왜 이렇게 밝히는 거야.”

    발정 난 고양이처럼 가슴이 단단해졌다. 상상만으로도 호흡이 흔들리는 제가 낯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때 욕실 문이 달칵,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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