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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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의자에서 일어난 해주를 바라보며 지수가 미간을 좁혔다. 그러자 해주의 미간도 함께 좁혀졌다.

“왜? 별로야?”

“아니, 뱅 헤어는 오랜만이라서 어색해. 너무 처녀 같잖아.”

“그런 선입견을 버려. 머리에 처녀 같고, 아니고가 어딨니?”

퇴근하자마자 미용실을 찾았다.

오랫동안 굵은 웨이브 펌을 고수했던 해주가 스트레이트로 머리를 폈다. 길이를 조금 정리하고, 앞머리를 뱅 스타일로 과감하게 잘라 버렸다.

평소와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었다.

“이젠 집에 들어갈 거야?”

“아니.”

“그럼?”

“옷 살 거야.”

회사 옆에 위치한 백화점에서 머리를 하고, 쇼핑까지 끝냈다.

평소 같았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바지 정장을 몇 벌이나 샀다.

“지수야, 네 남편도 늦는댔지? 밥 먹고 들어가자. 밥 사 줄게.”

밥 먹고 들어가자는 말이 반가운 듯 지수가 방긋 웃었다.

“부회장님도 늦으셔?”

“응. 금융인 연합회 모임 갔어.”

은호는 오늘 아침 회사 앞에 해주를 내려 주고, 온종일 외근이었다. 지금은 마지막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겠지.

“이젠 회장님 대신 부회장님이 나가시네?”

“응, 아버님 명령.”

해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 제대로 오너로서 역할을 다하라고.”

“멋있어.”

지수가 마치 기도하듯 두 손을 포개고 황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슈트 핏 때깔은 대한민국에서 우리 부회장님이 최고일 거잖아? 오늘 아침에 너 내려 주는 것 보니까 네이비색 슈트에 레드 계열 넥타이던데.”

아침에 얼핏 본 은호의 모습을 그리며 지수가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 얼굴에, 그 키에, 그 다리에, 그 슈트 핏에, 그 매너에…….”

일일이 열거하기도 입 아프다며 손을 저은 지수가 말을 이었다.

“완벽한 옴므파탈! 오늘 거기 영감님들, 아저씨, 아줌마들 다 넘어간다에 한 표 던진다. 내가.”

지수의 말에 해주의 미간이 바짝 좁혀졌다.

“무슨 그런 말을. 미쳤나 봐.”

그래도 제 남편 칭찬이 기분 나쁘지는 않은지, 금세 인상을 편 해주가 까르르 웃었다.

밝게 웃는 해주의 얼굴이 오랜만이라 지수 역시 까르르 웃으며 그녀에게 팔짱을 꼈다.

정답게 식당가의 한 햄버그스테이크집으로 들어섰다. 자리를 찾아 앉고, 음식을 주문하고, 물을 따르고.

해주의 행동과 표정을 유심히 바라보던 지수가 불쑥 해주를 불렀다.

“지해주.”

그러더니 의구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샅샅이 훑는다.

“너 요즘 뭐 있지?”

“뭐…… 있다니?”

눈을 동그랗게 뜬 해주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너 되게 수상해. 평소와 완전히 다르단 말이야.”

평소와 다른 것은 물론이고, 지난주와는 분위기 자체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수줍게 어린 홍조, 반짝거리는 눈망울, 끊임없이 누군가와 주고받는 문자. 차은호와 연애할 때도, 아니 그와 결혼을 하고서도 보여 준 적 없던 모습이다. 설마…….

“너 연애하니?”

지수의 질문에 물을 마시던 해주가 콜록거리며 기침을 해 댔다.

얼굴은 빨갛게 물들고, 담갈색 눈동자가 심각하게 흔들린다.

“어머머, 너 정말 연애하니?”

세상에. 지해주가 제 남편을 두고 연애를? 그 죽고 못 사는 차은호를 두고 다른 남자를 만난다고? 결혼 3년 차면 권태기가 찾아올 수 있다지만, 그래도 지해주가 차은호를 두고 그럴 수는 없는데.

지수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기 시작했다.

“미쳤나 봐, 이 기집애가. 부회장님 스캔들 났다고 너도 바람피우면 어떡하니?”

지수의 말에 해주는 그저 입술을 뻐끔거릴 뿐이다. 앞서가도 한참을 앞서가는 제 친구에게 은호와 연애를 하고 있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거 당연히 헛소문이야. 우리 부회장님이 어디 그런 짝퉁 계집애에게 넘어가실 분이니?”

오늘 아침, 경은이 올린 게시 글 이후 십수 개의 파생 글이 올라왔다.

새벽녘, 은호의 방에서 경은이 나오는 것을 봤다는 증언부터 은호가 경은을 각별히 챙겼다는 증언까지. 심지어 파티에서 누군가에게 경은을 제 아내가 될 여자라고 소개했다는 증언까지 흘러나왔다.

아무리 익명 게시판이라지만, 너무하잖아.

아랫입술을 꾹 다문 채 복잡한 생각에 빠져 있던 지수가 순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머, 너 그래서 머리한 거야? 그 여자가 너 따라 하는 거 싫어서?”

지해주 카피캣이라 불릴 만큼 회사 내에서 말이 많았다. 지수조차 헷갈릴 정도이니 다른 사람들은 오죽하겠어.

“옷도 그래서 샀구나?”

옷 입는 브랜드에 스타일까지 복사해서 갖다 붙인 수준이었다.

해주 입장에서는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남편과 바람났다고 소문난 여자가 그녀를 똑같이 따라 하니 불쾌할 수밖에.

“그래도 걔가 바꿔야지 왜 네가 바꾸니?”

지수의 성난 목소리가 식당 안을 우렁차게 메웠다.

“불쾌하잖아. 불길하고.”

제 편을 들어 주는 지수에게 부드럽게 웃어 보인 해주가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 여자…… 닮았어.”

“닮긴? 너랑 하나도 안 닮았거든? 그게 어디 얼굴이니? 네 사진 가져다가 똑같이 수술해 달라고 한 괴물이지. 그런다고 부회장님 마음이…….”

“아니, 나 말고.”

“그럼 누구?”

무슨 소리냐는 듯 지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포크 끝으로 샐러드를 쿡쿡 찌르던 해주가 한쪽 손으로 턱을 괴며 물었다.

“너 혹시 기억나?”

“누구 말이야?”

“우리 대학 2학년 때, 축제 직전에 조별 과제 했던 거 기억나니?”

대학 2학년 때라니, 8년 전이다.

“음…….”

기억을 더듬느라 지수의 눈꺼풀이 빠르게 깜빡였다. 그러자 해주가 한마디 더 말을 보탰다.

“너랑, 나랑, 현욱 선배랑 과제 하느라 창성금융도 방문하고…….”

“어, 맞아. 기억나. 우리 그때 창성 와 보고는 우리 언젠가는 여기서 일하자, 그랬지.”

해주가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넷이었잖아. 하나가 더 있었어.”

“맞아. 네 명씩 한 조였어.”

해주의 말에 맞장구친 지수가 미간을 좁혔다.

“그런데 왜 기억이 안 나지?”

아무리 생각해도 또 다른 한 명이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히 넷이었는데 말이다.

“황경순이라고…… 선배들이 얼굴 없는 황순경이라고 불렀어.”

“아, 기억나. 기억나.”

이제야 기억났다는 듯 지수가 손뼉을 마주쳤다.

“그 머리 산발해서는 얼굴 다 가리고, 두꺼운 안경 끼고, 보철기에…… 귀밑에 커다란 점 있던 애. 그때 그 과대 오빠 폭행 사건, 걔 말이지?”

지나치게 상세한 기억에 해주가 픽― 웃음을 흘렸다.

“잘 모르겠다더니 별걸 다 기억하고 있네? 귀밑에 점까지 기억하니?”

그러자 지수가 헤헤거리며 웃었다.

“파리 붙은 줄 알고 내가 후려쳤거든.”

살짝은 민망한 기억인지 지수가 손끝으로 눈썹 옆을 긁적였다.

“근데, 걔가 박경은이랑 닮았다고?”

고개를 갸웃거린 지수가 질문을 던졌다.

“얼굴 본 적 있어? 난 한 번도 못 봤는데?”

얼굴 없는 아이로 통할 만큼, 얼굴을 본 적도, 심지어 목소리를 들은 적도 없다.

“눈빛이 닮았어.”

해주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나랑 주막에서 같이 일했었잖아.”

오래전 기억을 떠올리자 온몸에 솜털이 곤두서는 기분이다.

“목소리 한번 들려주지 않는데, 그 반들거리던 눈빛만큼은 되게 강렬했거든.”

무척이나 집요하고, 섬뜩하도록 괴이했던 짙은 밤색 눈동자였다.

* * *

지수가 해주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지수의 차가 골목 끝에서 모습을 감추자 대문을 향했다.

일주일 휴가를 준 사용인들은 내일이 되어야 돌아올 것이다. 불 꺼진 집을 물끄러미 바라본 해주가 가방을 뒤적여 열쇠를 찾았다.

그때였다.

“해주야.”

차 문을 닫는 소리와 함께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현욱이 다가오고 있었다.

“……선배?”

왼쪽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저녁 9시 반.

이 시간에 집 앞으로 찾아오다니, 도대체 무슨 일로?

“어쩐 일이세요?”

“전화 안 받길래.”

아― 해주의 입술이 살며시 벌어졌다.

미정과의 통화 후, 은호가 현욱의 전화에 차단을 걸어 버렸다. 푼다는 것을 경황이 없어 깜빡한 모양이다.

“죄송해요. 전화하신 줄 몰랐어요.”

열쇠를 가방 안에 다시 집어넣은 해주가 현욱을 똑바로 마주했다.

“급한 일인가요?”

전화가 안 되어서 집까지 찾아왔다면 상당히 급한 일이겠지. 그런데, 공적인 일이면 회사로 찾아올 수도 있었을 텐데 집이라니. 미정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잠깐 이야기할 수 있어?”

상당히 곤란한 표정이다. 현욱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 해주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가까이하지도, 밀어내지도 말라는 미정의 당부. 그 당부를 어느 선까지 지켜 줘야 할까. 어떻게 하면 미정이 예전 같은 일을 벌이지 않을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잠깐이면 돼.”

그녀의 망설임을 읽은 현욱이 제 차를 슬쩍 가리켰다.

“여기 서서 이야기할 수는 없잖아. 근처 카페를 가든지, 아니면 차 안에서라도 잠깐만 시간을 내줘.”

경계 가득한 눈빛으로 현욱의 차를 흘끔 본 해주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현욱의 얼굴에 설핏 미소가 어렸다.

조수석 문을 열어 주는 현욱에게 고개를 까딱이고는 차에 올랐다. 그리고 잠시 뒤 현욱 역시 차에 올랐다.

“다른 곳으로 갈까? 아니면 여기서…….”

“여기서 해요. 10분 시간 드릴게요. 남편이 곧 돌아올 거라서.”

은호가 알면 난리가 날 것이다.

[이 새끼에게 이렇게 웃어 주지 마. 한 번만 더 내 눈에 띄면 죽여 버릴지도 모르니까.]

도대체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 병원에 찾아온 현욱과 커피를 마시는 해주의 사진이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제 기획서가 완벽하다는 말에 웃어 준 거라고 아무리 해명해도 듣지 않았다.

[나랑 연애하는 이상, 이 새끼 끊어 내. 최미정, 그 여자가 아무리 뭐라고 해도 듣지 말라고.]

자기는 다른 여자와 스캔들도 나면서, 구시렁거린 해주의 입술을 은호가 키스로 뒤덮어 버렸다.

그러고는 서늘한 한마디를 던졌다.

[그 여자는 미친년이고, 이 새끼는 적어도 네 은인이기는 하잖아. 그래서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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