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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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 파스타와 샐러드를 먹었다.

미국에서 살 때 은호가 직접 만들어 먹던 거라고 했다.

재료도 간단하고, 요리법 역시 별다를 게 없었다. 그런데도 무척이나 맛있었다.

그렇게 함께 밥을 먹고, ‘N플렉스’에서 오래된 영화 한 편을 감상했다.

그와 첫 만남을 가졌던 해에 개봉된 영화였다.

[‘격정적 로맨스’, 봤어?]

두 번째 만남이 있었던 카페에서 그가 불쑥 던진 질문이었다.

[아니요.]

[그럼, ‘하이페리온’은?]

[안 봤어요. 아니, 못 봤어요.]

[왜?]

[바빠서요. 공부도 해야 하고, 아르바이트도 해야 하거든요.]

[너무 힘들게 사는 거 아니야? 이제 겨우 2학년인데.]

주막에서 봉변을 당한 그녀에게 벗어 준 카디건. 그 카디건을 돌려주기 위해 만난 자리였다. 그런데 불쑥 영화 이야기를 꺼내는 그를 그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놀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는 누구처럼 팔자 편한 태생이 아니라서요.]

딱딱한 목소리로 쏘아 주었다. 그리고 마음으로는 눈물을 흘렸다.

첫눈에 반했지만, 차마 내색할 수 없는 남자. 그 남자에게 조롱을 당하면서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 못하는 바보 같은 나. 무척이나 서글펐다.

그런데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하면 놀리는 게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기어코 그날 입에 올렸던 영화 두 편을 찾아내서는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했다.

어쩌면 그날, 그녀에게 영화를 보자고 말하려던 게 아니었을까.

그렇게 고른 것이 ‘격정적 로맨스’.

결국 영화가 채 끝나기도 전에 키스가 시작되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녀를 끌어당긴 은호가 입술을 겹쳐 왔다.

쪽― 소리와 함께 입술이 붙었다 떨어지고 다시 조금 더 짙게 입을 맞추었다.

“어디까지 허락할 거야?”

잠시 입술을 떨어뜨린 은호가 물었다.

그녀의 허락 없이는 그 무엇도 하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짧은 키스에도 몽롱해진 눈동자가 은호의 얼굴을 가득 담아냈다.

마음은 저를 몽땅 주고 싶지만, 두려웠다. 이 감정이 거짓일까 봐.

“키스까지요.”

그러자 은호의 미간이 슬며시 좁혀졌다. 그러고는 불만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겨우 키스. 늘 하던 건데.”

실망 가득한 목소리였다.

“늘 하던 거라니, 우리가 언제 키스를 늘 했다고.”

그의 푸념에 실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와 처음으로 키스한 게 2주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러자 은호 역시 그녀를 따라 웃었다.

“최근에 말이야.”

최근에. 그래, 첫 키스 이후 꽤 자주 입술을 나눴던 것 같다. 그리고, 그 키스의 끝엔 언제나 뜨거운 욕망이 도사리고 있었는데.

“좋아. 키스까지란 말이지. 각오해.”

잘못된 선택이었나, 망설이는 찰나 다시 입술이 맞물렸다.

텔레비전 가득 흘러나오는 ‘격정적 로맨스’의 두 주인공처럼, 아니 그보다 더 뜨거운, 정말이지 격정적인 키스였다.

가볍게 맞물렸던 입술이 깊게 이어지고, 목구멍 안쪽까지 그가 밀려들었다.

숨이 막혀 고통스러우면서도 미칠 것 같은 쾌감에 헐떡거렸다.

그녀의 입술을 떠난 그의 입술이 목덜미를 짙게 지분거렸다. 빗장뼈까지 샅샅이 훑으며 느리게 움직였다.

어느덧 그의 손이 그녀의 니트 단추를 건드렸다. 첫 번째 단추가 풀리자 해주가 그의 손을 잡았다.

“아, 안 돼.”

그러자 은호의 까만 눈동자가 불만을 띠고 번뜩였다. 그런 그에게 고개를 저은 해주가 선을 명확하게 그었다.

“안 돼요. 옷 입고 해요. 더는 안 돼.”

그녀의 대답에 미간을 슬쩍 좁히더니 한층 더 야한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입술을, 뺨을, 턱을, 귓바퀴를, 목덜미를. 미친 듯이 헤집으며 저를 새겨 나갔다.

귀밑에 입술을 가져다 댄 은호가 속삭이며 물었다.

“만지는 건?”

아까부터 그녀의 허리께를 배회하는 뜨거운 손길에 심장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기분이다.

“옷 위로.”

옷 안을 파고들려던 손가락이 멈칫했다.

“만져요.”

“약았어.”

원망과 웃음이 동시에 서린 푸념이었다. 그리고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를 움켜쥐었다.

캐시미어 니트의 보드라운 감촉이 우악스러운 힘에 휘감겨 묘한 자극을 주었다.

입술을 뚫고 야릇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 * *

월요일 아침.

경영전략본부로 해주가 들어섰다.

웅성거리던 본부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굿 모닝?”

분위기가 왜 이 모양일까, 오래 생각할 필요 없었다. 눈꼬리를 내린 지수가 후다닥 다가섰기 때문이다.

본부장실까지 그녀의 뒤를 쫓은 지수가 사무실 문을 굳게 닫았다.

“해주야.”

이름을 불러 놓고선 아무런 말도 없다.

그런 지수를 돌아보고 픽― 웃음을 흘린 해주가 재킷을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게시판 이야기야?”

“봤어?”

어떻게 안 봐. 난리가 났는걸.

“대충 봤어.”

“이게 무슨 일이니? 그 여자 미친 거 아니야?”

“미치기야 했겠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해주가 의자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사내 메신저에 새 메시지를 알리는 노란불이 깜빡거렸다.

“나름대로 억울하겠지.”

딸칵, 메시지를 클릭한 해주가 미간을 좁혔다.

“회장님 호출.”

그러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녀올게. 오전 회의나 잘 준비해 줘.”

윤규가 그녀를 회장실로 불렀다.

영국에서 금요일 저녁 귀국해서는 주말 잠깐 쉬고 출근을 감행한 모양이었다. 혈압이 높은 분이 쉬시지도 않고.

걱정스레 미간을 좁힌 해주가 회장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러자 윤규의 비서가 책상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회장님이 부르셔서요.”

“기다리고 계십니다.”

비서의 표정이 그리 좋지 못했다. 근심과 연민을 섞은 눈빛이 그녀를 훑자 해주가 방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윤규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중저음의 굵직한 목소리가 허락의 말을 던지자 해주가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해주는 잠시 멈칫했다. 박경은, 그 여자가 소파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벌을 서는 듯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린 경은은 참담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 경은을 잠시 눈에 담은 해주가 소파로 가까이 다가갔다.

“부르셨습니까?”

공식적인 자리라 해주의 태도가 사뭇 딱딱했다. 그런 해주를 물끄러미 바라본 윤규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해주 여기 앉거라.”

그러고는 경은의 맞은편을 가리켰다.

고개를 숙인 해주가 윤규가 권한 자리에 앉았다.

‘창성의 불도저’라는 별명을 가진 윤규인지라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박경은 씨가 올린 사내 게시판 글, 봤니?”

윤규의 물음에 해주가 고개를 까딱였다.

“네, 봤습니다.”

그러자 윤규가 끙― 앓는 소리를 내고는 소파 손잡이를 주먹으로 쳤다.

“내가 그만두라고 했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누구보다 은호를 아끼는 윤규가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겠지. 해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게시판에는 네가 그만두라고 한 것처럼 올렸더구나. 그래서 박경은 씨와 이야기 나누던 중이었다.”

사내 게시판에 경은이 글을 올린 것은 일요일 저녁이었다.

차은호 부회장과 스캔들을 일으킨 저를 지해주 본부장이 집요하게 괴롭혔다. 차은호 부회장과 함께 영국 출장을 떠나게 되자 자해를 하면서까지 차 부회장을 잡으려 노력했다. 그런데도 차은호 부회장은 저를 데리고 영국 출장길에 올랐고, 차 부회장과의 염문설이 일간지를 통해 돌자 지해주 본부장이 원격으로 그녀를 해고했다. 회사를 그만두는 것은 그만두는 것이고, 진실을 밝히고 싶었다.

미친 여자의 미친 글이었다.

그런 말도 되지 않는 글에 기함하기는 윤규도 마찬가지였다.

월요일부터 나올 필요 없다고 알렸는데, 당장에 회장실로 찾아와서는 해명을 요구했다. 그러고는 엉뚱한 요구를 해 왔다.

“네가 날 움직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너한테 직접 전해 듣고 싶어 하는구나.”

아무리 말해도 해주를 불러 달라는 요구만 해 댈 뿐, 말이 통하지 않는 여자다.

“넌 내게 단 한 번도 박경은 씨를 내보내라고 요구한 적 없어. 맞지?”

“요구한 적 없습니다.”

윤규의 물음에 당당하게 답한 해주가 시선을 돌려 경은을 바라보았다.

그녀와 무척이나 닮은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심지어 지금 경은이 입고 있는 옷은 원정의 생일 만찬에서 그녀가 입었던 옷과 흡사했다.

불쾌함을 감추지 않은 해주가 경은을 차갑게 훑었다. 그러자 입술을 파르르 떤 경은이 입을 열었다.

“왜요? 왜 요구하지 않아요? 내가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가요?”

한마디도 하지 않았건만, 상처받았다는 듯 울먹이는 모습이라니. 가슴께가 답답하다.

질린 얼굴로 그녀를 바라본 해주가 담담히 말을 꺼냈다.

“내 남편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으니까요.”

해주의 시선이 윤규를 향했다.

“만약 은호 씨가 정말로 그런 짓을 저질렀다면, 제가 부탁드렸을 거예요. 아버님.”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게 차은호의 아내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을 테니까.

“잘라 달라고요.”

* * *

“완전히 미친 여자잖아.”

회장실을 나선 해주가 엘리베이터에 다다랐을 때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그녀의 뒤를 요란하게 따랐다.

“지해주 본부장님.”

박경은, 그 여자다.

“이야기 좀 해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려는 해주의 팔을 경은이 잡아당겼다.

“박경은 씨.”

경은의 팔을 쳐 낸 해주가 싸늘하게 물었다.

“혹시, 나 알아요?”

“네?”

“이전부터 나 알던 사람이냐고요.”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왜 물으세요?”

“그 눈빛, 누군가가 자꾸 떠올라서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인데도, 묘하게 신경에 거슬렸다. 그녀를 기묘하게 담아내는 밤색 눈동자가.

어깨를 부르르 떨며 불쾌한 생각을 떨쳐 낸 해주가 차분하게 경은을 훑었다.

“아, 그리고 그 머리. 마음에 들어요?”

“네? 네.”

해주가 제 머리를 가리키는 걸 알고 경은이 손으로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해주와 똑같은 머리 스타일이다.

“난 별론데.”

순간, 경은의 인상이 불쾌하게 일그러졌다.

“그럼 잘 가세요, 박경은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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