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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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화기 너머에서 민영이 사라지고도 한참을 얼어붙어 있었다.

    은호가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

    “전화해?”

    손에 무언가를 잔뜩 들고 들어온 은호가 해주에게 다가왔다.

    “누구?”

    그제야 휴대전화를 내린 해주가 어색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가씨요.”

    “민영이?”

    은호의 미간이 좁혀졌다. 민영과의 통화는 늘 해주에게 불유쾌한 기분만 들게 하기 때문이다.

    “왜 걔 전화를 받아. 상대해 주지 말라니까.”

    언짢은 듯 말한 은호가 짐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민영이가 또 뭐래?”

    그러고는 가늘게 떨리는 해주의 손끝을 살며시 거머쥐었다.

    “대학 동기 하나가…… 사고로 죽었다고, 전해 줬어요.”

    그저 대학 동기의 사고 소식일 뿐인데, 해주의 안색이 지나치게 창백했다. 은호의 눈빛에 의구심이 담기는 것은 당연했다.

    “……누군데?”

    “이게 다 뭐예요?”

    대답을 회피한 해주가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 가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등 뒤로 다가온 은호가 그녀의 몸을 감싸 안았다.

    “이야기해 봐. 무슨 일이야?”

    “아무 일도 없어요.”

    엷게 웃은 해주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그녀를 안은 팔에 좀 더 힘이 들어갔다.

    “내가 말했지? 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한테는 유독 신경이 쓰이더라고.”

    그랬다. 그래서 가슴 안쪽이 몹시도 소란스러운 거다. 차은호가 유일하게 신경 쓰는 사람이 저라서. 그게 미치도록 설레서.

    “네 표정, 네 눈빛, 네 말투. 지금 정상 아니야.”

    안 그래도 손끝이 차게 식고 목구멍 안쪽이 아릿하다. 이 기분이 불쾌감인지, 공포인지, 안타까움인지. 그것조차 구분되지 않아 불안했다.

    하지만 그녀의 등에 맞닿아 있는 은호의 열기로 인해 불안이 아내 희석되었다.

    천천히 몸을 돌려세운 해주가 은호를 올려다보았다.

    “미국으로 이민 간 동기가 죽었대요. 사고로.”

    “그런데?”

    “처음에는 실종이었대요. 그런데 어디 화재 사고 조사하다가 걔 DNA가 나왔나 봐요. 최종적으로는 사망 처리 되었고요.”

    이야기를 듣는 은호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냐고 묻는 듯하다.

    엷게 웃은 해주가 말을 이었다.

    “한국 사는 걔 엄마에게 유품이 왔는데…….”

    어디까지 말을 옮겨야 하나 고민하던 해주가 다시 입술을 열었다.

    “나와 관련된 물건이 있는 모양이에요. 그래서 전해 주고 싶다고…….”

    “너와 관련된 물건? 그게 뭔데?”

    은호의 인상이 조금 더 구겨졌다.

    “편지랑 사진 같은…….”

    뒷말을 잇지 못한 해주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암튼, 별일 아니에요. 친하지도 않았는데 편지를 남겼다니까 기분이 좀 그래서.”

    그런 해주를 눈에 담은 은호가 두 손으로 그녀의 팔을 가만히 거머쥐었다. 그러고는 살며시 쓰다듬는다.

    “여자……인 거지?”

    그의 터치에 등줄기를 따라 전율이 인 해주가 어깨를 바짝 좁혔다.

    “당연히 여자죠.”

    황급히 대답한 해주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이대로라면 그의 홍염살의 포로가 되어 또다시 옷을 벗어 던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샤워 가운 앞섶을 두 손으로 꼼꼼히 여민 해주가 경계 어린 눈빛으로 은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픽― 웃음을 흘렸다.

    “뭘 그렇게 가려? 이미 다 본걸.”

    장난스러운 한마디에 해주의 뺨이 빨갛게 익었다.

    “만지기도 했고, 먹기도 했는…….”

    아무렇지도 않게 부끄러운 말을 내뱉는 입술을 해주가 두 손으로 막아 버렸다.

    “그만해요. 나는 기억에도 없으니까.”

    빨개진 얼굴로 입술을 막는 해주를 지그시 바라본 은호가 웃었다. 그러고는 제 입술에 닿아 있는 그녀의 손가락에 입을 맞추었다.

    “거짓말.”

    움찔하며 도망가려는 손을 재빨리 거머쥔 그가 손가락 끝을 삼켰다.

    “기억하면서.”

    혀끝으로 손마디를 살살 건드리고, 이로 잘근잘근 씹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에라도 먹어 치우고 싶다.

    그의 행동에 당황한 나머지 도망갈 생각조차 못 하는 경직된 얼굴. 그 모습마저 귀엽다니, 운명이 아니라 사랑인가.

    사랑. 그 추잡스러운 감정을 이 고귀한 여자에게 느낀다고? 아니겠지. 차라리 욕망이라고 하자.

    “할래?”

    제 손가락을 삼키는 그의 입술을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던 해주가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커다란 눈망울이 하늘거리며 떨린다.

    “뭘……요?”

    순진한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한쪽 입술 끝을 비스듬히 말아 올린 은호가 그녀의 몸에 제 몸을 바짝 붙여 세웠다.

    “난 지금 상당히 꼴리는데.”

    흠칫 놀라 파들거리는 몸을 좀 더 깊게 끌어안은 그가 그녀의 귓바퀴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네가 원하지 않으면 안 해.”

    뜨거운 입김과 함께 속삭이듯 말을 뱉은 은호가 귓바퀴를 타고 내려가 귓불을 삼켰다. 귓불을 입 안에서 굴리자 해주가 신음 같은 한숨을 토해 냈다.

    “하지만 원한다면, 지금 바로 할 거야. 너도 느껴지지? 내가 널 간절히 원한다는 게.”

    “미, 미쳤어.”

    화들짝 놀란 해주가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그러고는 제 귀를 손바닥으로 어루만지며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연애 시작 첫날, 몸으로 들이대는 남자가 어딨어요.”

    “없어?”

    해주의 말에 은호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신선하게 다가오는지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없을……걸요?”

    웃음을 감추느라 입술을 감쳐물자 은호의 미간이 비좁아졌다.

    “그럼 연애 첫날은 뭘 해야 하는데?”

    여전히 제 관심은 그녀의 몸에 있다는 듯, 까만 눈동자가 살며시 벌어진 그녀의 가운 앞섶을 들여다보았다.

    당황한 얼굴로 앞섶을 여민 해주가 새침하게 대답했다.

    “바, 밥을 먹어야죠. 영화도 보고.”

    “그러고는?”

    보통의 연인들이 첫 데이트에서 뭘 하더라. 연애를 해 본 적 없는 해주는 지수에게 들었던 말을 상기하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술……도 마시고……?”

    얼마 전, 술에 취한 그녀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뛰놀았던 것을 기억해 낸 해주가 말끝을 흐리며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취하면 볼만하겠네.”

    같은 기억을 가진 은호가 사악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좋아, 밥부터 먹자.”

    * * *

    윤규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온종일 전화기만 바라보던 원정은 결국 신률을 찾아갔다.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커다란 접견실 한쪽에 앉은 원정은 신률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손님들의 면면을 살폈다.

    “세상에, 저 사람…… 한민당 대표 아니야? 다음 대권 도전자라는?”

    “맞는 것 같습니다, 사모님.”

    원정의 말에 곁을 지키던 비서가 얼른 대답했다.

    접견실을 가득 메우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매스컴에 얼굴깨나 알려진 이들이었다.

    “역시 신률 도사님. 대한민국에서 큰일 한다는 사람들은 죄다 여길 찾지.”

    괜히 뿌듯한 기분이 든 원정이 고개를 빳빳이 추어올렸다.

    그래, 신률의 말이 틀릴 리가 없잖아. 뭘 의심한 거야. 신률 도사님의 신령은 대한민국 최고라고.

    “창성금융 나원정 사모님?”

    그때 신률의 제자가 접견실로 들어와 그녀를 찾았다.

    “네, 저 여기 있어요.”

    자리에서 일어난 원정이 손을 들어 올렸다.

    “오시죠. 선생님이 들어오시랍니다.”

    그를 의심해서 여기까지 찾은 것이 괜스레 민망해진 원정은 좀 더 공손한 자세로 그의 집무실을 향했다.

    “도사님―”

    말꼬리를 애교스럽게 길게 뺀 원정이 집무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생글생글 웃으며 그가 권하는 자리에 앉은 원정은 당장에 가방을 열어 두툼한 봉투를 꺼냈다.

    성의껏, 남들과는 다르게 준비했다. 이런 그녀의 노력이 오늘처럼 예약도 없이 찾았지만, 가장 먼저 신률의 얼굴을 볼 수 있는 특권으로 이어졌으니까.

    “작은 사모님은 좀 어떤가요?”

    대번에 그녀의 용건을 알아챈 신률이 먼저 해주의 안부를 물었다.

    “아무래도 불임인 것 같아요.”

    “설마요. 제가 맥을 짚었을 때는 괜찮았습니다만.”

    제 진맥에 오류가 있을 수는 없다는 듯 신률의 목소리가 사뭇 엄했다.

    그러자 원정의 눈꼬리가 대번에 아래를 향했다.

    “아이 갖는 것을 이상할 정도로 피하는데…… 다른 이유가 있을까요?”

    “남자가 있는 건 아닐까요?”

    “네에?”

    해주에게 다른 남자가 있다니. 그건 절대 아니다.

    “절대로 아니에요, 도사님.”

    고아 출신에 무일푼인 해주를 며느리로 받아들일 때, 복사꽃 사주라는 이유만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은호를 바라보는 해주의 눈빛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보셨잖아요. 은호와 해주, 둘이서 좋아 죽는 거.”

    신률이 코웃음 쳤다.

    “좋아 죽는 차은호 부회장님께 여자도 붙이신 분이, 며느리 남자관계에 대해서는 아주 관대하십니다?”

    해주를 나무라는 건지, 저를 나무라는 건지. 순간적으로 헷갈린 원정이 말을 더듬었다.

    “그, 그야, 너무 아이가 생기지 않으니까…… 혹시 싶어서…….”

    은호에게 여자를 붙이고, 해주에게 많이 미안하기는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도사님이 그러셨잖아요. 그 아이도 복사꽃 사주라 은호에게 좋은 기운을 불러일으킬 거라고.”

    좋은 기운을 불러일으키는 부적은 많을수록 좋다고 했다. 그래서 박경은, 그 아이를 은호에게 보냈다.

    은호에게 관심을 보이길래, 유혹하라고 했다. 잠자리를 가지라고도 했다. 그래서 행여 아이를 갖게 되면, 그때는 며느리 자리까지 내어 줄 수 있다고도 했다.

    “며느리를 그 여자로 바꾸고 싶은 마음은 아니었고요?”

    “아니에요, 절대.”

    원정이 펄쩍 뛰었다. 그건 절대 아니다.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이 해주가 더 귀하다. 물론, 아이를 낳을 때의 일이지만.

    “전 해주가 더 예쁘다고요. 욕심도 없고, 순종적이고, 잔꾀 부리지 않고.”

    “그럼, 오늘은 작은 사모님에 대해 알아볼까요?”

    신률이 점통을 열었다.

    “과연 아드님에 대한 마음이 진심인지 아닌지. 욕심이 있는지 없는지. 잔꾀를 썼는지 안 썼는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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