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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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학 갔을 때 말이야. 미국에서 우연히 네 소식을 들었어.”

    걸음을 멈춘 그가 해주의 얼굴을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안 그래도 동그란 눈이 더 동그랗게 커졌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민영이가 보스턴으로 여행 왔을 때야.”

    이번에는 미간이 좁혀졌다.

    “불쑥 네 이야기를 꺼내더라.”

    입술 끝에 단단히 힘이 들어가고.

    “살던 집에서 쫓겨나게 생겼다고 했어.”

    하― 기가 막힌다는 듯 숨을 토한다.

    “네가 집주인 아들을 유혹했다나 어쨌다나.”

    어이없다는 듯 입술을 벌리고는 실소한 해주가 손을 허리에 얹은 채 삐딱하게 다리를 내밀었다.

    민영의 말만 나오면 일관되게 나오는 반응이라 은호가 슬며시 웃었다.

    “두 번 봤지만, 내가 아는 지해주는 그런 여자가 아니었어. 그 반대면 반대지.”

    해주의 표정이 다시금 변했다. 찌푸려졌던 인상이 펴지고 동공이 조금 확대되었다. 갈색 눈망울이 여리게 흔들리는 게…… 예뻤다.

    “진우 시켜서 알아보라고 했어.”

    당장에 한국으로 전화를 걸어 해주에 대해 알아보라고 했다. 약 일주일 뒤, 진우는 제법 자세한 것까지 그에게 보고했다.

    “그래서 알게 된 거야. 네 진짜 속사정.”

    살던 집에서 쫓겨나게 생긴 게 아니라,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다는 것.

    행여 해주가 독립하면 강현욱이 그 집에 드나들까 봐, 그게 무서워서 해주를 잡아 두고 괴롭혔다. 그 미친 여자가.

    그때 일을 떠올린 은호가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그래서 다시 만났을 때 대뜸 결혼하자고 했어요? 내 처지가 그래서?”

    해주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고,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내가 스마트해서, 내가 창성에 필요한 인재라서, 아까워서…… 스카우트하는 거랬잖아요.”

    그렇게 말했다.

    “하고많은 여자 중에 하필 나인 이유가 똑똑하지만 스펙이 없어서 취직할 수 없는 가난한 인재를 구원해 주는 거라면서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해주는 분명 그런 인재였으니까.

    “이왕 계약 결혼을 할 거면 창성에 도움 되는 여자를 들이자고…….”

    목이 메는지, 말을 멈춘 해주가 호흡을 가다듬으려 코를 훌쩍였다.

    “그런데…… 불쌍해서였어요? 동정심에?”

    “아니. 달라.”

    그것보다는 훨씬 짙은 감정이었다.

    “뭐가 달라요.”

    “네가 마음 쓰여서.”

    동정심과는 달랐다. 불쌍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갔다. 신경이 쓰였다. 자꾸만 생각났다.

    “한 번도 남에게 마음 쓰여 본 적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네게는 계속 마음이 쓰였어.”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다.

    터무니없게도 그런 이유로 불면증이 생기게 되었다.

    그만큼 낯선 감정이었다고. 알아?

    해주를 바라보는 은호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런 은호를 빤히 올려다본 해주가 코를 한 번 더 훌쩍였다. 눈물을 참는 모습이 기특했다.

    “그럼 그날, 일부러 날 찾아온 건가요?”

    “아니.”

    은호가 고개를 저었다.

    “청담동에 산다는 건 알았어. 주소도 있었어. 하지만 일부러 찾아간 건 아니야.”

    정말이지 우연이었다.

    “근처에 진우 본가가 있었고, 진우 아버지께 귀국 인사 드리러 간 거였어.”

    신발을 벗고 그 집에 들어서자마자 들은 이야기가 그 이야기였다.

    [야, 차은호. 너 그거 알아? 우리 집 뒤에 공원 있잖아. 그 건너에 그 여자 산다?]

    [그 여자라니?]

    [네가 나더러 감시하라고 시킨 그 여자 말이야. 내가 무려 3년이나 감시한 여자. 지해주.]

    그 말을 전해 들은 순간부터 은호의 머릿속은 온통 해주로 가득했다.

    “물론 네 생각을 아예 안 한 건 아니야.”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기 전, 공원까지 잠시 걸었던 거다.

    “이 근처에 지해주, 그 여자가 있겠구나.”

    행여 울고 있을까, 맞지는 않았을까. 마음이 쓰였다.

    “막걸리를 뒤집어써서 하얀 블라우스가 온통 살구색으로 물들었던 여자. 카디건을 벗어서 가려 주어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던 여자. 햇살 비치는 카페 창가에 앉아 야무지게 아이스커피를 마시던 그때 그 여자가 이 하늘 아래 있겠구나.”

    은호의 말에 해주의 담갈색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 정도 생각만 했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은호는 그저 빙긋 웃을 뿐이다.

    “만날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

    담담한 목소리로 과거를 이야기하며 그녀 앞으로 한 발 다가섰다.

    “우연히라도 만나게 된다면 운명이 아닐까…… 생각했어.”

    웃기지만, 정말 그런 생각을 했다.

    재수 없을 정도로 인간미가 없다는 말을 듣고 살았던 그가, 정말이지 그답지 않은 생각을 했던 순간이었다.

    “그러다 널 봤어.”

    기적 같았다.

    술 취한 남자에게 가려져 있던 그녀가 눈에 들어온 순간, 뒤통수를 세게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운명이네.]

    조용히 읊조리고는 주저 없이 다가섰다.

    “사랑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적어도 운명이긴 했어.”

    사랑 같은 조잡한 감정보다는 숭고한 것이라 생각했기에 망설이지 않았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해요?”

    하지만 해주는 은호가 뱉어 내는 말들에 이유 모를 두려움을 느꼈다.

    “이혼하자고 하니까, 이제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해요?”

    행여 은호의 이런 말들이 그녀의 발목을 잡기 위한 것일까, 두렵기만 했다.

    귀에 듣기 좋은 말로 유혹해서는 놓아주지 않았던 미정처럼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네가 이혼하자고 하니까.”

    당연한 것 아니냐며, 표정이 능청스럽다.

    “운명 같은 네가 도망가려고 하잖아.”

    농담처럼 들리기도 했다.

    “네가 도망가 버리면, 운명이 아니게 되고 말이야.”

    하지만 농담은 아니었다. 태연한 얼굴이긴 하지만, 눈빛만큼은 너무나 뜨거웠으니까.

    “네게 내 인생을 걸었는데, 운명이 아니게 되면…… 곤란하잖아?”

    이 결혼에 인생을 걸었다는 건 3년 전, 계약서에 사인하면서도 들었던 말이다.

    그녀가 사인을 막 마쳤을 때다.

    왼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말아 올린 은호가 장난처럼 말했다.

    [이 결혼에 내 인생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그러니 앞으로 잘 부탁해, 달링.]

    ‘달링’이라는 호칭을 처음 들은 날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의미가 숨어 있었다니.

    아직 뭐가 뭔지, 어리둥절한 해주가 미간을 좁히며 입술을 뗐다.

    “사랑인지 아닌지는 모른다고 했죠.”

    그는 그저 그날의 우연을 운명이라 단정 짓고 결혼을 감행했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사랑이 배제된 운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그녀의 경우, 이 결혼의 시작만큼은 적어도 사랑이었다. 감히 운명이라 치부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뜨거웠던 첫사랑.

    그런데, 사랑 없이 그저 운명이라니. 그건 너무 서글프잖아.

    “사랑이 배제된 순간, 운명이 아니라고요. 그러니 이런 식으로 사람…….”

    “사랑이 배제되었는지 아닌지, 지금부터 알아보면 되잖아.”

    고개를 옆으로 비스듬히 기울인 은호가 무심한 얼굴로 그녀를 담아냈다.

    “그리고, 왜 자꾸 우리 사이에 사랑이 배제되었다고 단정 짓지?”

    무심하지만 무심하지 않은 목소리로 그녀를 나무랐다.

    “내가 널 사랑할지도 모르고, 네가 날 사랑할지도 모르잖아.”

    그의 말에 심장이 가슴을 뚫고 튀어나올 듯 쿵쾅거렸다.

    차은호가 사랑에 여지를 남기다니.

    사랑이란 추악하고, 조악하고, 조잡한 감정의 화학반응 같은 거라더니.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사랑하면 하는 거지, 할지도 모른다니. 그건 결국 안 한다는 거잖아.”

    해주의 목소리가 떨렸다.

    “알아보자는 거야. 서로를 향한 마음이 사랑인지 아닌지.”

    목소리만큼 떨리는 담갈색 눈동자를 눈에 담고 은호가 웃었다.

    “그러니까 해주야.”

    그러고는 그녀의 손을 살며시 거머쥐었다.

    “나랑 사귀자.”

    열기 어린 검은 눈동자, 손에 닿는 뜨거운 체온, 달콤한 목소리.

    차가운 바닷바람이 마치 남국의 따스한 바람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여전히 믿을 수 없는 말이다. 아니, 믿기지 않는 말이다.

    “지금…… 뭐라 그랬어요?”

    조심스럽게 확인하는 해주에게 확신에 찬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연애하자, 우리.”

    * * *

    연애하자, 우리.

    조금 전, 바닷가에서 들었던 말이 귓가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애월의 한 펜션.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근 해주는 소란하기 짝이 없는 심장을 달래며 생각을 정리했다.

    이혼을 요구하는 그녀에게 연애를 요구한 은호.

    [앞으로 90일 정도 남았어. 그동안 부부로 살면서 나랑 연애해. 헤어지게 되더라도 후회가 남지 않게.]

    그렇게 연애를 선언한 은호는 장을 봐 오겠다며 그녀만 혼자 두고 펜션을 나섰다. 다녀올 동안 뜨거운 물에 몸이라도 담그라며 욕조에 아로마 오일까지 손수 넣어 주었다.

    “차은호와 연애를…… 하게 되다니.”

    욕조에 느긋하게 등을 기댄 해주가 헛헛한 웃음을 터트렸다.

    “보통 연인은 이 경우에 같이 장을 보러 간다고요, 차은호 씨.”

    잠시도 떨어져 있기 싫어서 같이 장을 보고, 같이 요리하고,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잠을 자고, 같이 씻기도 할까?

    욕조에 은호와 함께 몸을 담근 장면을 상상한 해주가 뺨을 빨갛게 물들였다.

    “미쳤어. 그런 망측한 상상을…….”

    그때였다.

    그녀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응? 전화기가 어디 있지?”

    어젯밤,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전화기를 은호가 챙겼다고는 했는데…….

    “설마, 전화기를 슈트 케이스에 넣은 거야?”

    욕조에서 몸을 일으킨 해주가 샤워 가운을 끼어 입고는 슈트 케이스를 펼쳤다.

    한 번 끊겼던 전화가 다시 울리는 걸 보니 꽤 다급한 모양이다.

    행여 원정일까, 떨리는 마음으로 전화기를 찾아 든 해주는 인상을 구기며 전화를 받았다.

    “아가씨?”

    민영이었다.

    -야, 지해주. 너 그 소식 들었어?

    아무리 후배라고는 하지만, 손위 사촌 올케에게 ‘야, 지해주’라니. 암튼 못 말리는 사람이다.

    “무슨 소식이요?”

    -황경순 걔 말이야.

    “황경순?”

    -내가 말했잖아. 그 얼굴 없던 못난이.

    “아― 네.”

    원정의 생일 만찬에서 민영이 안주 삼아 떠들었던 그 아이.

    “걔 죽었대. 그런데 걔 엄마가 널 찾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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