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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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쳤나 봐.”

    너무나 매혹적인 눈웃음에 멀미가 나려는 것을 다잡은 해주가 고개를 저었다.

    “짐도 안 챙겼는데, 제주도를…….”

    “내가 다 챙겼어. 네 짐, 내가 다 쌌다고.”

    “세수는…….”

    “안 해도 예뻐.”

    * * *

    긴장이 풀려서일까. 비행기 안에서 해주는 내내 졸았다. 이제 곧 제주국제공항에 착륙한다는 멘트에 눈꺼풀을 들어 올린 해주가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곁을 돌아보니 눈을 감은 은호가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차은호, 그녀의 법적 남편이자 비즈니스 파트너.

    불과 이 주 전만 해도 남편보다는 비즈니스 파트너에 더 가까운 관계였는데, 갑자기 상황이 급변했다.

    무엇이 이 남자의 심경에 변화를 준 걸까? 아니, 지금 그가 보여 주고 있는 태도가 진심이기는 할까?

    그때였다.

    “뜨거워.”

    은호의 붉은 입술이 고요한 목소리를 내놓더니 눈꺼풀이 올라섰다.

    “네 시선, 뜨겁다고.”

    고개를 슬쩍 돌려 해주를 바라본 은호가 나른하게 웃었다.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킨 해주가 얼른 고개를 돌려 버렸다.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린 듯도 하다. 그 소리에 심장이 발아래로 뚝―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착륙하는 비행기의 꿀렁임이 가지고 온 물리적인 현상이라고 애써 무시한 해주가 팔걸이를 꼭 거머쥐었다.

    그 이후로 은호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게이트를 빠져나가면서도, 수하물을 찾으면서도, 필요한 말 외에는 침묵했다.

    그게 못내 불편해 괜스레 죄 없는 손가락만 꼼질거렸다.

    평소 타는 차와 같은 종류의 차로 렌트를 끝낸 은호가 해주에게 손짓했다.

    트렁크에 슈트 케이스 두 개를 실은 은호가 조수석 문을 열어 주어 말없이 차에 올랐다.

    그렇게 제주국제공항을 떠난 차가 한 20분쯤 달렸을 때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평소였다면, 렌터카가 아니라 제주 지사에서 사람을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성산포 근처에 있는 별장으로 갔겠지.

    그런데, 웬일인지 차가 향하는 방향이 성산포 쪽이 아니다.

    “별장 가는 거 아니에요?”

    “별장 가고 싶어?”

    해주의 질문에 질문으로 답한 은호가 그녀를 슬쩍 돌아보았다.

    또다시 마른침이 넘어갔다.

    아까부터 이런 식이다. 은호와 시선을 제대로 맞추지 못한 해주는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안 가고 싶어요. 가면 어머니 귀에 바로 들어갈 거잖아요.”

    어머니?

    그제야 원정에게 생각이 미친 해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은호를 돌아보았다.

    “어머니에게 전화드려야 하는데.”

    “왜?”

    곧바로 대답을 내놓지 못한 해주가 금붕어처럼 입만 벙긋거렸다.

    불임 여부를 진단받으러 병원에 가기로 했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그, 그게…….”

    “제대로 말해.”

    은호의 눈빛이 싸늘하게 굳어 갔다.

    “오늘 외숙모님 병원에 가기로 했어요.”

    “왜?”

    “검사받으러요.”

    입매를 단단히 굳힌 은호가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몇 번 가지 않아 스피커 너머로 원정의 목소리가 울렸다.

    -차은호 부회장? 영국에서 어쩐 일이니?

    좀처럼 먼저 전화하지 않는 은호이기에 그의 전화가 반가운 모양이었다. 목소리에 봄바람이 부는 듯하다.

    “어머니.”

    하지만 은호의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경고드렸었어요. 해주 건드리지 말라고.”

    -으, 은호야?

    당황한 원정이 말을 더듬었다.

    “왜 자꾸 선을 넘으세요?”

    -해주가 그래? 내가 저를 괴롭혔다고?

    분한 듯, 원정의 목소리 끝이 파들거리며 떨렸다. 그러고는 변명이 이어졌다.

    -그거 거짓말이야. 너 영국에 있다고 전화로 별소리 다 한 모양인데, 아니야. 은호야 그게…….

    “저 한국입니다.”

    원정의 말을 가로막은 은호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해주, 오늘 병원 못 가니까 그렇게 아세요.”

    -한국이라니? 너 한국 먼저 들어온 거야?

    “네, 어머니 장난이 이제는 너무 역겨워서요.”

    역겹다는 말을 강조하자 원정이 소리를 바락 질렀다.

    -은호야!

    “그만하시죠.”

    싸늘하게 내뱉자 수화기 너머 원정의 숨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해주 역시 소름이 오소소 돋아날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였다.

    “당분간은 해주 얼굴 볼 생각 하지 마세요. 저도 물론이고요.”

    저를 낳아 준 어머니를 상대하고 있는 거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차가운 태도였다.

    “끊겠습니다.”

    길쭉한 손가락이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숨조차 제대로 내쉬지 못하던 해주가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도대체 어쩌려고 이래요? 어머니에게 이런 식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편들어 주는 것도 정도가 있지, 이건 후폭풍이 더 거셀 건데.

    “내가 더 곤란해질 거라고는 생각 안 해요?”

    그러자 무심한 눈동자가 그녀를 눈에 담았다. 지극히 차은호다운 눈빛이었다.

    “내가 참아 주고 있는 인간은…….”

    하지만 목소리만은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최미정, 그 여자 하나로 충분해.”

    최미정. 조금은 소름 끼치는 이름을 짓이기듯 발음한 은호가 예의 그 무심한 눈빛을 거두었다.

    “이야기 좀 해요.”

    * * *

    창성금융그룹과 영국 브리티시뱅크의 MOU 체결은 성공적이었다.

    브리티시뱅크의 회장이 은호를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했고, 은호는 아주 세련된 화법과 매너로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경영전략본부가 만들어 낸 제안서 역시 아주 훌륭해서 두 은행 모두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

    은호가 해주와 팀원들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이유를 알 법도 했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윤규가 차에 올랐다. 이제 조찬 회동만 잘 마무리되면 영국에서의 일정도 드디어 마지막이다.

    차에 올라 한숨 돌릴 때였다.

    비서에게 맡겨 둔 윤규의 휴대전화 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회장님? 사모님이십니다.”

    아침 8시, 서울은 오후 4시쯤이려나.

    “끊어.”

    무뚝뚝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지 않겠다고 내색하자 조수석에 앉은 경은이 움찔했다.

    “옆에 감시 역 붙여 뒀으면 됐지, 뭔 전화야?”

    못마땅한 표정으로 경은을 바라본 윤규가 눈을 감았다.

    어제 아침이었다.

    [아버지도 동의하신 일인가요?]

    조찬 회의가 끝난 자리에서 서늘한 표정의 은호가 날 선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소리야?]

    [박경은 저 여자, 어머니가 제 밤 시중을 들라고 영국으로 보냈다는데요.]

    [뭐야?]

    [어젯밤, 제 방에 들어왔던데요?]

    [뭐?]

    [제 방 열쇠를 손에 넣으려면, 조력자가 있었을 텐데. 아버지는 아니시죠?]

    소름 끼칠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를 뱉은 은호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저 분명히 경고했습니다. 해주, 상처 주지 마시라고요.]

    그러고는 제 비서를 눈짓해 불렀다. 다가온 정 실장이 식사 테이블에 일간지 하나를 올렸다. 어제 있었던 만찬 사진이 묘하게 편집되어, 엉뚱한 기사로 둔갑해 있었다.

    인상을 찌푸린 윤규가 은호를 바라보았다.

    [설마, 네 엄마 짓이라는 이야기니?]

    [아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확실한 건 저 여자를 여기로 보낸 게 어머니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은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 실장이 저 대신 나머지 일정을 소화할 겁니다.]

    [뭐?]

    [전 가 봐야겠어요. 해주가 울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협약서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으니까요.]

    여태 단 한 번도 실망시킨 적 없던 자식이다. 아니, 오히려 너무나 인간미 없이 완벽해서 걱정이던 놈이었다.

    그런 녀석이 결혼을 하고는 조금 달라졌다. 제 아내에게만큼은 그래도 사람답게 구는 듯해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그저 사람답게 구는 정도가 아니었다. 어제 아침의 은호는 제 여자를 지키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는 평범한 남자.

    그래, 불안함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지극히 평범한 남자로 보였다.

    “다행인 건가.”

    헛헛한 웃음을 흘린 윤규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박경은 씨.”

    조용히 부르자 경은이 뒤를 돌아보았다.

    “네, 회장님.”

    해주와 무척이나 닮았다. 머리 스타일이나 입고 있는 옷 스타일은 물론이고, 말투나 행동거지까지. 그대로 복사해 둔 듯해 소름 끼친다.

    “그만둘 생각 없어요?”

    “네?”

    저렇게 놀랐을 때 눈을 두 번 깜빡이는 것까지 영락없는 해주다.

    사소한 버릇까지 닮았다니, 만약 일부러 해주를 흉내 내는 거라면 섬뜩한 일이다.

    “내가 참아 주는 것도 딱 여기까지인데 말이야.”

    원정의 트라우마나 콤플렉스를 알기에 여태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 하지만 더는 그럴 수 없다.

    “한국 돌아가면, 그만둬요. 여기까지 합시다. 서로 더 추해지지 말고.”

    원정과 신률, 그리고 이 여자가 어디까지 연결되어 있는지는 모르지만, 여기서 끊어 내야 할 것이다.

    “내 아내, 이용하지 말라는 말이야.”

    더 일이 꼬이기 전에.

    * * *

    은호가 애월에 있는 한 카페로 차를 들였다.

    바퀴가 자갈 위를 구르는 소리가 멈추자 해주가 문을 열었다.

    “해주야.”

    카페로 걸음을 내딛는 해주를 은호가 불러 세웠다.

    “바다 먼저 안 볼래?”

    여기까지 달려오며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둘 다 입을 꾹 닫고서 묵묵히 앞만 바라보았다.

    해야 할 말이 산더미 같고, 물어볼 말이 태산 같은데…… 바다라니.

    “좀 걸었으면 좋겠는데.”

    “좋아요.”

    당장에 카페로 들어가 은호를 추궁해야 하건만, 그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한 해주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그녀가 바닷가 쪽으로 발길을 돌리자 은호가 다가와 어깨를 감싸 안았다.

    “추워.”

    싱긋 웃으며 내뱉는 말에 그저 새침한 시선을 보낸 해주는 얌전히 그의 팔에 어깨를 내주었다.

    그리고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모래사장에 나란히 발자국을 찍으며 한참을 거닐었다.

    입 안이 텁텁하다 못해 썼다.

    당장에 그 여자를 왜 사냥하려 했냐는 질문부터 해야 하는데, 차마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기를 잠시, 은호가 침묵을 깨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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