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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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주의 전화기를 빼앗은 은호가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 믿을게. 네 결혼이 불행하다고 해서 내 아들 이용하지는 않을 거라고 말이야. 그러니까 실망하게 만들지 마, 해주야.

    제 귀에 들리는 기막힌 소리에 은호가 코웃음을 흘렸다.

    “이것 봐요, 최미정 선생님.”

    얼음장보다 더 차가운 목소리가 은호의 입술을 가르고 흘렀다.

    “우리 결혼이 불행하다고 누가 그래요?”

    목소리보다 더 차가운 눈빛이 해주를 위압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그와 눈을 맞춘 해주가 전화기를 빼앗으려 들었다.

    “그쪽 아들이나 관리 잘해요.”

    하지만 오히려 해주의 손목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거머쥔 은호가 마지막 말을 짓이기듯 내뱉었다.

    “내 아내 근처에서 더는 깔짝거리지 말라고 전하란 말이야.”

    전화를 끊은 은호가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휴대전화를 집어 던지고는 해주를 마주했다.

    “이딴 대접을 받는데, 아직도 은인이란 이유로 봐줘야 해?”

    해주의 눈시울이 빨갛게 물들었다.

    “이런데도 참고 있어야 하냐고.”

    다그치듯 묻는 목소리에 노기가 어렸다.

    “당장에 강현욱, 그 새끼를 연구소에서 내치고, 업계에서 매장해 버려야 속이 시원할 것 같은데 말이야.”

    분노를 억누르느라 힘을 준 까닭일까, 은호의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차은호가 화를 내고 있다. 그녀 때문에.

    “왜 그래야 하는데?”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당신이 뭔데?”

    눈물 따위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눈물샘이 고장이라도 난 듯 말을 듣지 않았다.

    “최 쌤이 나한테 상처 줬으니까?”

    참으려고 노력할수록 더 많은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방금 건 상처도 아니야. 진짜 상처 준 사람이 누군데.”

    “해주야.”

    그녀의 손목을 더 바짝 움켜쥐며 은호가 한발 다가섰다.

    “놔요!”

    손목을 비틀어 그의 손을 뿌리친 해주가 그대로 화장실로 달려갔다. 구역질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변기를 끌어안은 해주는 먹은 것이 없는데도 속을 게웠다.

    그때도 이랬다.

    3년 전, 은호와 재회한 그날.

    미정에게 뺨을 맞은 해주가 집을 뛰쳐나왔다. 그리고, 어둠이 내린 공원에 숨어서 몰래 울고 있었다. 하필 은호에게 그 모습을 들켰고, 갑자기 서러워진 해주는 속을 게워 냈다.

    공원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헛구역질해 대는 해주에게 은호가 농담 같은 한마디를 툭― 던졌다.

    [결혼할래?]

    세 번째 만남이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만남 사이에는 5년이라는 시간이 가로놓여 있었고 말이다.

    그런데 웃기게도 ‘결혼할래?’라는 말에 심장이 방망이질 쳤다.

    [나랑 결혼하면, 얻는 게 꽤 많을 건데.]

    [얻는 게…… 많다니요?]

    [당장에 그곳 말고 살 집이 생기지.]

    어리둥절하며 되묻는 해주를 바라보며 은호가 한쪽 입술 끝을 보기 좋게 말아 올렸다.

    [그게 무슨…….]

    [아, 내가 너무 헷갈리게 말했나? 다시 고쳐 말할게.]

    마치 그녀에 대해 속속들이 다 안다는 듯 찐득한 눈빛에 웃음기가 어렸다.

    [나랑 계약할래?]

    그때 물었어야 했다.

    그녀가 갈 곳이 없다는 걸 어떻게 알았냐고. 결국 묻지 않았고, 흐린 눈으로 흘려보냈다.

    그 후로 은호에게 미정의 이야기를 했던가? 갈 곳 없는 그녀를 받아 준, 평생 잊지 못할 은인이라는 말 정도만 한 것 같다.

    그런데 오늘도 은호는 그날과 마찬가지로 그녀와 미정의 관계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듯 행동했다.

    “도대체 어떻게…….”

    그때였다.

    그녀의 등에 커다란 손이 조심스럽게 드리워졌다.

    “많이 안 좋아?”

    어루만지듯 살살 등을 훑는 손에 열기가 어려 있다. 그러자 다시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하지 말아요.”

    잘해 주지 말아요.

    제 등을 쓸어내리는 손을 매정하게 밀어낸 해주가 세면대에서 입을 헹궜다.

    그러고는 뒤를 돌아 은호를 마주했다.

    “왜 왔어요?”

    빨개진 눈시울에 창백한 얼굴.

    “영국에서 천년만년 살지?”

    울먹거리며 말하는 본새가 딱 바가지 긁는 마누라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본 은호가 그녀를 가만히 품에 안았다.

    “네가 이렇게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안 오고 배겨?”

    크고 단단한 몸에 파묻히듯 안긴 해주는 그를 벗어나고자 버둥거렸다.

    “무슨 상관이야, 차은호 씨가.”

    하지만 힘을 더한 은호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무시하면 그만이지.”

    그래, 무시했으면 됐잖아. 그녀야 속이 터져서 죽든지 말든지. 내버려 뒀으면 됐잖아.

    왜 일정보다 이틀이나 먼저 돌아와서는 기대하게 해. 왜 원망조차 못 하게 만들어. 왜?

    “무시?”

    은호가 제 품에서 그녀를 떼어 내고는 얼굴을 마주했다.

    “내가 널?”

    그의 미간이 애절하게 좁혀졌다.

    “그게 정말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건 아니지?”

    순간, 눈앞이 흐릿해질 정도로 눈물이 들어찼다.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가득 고이자 은호의 입술에서 나직한 한숨이 흘렀다.

    “해주야, 그 사진은 오해야.”

    은호의 한마디에 결국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장 기다렸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변명 한마디, 그 한마디를 듣기 위해 전화를 몇 번이나 했던지.

    원하는 말을 들었으면서, 앙큼한 손이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오해는 무슨 오해? 아주 꿀이 떨어지는 눈빛으로 그 여자를 바라보던데.”

    “…….”

    “한 번도 그런 눈빛으로 다른 여자 바라본 적 없으면서.”

    울분을 토하듯 던진 말에 은호가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질투……인 거지?”

    웃음이 섞인 듯도 하다.

    “누가 질투 따위를.”

    손등으로 눈물을 훔친 해주가 코웃음 쳤다.

    “그런 거 아니니까 비켜요.”

    두 손으로 은호를 힘껏 밀어낸 해주가 욕실을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이내 붙잡혀서 그의 품에 다시 갇히고 말았다.

    단단한 은호의 가슴 안쪽 그 어딘가에서 심장이 쿵쾅거린다. 몹시도 소란스러운 게 그녀의 것과 닮았다.

    입술을 질끈 깨문 해주가 주먹을 말아 그의 가슴을 때렸다.

    “미워.”

    정말 미워.

    그 순간이다. 귀를 의심할 만한 말이 귓가에 내려앉았다.

    “미안.”

    지금 차은호가 사과를 한 거야?

    눈을 동그랗게 뜬 해주가 은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다시 한번 은호가 나직이 속삭였다.

    “미안해.”

    처음 듣는 사과였다. 그녀에게는 물론이고, 그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사람이다. 가장 높은 곳에 군림하며 오만하게 세상을 내려다보는 존재. 그게 차은호인 것을.

    “너랑 결혼하고, 너한테 미안한 일 안 만들 거라는 게 나름의 신조였는데.”

    은호의 입술이 멋쩍게 구겨졌다.

    “자꾸 못 지키네.”

    씁쓸히 말한 은호가 손가락 끝으로 그녀의 눈가를 매만졌다.

    “내가 지해주를 울리다니.”

    탄식 섞인 한마디에 다시금 눈물이 고였다.

    그녀가 아는 차은호가 아닌 듯해 낯설기만 했다. 더욱 난감한 것은 이런 낯선 모습에 심장이 폭주한다는 것이다.

    어쩔 줄 몰라 입술만 달싹이는 그녀에게 은호가 다시금 속삭였다.

    “그 사진, 눈에서 꿀 떨어지는 거 아니야. 얻어 낼 게 있어서 미끼를 던지는 사냥꾼의 눈이지.”

    뜻 모를 말에 해주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그러자 은호가 희미하게 웃으며 그녀의 몸을 놓아주었다.

    “그런 게 있어.”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흘리듯 말한 그가 손끝을 그녀의 턱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그마저도 널 위한 거니까 날 조금만 더 믿어 주면 좋겠어.”

    눈빛이 지그시 그녀를 더듬는다.

    “그리고 말이야.”

    잠시 말을 멈춘 그가 슬며시 미소 지었다.

    “눈에서 꿀이 떨어진다는 건 이런 거야.”

    뭉근히 달아오른 까만 눈동자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더니 코끝을 타고 내려가 입술에 이르렀다.

    “보고 싶었어.”

    “거짓말.”

    당장에라도 키스할 것만 같은 행동에 귓등까지 빨갛게 물들인 해주가 도망치듯 욕실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은호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그녀를 거칠게 붙든 그가 침대에 던지듯 눕혔다. 그러고는 침대 위로 올라온 그가 그녀를 두 팔에 가두었다.

    그의 눈동자가 검은 물을 떨어뜨리기라도 할 듯 해주를 검질기게 담아냈다.

    마른침을 삼킨 해주가 당황한 얼굴로 은호를 바라보았다.

    “왜, 왜 이래요?”

    행여 옷을 벗기기라도 할까, 두 손으로 블라우스 앞섶을 꼭 거머쥐었다.

    손마디가 하얗게 불거질 정도로 힘이 들어간 손을 물끄러미 바라본 은호가 픽―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그녀 곁에 털썩 몸을 누였다.

    “자자. 피곤해.”

    넥타이를 풀어 침대 밖으로 던진 은호가 셔츠 단추를 두 개 정도 풀었다.

    “회의 끝나고 바로 비행기 탔어. 비행기 안에서도 잠 한숨 못 잤고 말이야.”

    그러더니 옆을 돌아보았다.

    “너 도망갔을까 봐.”

    마주한 까만 눈동자가 어째선지 먹먹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잠시 그녀를 눈에 담던 은호가 다시 몸을 움직였다.

    재킷을 벗어 던지더니 여태 벗지도 못하고 있는 해주의 재킷을 벗겨 냈다.

    “일단 자고, 내일 이야기해.”

    그녀를 제 품에 들인 채 꼭 끌어안은 그가 눈을 감았다.

    그 일련의 시간 속에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해주는 떨리는 심장을 잠재우며 눈을 꼭 감았다.

    * * *

    닷새 만에 단잠을 잔 듯하다.

    은호가 떠나고 더욱 복잡해진 머릿속에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런데 그의 품에 안겨, 그의 심장 고동을 들으며 잠을 청한 해주는 정말이지 다디단 잠에 빠질 수 있었다.

    그렇게 단잠에 빠져 있던 해주가 잠에서 깬 것은 그녀의 몸이 둥실 떠올랐기 때문이다.

    둥실 떠올라?

    놀란 해주가 눈꺼풀을 반짝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소리를 바락 내질렀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짓이에요?”

    그녀를 번쩍 안아 든 은호가 그녀의 몸을 차에 싣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행 가자, 지해주.”

    “여행이라니.”

    갑자기 무슨 여행? 자다가 방금 눈떴는데 여행을 어떻게 가요. 무슨 재주로 가.

    “지금 여행을 어떻게 가요?”

    “난 출장, 넌 병가. 사흘이나 남았어. 주말 포함 닷새야.”

    은호의 눈꼬리에 길게 주름이 지며 웃음이 그려졌다.

    “우리 제주도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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