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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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의 손길에 저를 맡긴 은호의 눈동자가 나른한 빛에 젖었다.

    턱선을 따라 내려온 손가락이 입술 근처에 머무르자 해주의 시선 역시 그의 입술을 향해 내려갔다.

    붉고 선명한, 그림 같은 입술. 적당한 두께감과 완벽한 비율을 자랑하는 입술은 때로는 고집스럽게, 때로는 장난스럽게, 그리고 때로는 지나치게 섹시하게 움직인다. 그래서 애가 탔던 게 한두 번이 아닌데, 지금은…….

    꼭 다물어져 있던 입술이 살며시 벌어지더니 제 가까이 다가온 그녀의 손가락을 삼켰다.

    놀란 해주가 움찔하며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뭉근한 열기를 담은 눈동자가 엷게 웃으며 그녀를 담아냈다.

    장난인가? 아니다. 그럼 놀리는 건가? 그것도 아니다. 그럼 왜……?

    그의 의도를 가늠해 보기도 전에 그녀의 몸이 반듯하게 눕혀졌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떠난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지그시 삼켰다.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분명히 꿈이 아님을 확인했는데, 꿈처럼 느껴져 몽롱했기 때문이다.

    은호가 왜 이런 키스를 제게 할까,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의 키스는 너무나 달고, 지나치게 아찔했다.

    그녀가 기억하는 두 번의 키스. 그때와는 다른 질감이었다.

    그때는 뜨거운 욕정을 드러내며 잡아먹을 듯 퍼붓던 키스였다면, 지금은 달래듯 매만지며 애달프게 삼킨다.

    상처받지 않으려 꽁꽁 싸매고 있던 심장의 빗장이 자꾸만 열리려고 해 난감했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밀려 들어오는 그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짧지 않은 키스가 끝나고 그가 입술을 떨어뜨렸다.

    어느새 감겼던 눈꺼풀이 열리며 몽롱한 빛을 발하는 검은 눈동자를 보여 주었다.

    “남자로 여기지 않는다는 말은 하지 마.”

    키스의 열기로 인해 가슴을 들썩이는 해주를 은호가 나른하게 눈에 담았다.

    “너한테 나, 적어도 남자기는 하니까.”

    이미 답은 명확했다. 지해주에게 있어 차은호는 남자, 지극히 남자, 너무나 남자다.

    그녀의 진심을 키스 하나로 이끌어 낸 은호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지수 팀장이 올 거야.”

    침대를 빠져나간 은호가 타액으로 반질거리는 해주의 입술을 엄지로 쓸었다.

    “계속 같이 있어 주고 싶지만, 출장…… 가야 해.”

    그제야 현실을 자각했다.

    어제가 원정의 생일이었고, 오늘은 은호가 출장을 떠나는 날이다. 하필 어젯밤에 그녀가 다쳤고, 굳이 입원하지 않아도 되는 그녀를 은호가 입원시켰다.

    “아― 아버님과 영국 가기로 되어 있었죠.”

    그래서 잊어버리고 있었다. 오늘부터 일주일간 영국 출장이 정해져 있었다는 걸.

    “짐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해주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지금이라도 당장 집으로 돌아가 짐을 챙겨야 한다.

    아무리 가짜 부부라도 그가 출장을 떠날 때마다 짐을 챙겨 주는 건 빼먹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괜찮아. 새벽에 집에 다녀왔어.”

    은호의 시선이 병실 구석에 세워져 있는 트렁크를 향했다.

    “내가 다 알아서 했으니까 걱정하지 마.”

    머리를 빗어 내리던 해주의 손 위로 은호의 손이 겹쳐졌다. 손의 온기가 그의 입술의 열기처럼 느껴져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지금부터 일주일이야.”

    손을 잡는 것쯤이야 일상적인 스킨십이었건만, 가슴이 터질 듯 떨려 왔다.

    “내가 돌아왔을 때는 네 마음이 대충 정리되어 있으면 좋겠어.”

    은호의 까만 눈동자가 그녀를 흔들림 없이 담아냈다.

    “날 네 남자로 받아들일지 말지 말이야.”

    그러고는 그녀의 손등에 지그시 입술을 눌렀다. 그런 그를 떨리는 눈빛으로 바라본 해주는 아무런 말도 못 한 채 그저 귓등만 빨갛게 물들일 뿐이다.

    “이혼은 그다음 문제야.”

    * * *

    그녀의 심장을 잔뜩 헝클어 놓은 은호가 영국으로 떠났다.

    하루 정도 입원하면 되는 일인 줄 알았는데, 진우의 누나이자 그녀의 주치의인 닥터 박의 명령으로 꼬박 나흘은 더 입원해야만 했다.

    [오늘하고 내일은 건강검진 받고, 그 뒤에 한 이틀 정도 더 쉬고 퇴원시켜 줄게요. 아, 참고로 입원 기간은 더 길어질 수도 있어요.]

    은호가 떠난 후 병실을 찾은 닥터 박은 장황한 치료 계획을 늘어놓았다.

    [제가 막 그렇게 많이 아픈가요?]

    [음, 아니요?]

    [그런데 왜 입원을 그렇게 길게…… 해야 하죠?]

    [지해주 본부장님 말고, 남편분이 많이 아파요.]

    [네?]

    [마음이 많이 아프다고.]

    닥터 박의 말에 해주의 미간이 가늘게 좁혀졌다.

    [암튼 본인 돌아올 때까지 병원에 잘 잡아 두라고 부탁했으니까 웬만하면 그 부탁 들어주려고요.]

    도대체 무슨 꿍꿍이야. 나흘이 아니라 무려 일주일을 입원해야 하는 거야?

    그리고 그의 꿍꿍이는 오전 10시쯤 찾아온 지수로 인해 밝혀졌다.

    “너 면회 금지야.”

    집에서 챙겨 온 물건들을 병실에 늘어놓으며 지수가 이야기를 꺼냈다.

    “응? 왜 면회 금지야? 내가 무슨 전염병에 걸리기라도 했어?”

    기껏 타박상에 왼쪽 손목 인대가 늘어난 정도다. 이마를 꿰매기는 했지만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웬 면회 금지?

    “문밖에 절대 안정, 면회 금지 팻말도 붙었고, VIP 병동 앞에 시큐리티까지 세워 뒀어.”

    지수의 말에 해주의 눈이 동그래졌다.

    “왜?”

    “난들 아니? 네 남편 명령이라는데.”

    “그게 무슨 말이야? 은호 씨가 그렇게 했다는 거야?”

    “자세한 이유는 말씀 안 해 주셨는데 말이야.”

    아무도 없는 병실을 조심스레 둘러본 지수가 목소리를 잔뜩 낮추며 말을 이었다.

    “얼핏 네 시어머니 이야기를 하더라? 웬만하면 네 전화기도 내가 가지고 있고, 평창동에서 연락 오면 나더러 대신 받으라고.”

    지수의 말에 해주의 입술이 스르르 벌어졌다.

    “너는 진정제 맞고 잔다고 하고, 절대 전화 통화 못 하게 하라더라. 당연히 면회도 안 되고 말이야.”

    어제 그 난리가 났으니 은호가 출장 간 틈을 타 원정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아니, 그런 일이 없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은호의 장기 출장이란 원정에게는 기회였고, 그 기회를 놓칠 사람이 절대 아니었으니까.

    작년, 은호의 미국 출장 때는 원정을 따라 지리산에 올라간 적도 있다.

    이상한 굴속에 들어가서는 촛불을 켜고 치성을 드리는데, 없던 귀신도 붙을 듯 으스스한 경험이었다.

    “네 시어머니 말이야. 아직도 네 몸에 부적 붙이고, 굿도 하고 막 그러시니?”

    “음―”

    망설이던 해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자 대번에 지수의 인상이 구겨졌다.

    “참 그분도 어지간하시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지수 역시 대충의 스토리는 알고 있었다.

    “아직 스물아홉밖에 안 된 며느리,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애 타령이시라니?”

    모르긴 해도, 이번 차은호 부회장 스캔들 사건에는 해주 시어머니의 입김이 깊게 들어가 있을 것이라는 게 지수의 생각이었다.

    아마 은호도 지수와 같은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제 모친의 별스러운 성격을 잘 알기에 해주를 강제 입원시키지 않았을까. 제가 돌아올 때까지 제 모친으로부터 해주를 보호하기 위해서.

    “암튼 내 남편이 네 남편 반만 시늉해 줬어도 내가 업고 다닐 건데 말이야.”

    쓴 입맛을 다신 지수가 부러움 가득한 눈으로 해주를 바라보았다.

    “복받은 줄 알아. 시댁 쉴드 그만큼 쳐 주는 남편도 없어, 얘.”

    자고로 시월드는 남편 하기 나름이니까.

    * * *

    영국으로 출장을 떠난 지 이틀이 지났다.

    해주의 주치의로부터 전화가 걸려 와 검사 결과를 알려 주었다.

    [몸이 많이 약해져 있어요. 일단 면역이 너무 떨어졌고요, 염증 수치가 전체적으로 높아요. 게다가 위벽은 다 헐었고, 역류성 식도염까지 있어서…….]

    잠시 말을 멈춘 주치의가 한숨을 내쉬었다.

    [차은호 부회장님, 사모님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요. 심리검사도 같이 진행했는데, 심리적으로도 많이 위축되어 있어요. 좀 편안하게 만들어 주세요.]

    샤워를 끝낸 은호는 침대에 길게 누워 의사와의 통화를 다시 한번 곱씹었다.

    스트레스가 심하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잘 견디는 듯하더니 작년 CCTV 사건이 있고부터는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수면제를 먹고 있었고, 작년 후반부에는 잠시 항우울제를 먹기도 했다.

    그가 이런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해주는 아직 모른다. 앙큼하게도 아무 일도 없는 듯,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 모든 걸 비밀에 부치고서 시종일관 웃는 얼굴로 그를 대했다.

    그게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말간 미소로 그를 기만했다.

    예쁜 미소에 언뜻언뜻 아픔이 비칠 때면 가슴 가운데가 뻐근해지곤 했다.

    “어떻게 해야 널 편하게 만들어 주는 건데?”

    그러자 이혼을 요구하던 야무진 눈빛이 떠올랐다.

    “이혼?”

    쓴웃음이 입술을 가르고 흘러나왔다.

    “그건 안 돼. 꿈도 꾸지 마.”

    그것만은 절대 안 된다. 이혼이라니.

    찾아내서 곁에 세우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때 노크 소리가 울렸다.

    설핏 문 쪽으로 시선을 돌린 은호가 미간을 좁혔다. 벌써 자정이 가까운 시간, 그의 방을 찾을 사람이 없는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은호가 문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문을 열었다.

    그러자 익숙한 향수 냄새가 짙게 풍겨 왔다. 분명 아는 향기인데, 그 향기에 섞인 낯선 냄새가 역해 은호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이내, 누군가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 허리를 잘록하게 묶은 진회색 캐시미어 코트, 검은색 그물 스타킹, 금색으로 끝이 처리된 검은색 스틸레토 힐.

    눈에 익지만, 한편으로는 낯선 모습에 은호의 얼굴이 서늘하게 굳었을 때다.

    그의 방문을 두드린 사람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안녕하세요, 부회장님.”

    박경은, 그 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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