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큰 소리를 낸다거나, 강압적으로 내리누른 말투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절로 입술이 다물어져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다.
“야! 내가 너 이럴 때나 구박하지 언제 또…… 구박하겠냐?”
진우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그를 돌아본 은호의 눈빛이 상당히 복잡해 보였기 때문이다.
“설마…… 네가 때렸냐?”
제 와이프라면 껌뻑 죽는 놈이 설마 그런 짓을 했겠냐마는, 지나치게 처연한 눈빛에 설핏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왠지 자책하는 눈빛이라서 말이다.
“아니지?”
은호의 눈치를 살핀 진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 진우에게 서늘한 눈빛의 은호가 질문으로 대답했다.
“무슨 대답이 듣고 싶은 거야?”
“아니 난…….”
“헛소리할 거면, 꺼져.”
그때였다.
MRI를 찍으러 갔던 해주가 병실로 돌아왔다. 환자복을 입은 그녀는 휠체어를 탄 채였다.
은호와 진우, 둘 사이에 감도는 살벌한 분위기를 읽은 해주가 미간을 좁혔다.
“왜 진우 씨를 구박해요? 누님이 잘 치료해 주셨는데.”
해주의 휠체어를 밀고 들어온 진우의 누나가 해주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주치의로서 치료 소견을 늘어놓았다.
“자세한 건 사진이 올라와 봐야 알겠지만, 머리도 이상 없을 거예요.”
MRI까지 찍게 된 건 지극히 은호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이마는 아까 보셨듯이 머리카락 라인 부분이라, 다행히 흉터는 눈에 띄지 않을 거고요.”
넘어지면서 욕조 가장자리에 이마를 부딪혔다. 얼굴이라 흉터가 눈에 띌 뻔했는데, 천만다행으로 이마와 머리카락의 경계 부분이 찢어졌다.
“손목 인대 늘어난 것 외에는 부러진 곳도 없고, 아― 물론 타박상은 있어요. 멍이 좀 크게 든 정도?”
허벅지와 무릎, 왼쪽 팔꿈치 부분, 그리고 이마 근처에 멍이 크게 들었다.
“군데군데 야무지게 들었더라고. 하지만 다른 곳은 다 괜찮으니…….”
설명을 이어 가던 의사가 잠시 말을 끊었다. 설명이 길어질수록 시시각각 심각하게 변하는 은호의 표정 때문이었다.
“차은호 부회장님? 죽을병 아니니까 그런 표정은 넣어 두세요.”
놀리듯 말한 의사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입원을 허락한 건 피검사 결과, 면역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예요. 영양제도 좀 맞고, 내일 건강검진 겸 다른 검사도 좀 받고, 며칠 푹 쉬는 게 좋겠다는 소견입니다. 이상입니다.”
곧 간호사가 링거를 놓으러 올 거라는 말을 마친 의사가 진우와 함께 물러나고 이윽고 둘만 남겨졌다.
괜스레 민망해진 해주가 그와 제대로 눈을 맞추지 못한 채 시선을 내렸다.
그런 해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은호가 다가섰다. 그러더니 휠체어에 앉아 있는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은호 씨!”
놀란 해주가 그를 불렀지만, 아랑곳없이 그녀를 안아 든 그가 침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고는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를 침대에 내려놓았다.
아무리 부러진 곳이 없다고는 하지만 아픈 건 사실이었다. 당연히 침대에 몸이 닿는 순간 인상이 찌푸려졌다.
“아파?”
흠칫 놀란 은호가 좀 더 조심스럽게 힘 조절을 했다.
“안 아프다면 거짓말이죠.”
그의 어깨에 의지한 채 침대에 누운 해주가 신음을 잘게 뱉으며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크게 아프지는 않아요.”
그렇게 침대에 제대로 자리를 잡은 해주가 그제야 은호와 시선을 마주했다.
까만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불안하게 만드는 걸까. 또다시 생각이 앞서 나가려는 걸 간신히 붙잡은 해주가 입술을 열었다.
“고마워요.”
그러자 까만 눈동자의 흔들림이 멎었다.
“뭐가?”
“병원 데리고 와 줘서요.”
욕조에서 나오다가 무언가를 밟았다. 아무래도 그녀의 머리핀인 듯했다.
욕실로 들어와서는 급히 옷을 벗으며 흘린 모양인데, 동글동글한 진주 장식의 머리핀에 물기가 더해져 발이 미끄러진 모양이었다.
넘어지지 않으려 애쓰다 오히려 몸이 뒤틀렸고, 욕조 가장자리에 머리를 찧은 그녀는 그대로 기절을 하고 말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응급실로 옮겨진 뒤였다.
의사의 말에 의하면 이마 정맥이 터지면서 피를 많이 흘렸고, 그 바람에 그녀의 남편이 많이 놀란 모양이라고 했다.
처치가 끝나고 커튼이 걷혔을 때, 은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불안한 눈동자, 하얗게 질린 안색, 헝클어진 머리카락, 붉어진 눈시울.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은호 씨.]
힘없이 그의 이름을 부른 순간 그가 성큼 다가섰다.
무감, 무정, 무심.
그 세 가지 요소를 어디다 흘린 건지, 미칠 듯 들끓는 감정을 가득 실은 은호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녀 역시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그 순간을 떠올리자 이상하게도 목이 메었다. 또 한편으로는 가슴 어딘가가 빠듯해지는 느낌이다.
코를 훌쩍인 해주가 말을 이었다.
“은호 씨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정맥이 터지는 바람에 피를 너무 많이…….”
해주가 말을 멈춘 것은 그 순간 은호의 손이 그녀의 뺨에 닿았기 때문이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뺨을 가만히 매만지더니 이윽고 이마 쪽으로 향했다. 아주 조심스러운 터치였다. 꿰맨 곳을 스치듯 지나서는 까맣게 올라오는 멍을 안타까이 어루만졌다.
그러고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고마워.”
이상한 일이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에 어째선지 눈물이 쏟아질 듯하다.
“뭐……가요?”
그녀의 물음에 은호의 눈빛이 뭉근히 데워졌다.
“무사해 줘서.”
결국 해주의 눈꼬리에 눈물이 맺혔다.
또르르, 말간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흐르자 은호의 손가락이 눈물을 거두었다.
“해주야.”
그저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눈물이 하염없이 흐른다. 아마도 그의 목소리가 잔뜩 가라앉아 애달프게 들렸기 때문일 것이다.
“울지 마.”
그러고는 그의 붉은 입술이 천천히 다가왔다. 순간적으로 끼쳐 오는 열기에 해주가 눈꺼풀을 꼭 닫았다. 그와 동시에 그의 입술이 눈꼬리에 닿았다.
키스를 하려는 건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는 눈물이 만들어 낸 길을 느리게 더듬으며 그녀가 흘린 눈물을 남김없이 들이켰다.
어느덧 움직임을 멈춘 입술이 천천히 멀어져 갔다.
그런 그를 나른한 시선으로 좇던 해주가 뭐라 말을 하려고 입술을 달싹였을 때다.
병실 문이 열리고 간호사가 들어왔다.
“피검사 결과, 빈혈이 있으세요. 비타민D도 부족하시고, 염증 수치도 전체적으로 높으셔서 복합적으로 영양제 투여될 거예요.”
방실방실 웃으며 해주의 팔에 링거를 연결한 간호사가 트레이를 열어 별도의 주사 세 개를 보여 주었다.
“이건 비타민D랑 진통제, 그리고 진정제예요.”
“진정제요?”
은호의 미간이 가늘게 좁혀졌다.
“통증 때문에 잠 못 들 수 있어서 처방되었어요. 환자분은 좀 푹 쉬셔야 하거든요.”
링거 줄에 주사 세 개를 차례대로 투여한 간호사가 예쁘게 웃어 보이고는 병실을 떠났다.
“……은호 씨.”
제 팔에 꽂힌 링거 바늘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해주가 나른한 목소리로 은호를 불렀다.
“응?”
진정제 때문일까, 머리가 어지럽고 입술이 둔해지는 기분이다.
“갈…… 거예……요?”
“아니.”
그녀의 물음에 은호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네 옆에 있을 거야.”
묘한 기분이 들었다. 차은호가 그녀를 무척이나 아끼고 있다고, 그녀 때문에 지금 속이 많이 상했다고, 어이없게도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다행……이네요.”
살포시 미소 지은 해주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같이 있어…… 준다……니. 혼자는 무서울…… 뻔했는데.”
약 기운을 이기지 못한 눈꺼풀이 결국 빛을 가렸다.
까무룩 정신을 잃기 전, 은호의 목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절대로 널 혼자 두지 않아. 내가 널 어떻게 혼자 둬. 이렇게 사…….”
* * *
뭐였을까. 뒷말을 듣지 못했는데. 혹시, ‘이렇게 사랑하는데.’였을까. 아니, 아닐 것이다. 아니, 어쩌면 마지막 말 자체가 환상인지도 모르겠다.
그래, 환상이겠지. 차은호가 그토록 애절하게 말할 리 없잖아.
어느덧 정신을 차린 해주가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진통제를 놔 준다고 했는데, 왜 이렇게 몸이 아픈지. 입술을 가르고 고통스러운 신음이 절로 흘렀다.
“으음.”
아프면서도 찌뿌드드한 몸을 조심스럽게 움직인 해주가 반대편으로 돌아누운 순간이다.
놀란 해주가 벌어진 입술을 다물지 못한 채 얼어붙었다.
좁디좁은 침대에 그녀와 나란히 누운 은호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녀 쪽을 바라보며 몸을 누인 은호는 깊은 잠에 빠져든 듯 보였다.
“차은호…….”
그의 이름을 혀끝에 굴려 본 해주는 묘한 충만감에 가슴이 뻐근해졌다.
그러고는 아주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건드려 보았다.
그때였다. 꼭 감겨 있던 은호의 눈꺼풀이 천천히 열리며 검은 물밑 같은 눈동자를 드러냈다.
꿈인지 생시인지 확인해 보려던 건 아니었다. 그저 지척에서 잠든 은호의 모습이 너무나 그림 같아서, 저도 모르게 손이 움직여진 거였다.
흠칫 놀란 해주가 손을 물린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속마음을 들킨 듯해 몹시도 당황스러웠달까.
하지만 도망치던 손은 금세 은호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빼내려 했지만, 빼낼 수 없었다. 그렇게 그녀의 손은 다시금 그의 뺨에 얹어졌다.
“꿈 아니야. 확인해 봐.”
나직한 목소리가 그윽하게 던져졌다.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내려앉는 기분이다.
까만 눈동자에 시선을 고정한 해주가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날렵한 턱선이 손가락을 따라 그릴 듯 만져지자 심장은 좀 더 거칠게 뛰논다.
“왜 여기 있어요?”
해주의 목소리 끝이 가늘게 떨렸다.
“같이…… 있겠다고 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