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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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학금을 받으려면 축제고 뭐고 도서관에 처박혀야 했는데,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로 그 아이와 잠시 엮였었다.

    하도 말이 없고 조용해서 벽을 대하는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그 당시는 차라리 그런 애라서 편했다.

    하지만 지금 민영의 말을 듣고 보면 그 아이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직접 찾아와서 서빙을 하겠다고 말했다니.

    “기억나지? 걔 완전 못난이였잖아. 그런데 서빙을 하겠다고 해서 집행부가 발칵 뒤집혔거든.”

    그때를 떠올린 민영이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못생겨서 안 된다니까 걔가 하는 말이, 지해주와 같이 하면 되지 않겠냐는 거야. 걔는 예쁘니까 가능하지 않냐고.”

    그녀를 축제 주막촌에 끌어들인 게 황경순, 그 아이였다고?

    “알지? 그 당시 우리 과대가 새언니 좋아했잖아. 그 딱 붙는 셔츠를 고른 것도 과대였거든. 새언니가 그거 입은 모습 보고 싶다고.”

    민영의 말에 해주의 표정이 단단히 굳어 갔다.

    “암튼, 그래서 시켰던 건데.”

    야하기 짝이 없는 옷을 입혀 놓고 낄낄대던 민영이 떠올라 입 안이 깔끄러웠다.

    “근데 세상에, 걔가 웃기게도 새언니를 몰래 사진에 담았던 거 있지?”

    순간 해주의 손에서 티스푼이 툭 떨어졌다.

    “과대가 걔 폰을 뺏었는데, 죄다 언니 사진이었대. 하루 이틀 치가 아니었다나? 되게 섬뜩하지?”

    처음 듣는 이야기다. 그녀를 몰래 사진에 담았다니, 죄다 그녀 사진이었다니. 하루 이틀 치가 아니었다니.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새언니 스토킹하다가 그 사건이 터졌고, 그래서 퇴학했다는 말도 있었어.”

    민영의 말에 해주의 얼굴이 파리하게 굳었다. 그러자 은호가 민영의 말을 막아섰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슬며시 좁혀진 미간이 불쾌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러자 민영의 입매가 얄밉게도 일그러졌다.

    “글쎄?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더라?”

    다시 자몽 셔벗을 떠서 입에 욱여넣은 민영이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지해주, 그러니까 우리 차은호 부회장님 사모님이 대학 때부터 알아주는 팜므파탈이었다고.”

    그러고는 스푼 끝으로 해주를 가리켰다.

    “오빠만 홀린 게 아니라 남녀를 가리지 않고 홀리고 다녔다, 이 이야기지.”

    끔찍한 기분이었다.

    “홍염살은 오빠가 아니라 새언니가 낀 것 같다는 말이야.”

    벌써 8년이 지난 일인데 그날의 기억이 또다시 공포로 다가왔다.

    그때였다. 은호가 그녀의 손을 살며시 감싸 쥐었다.

    해주는 그제야 제 손가락이 파들거리며 떨리고 있었단 사실을 알아챘다.

    “쓸데없는 소리 좀 그만해.”

    은호가 민영을 나무랐다.

    “예쁘고 매력적이니 좋아하는 사람 많았던 거 당연해.”

    민영의 도발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은호가 오히려 서늘한 웃음을 만들어 냈다.

    “그런 식으로 자격지심 드러내는 거, 추하다는 생각 안 들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민영의 저격 저변에는 치졸한 질투가 깔려 있으니까.

    속내를 들킨 민영은 발끈하며 반박했다.

    “오빠는 정말 괜찮다는 이야기야? 같은 여자가 스토킹할 정도였…….”

    “중요한 건 이거지. 그 수많은 사람 중 나를 선택했다는 것.”

    은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해주를 차지한 사람은 나란 이야기야.”

    그러고는 마지막 경고라는 듯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결혼해서 무탈하게 잘 살고 있으니, 더는 그런 이야기로 시끄럽게 굴지 말란 말이야. 알았어?”

    “무탈하게 잘 사는 건 아니지 않니?”

    불쑥 끼어든 것은 민영의 엄마였다.

    “아직 아이가 없으니까.”

    원정의 올케로 한미병원 산부인과 과장이다. 그녀의 시선이 해주에게로 옮겨졌다.

    “해주, 아이는 언제 가질 생각이야? 네 시어머니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던데.”

    그녀의 말에 어린애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인 원정이 서글픈 듯 입술을 삐죽였다.

    그런 원정의 모습에 민영의 엄마가 속상한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병원에 한번 와. 내가 진료해 줄게.”

    그러자 원정이 눈을 반짝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언니가 검사해 주면 되겠네?”

    “그래요, 아가씨. 내가 한번 볼 테니까 해주 병원으로 보내요.”

    “그럴게요.”

    곧 떨어져 나갈 듯 고개를 끄덕인 원정이 해주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해주야. 내일 당장 가 보자.”

    산부인과에서 불임 검사를 하라니.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진 해주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때였다.

    “불임 아닙니다.”

    짜증 섞인 은호의 목소리가 툭 떨어졌다.

    “여태 피임했어요.”

    “뭐?”

    은호의 말에 원정이 경악했다. 피임이라니. 손이 귀한 집안에서 피임이라니.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가 해주를 향했다.

    “해주야, 너 피임했니? 왜?”

    다그치듯 묻는 말에 차마 대답하지 못한 해주는 그저 입술만 하릴없이 달싹일 뿐이다.

    이번에도 원정의 공격을 막아선 것은 은호였다.

    “왜 자꾸 해주보고 그러세요? 내가 그러자고 했어요. 아직은 아이 가질 마음이 없어서요.”

    “은호야, 넌 4대 독자야.”

    “4대 독자이기 이전에 지해주 남편입니다.”

    순간 만찬장이 찬물이라도 끼얹어진 듯 조용해졌다. 은호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강압적이었기 때문이다.

    “나와 해주 사이에 아이가 끼어드는 거, 싫습니다.”

    은호의 발언에 차마 소리를 내뱉지 못한 원정의 입술이 파들거리며 떨렸다.

    “온전히 나만 가지고 싶은데, 내 아내를 아이와 나눠야 합니까?”

    * * *

    “미쳤어.”

    귓등을 빨갛게 물들인 해주가 자동차 유리창에 머리를 박았다.

    은호의 말 몇 마디에 원정의 생일 만찬이 초토화되고 말았다.

    경악한 듯 은호와 해주를 바라보던 민영과 민영의 엄마. 곧 기절할 듯 파들거리던 원정. 한마디 말 없이 그저 묵묵히 지켜보기만 하던 윤규.

    나머지 손님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미쳤어. 차은호.”

    ‘미쳤어.’를 연발하는 해주를 은호가 슬쩍 돌아보았다.

    “안 미쳤어. 다 사실이잖아.”

    “뭐가 사실이에요? 다 거짓말이지.”

    그가 한 모든 말은 계약서를 기반으로 한 연극. 그중에서도 상당히 느끼한 멜로드라마 장르였다.

    “거짓말 아니야.”

    그런데, 뭐? 거짓말이 아니야? 그것부터가 거짓말이잖아.

    “다 거짓말이지 뭐가 거짓말이 아니야. 지나치게 뻔뻔한 거짓말이었잖아요. 내가 맞장구도 못 칠 만큼 낯 뜨겁고 느끼한 거짓말.”

    “여태 너랑 관계하지 않는 걸로 피임했어.”

    은호가 나직한 목소리로 거짓말이 아니었음을 하나씩 짚었다.

    “나와 너 사이에 다른 존재가 끼어드는 거 싫어. 그걸 여태 몰랐다면 넌 정말 둔탱이야.”

    해주가 입술을 꾹 닫았다.

    그랬나? 그랬던 것도 같다.

    심지어 지수와 영화 보러 간 것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듯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창성금융그룹의 며느리로 품위를 유지해야 한다는 계약 조항 때문이었는데…….

    “널 누군가와 나눠 가지는 것도 싫어.”

    은호의 말에 해주의 입술이 스르르 벌어졌다.

    “내가 널 온전히 가지겠다는 게, 잘못이야?”

    * * *

    내가 널 온전히 가지겠다는 게 잘못이야? 그가 한 말이 귓가를 뱅뱅 돌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욕실로 뛰어 들어온 해주는 벌써 1시간째 문을 잠그고 욕조에 앉아 있었다.

    “이건 아니지. 그래, 아닐 거야. 맞아. 아니야.”

    그의 말을 확대해석하는 스스로가 조금은 비참했다.

    은호는 원래 독점욕이 강한 남자였다.

    제가 소유한 것을 남과 나누지 않는다는 것쯤은 은호의 친구들도 이미 다 아는 이야기다.

    그녀 역시 그의 소유물로 남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뜻을 비친 것뿐, 특별할 것 없는 발언이었다.

    그런데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뛰다니.

    미친 건 은호가 아니라 그녀인 모양이다.

    “미쳤어.”

    상념에 빠진 해주가 제 머리를 쥐어뜯는 순간 은호가 욕실 문을 노크했다.

    “지해주, 안 나올 거야?”

    나직한 그의 목소리에 심장이 너울을 넘듯 일렁거렸다.

    “안 나오면 문 부순다?”

    하― 해주가 헛헛한 웃음을 흘렸다.

    부순다면 정말로 부수는 남자이기에 더는 시간을 벌 수도 없다.

    욕조에서 몸을 일으킨 그녀는 선반에 올려 둔 샤워 가운을 끼어 입었다. 허리를 여미며 욕조 밖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 미끌거리는 무언가를 밟은 해주가 비명을 지르며 넘어지고 말았다.

    “꺄아악!”

    * * *

    비명과 함께 쿵 소리가 들렸다.

    문 앞에 서 있던 은호의 미간이 좁혀졌다.

    “해주야?”

    문고리를 잡은 은호가 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그런데도 대답이 없다.

    “지해주!”

    은호의 고함에 거실에서 벽난로를 고치던 사용인이 뛰어 들어왔다.

    “왜 그러세요? 부회장님?”

    마침 그의 손에 망치가 들려 있었다. 당장에 망치를 빼앗은 은호가 문고리를 내리쳤다.

    그렇게 문을 연 은호가 욕실 안으로 뛰어들었다. 하얀 샤워 가운을 입은 해주가 욕실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오돌토돌한 모래색 바닥 위에 붉은 피가 흥건했다.

    “아이고, 사모님.”

    숨조차 내뱉지 못하는 은호의 뒤쪽에서 사용인의 호들갑이 들렸다.

    그 뒤로는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정신을 잃은 해주를 안아 올린 은호가 차에 올랐고, 벽난로를 고치던 사용인이 운전했나. 그래,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연희병원 응급실에서 일반 병실로 해주를 옮기고 나서였다.

    “이만한 일로 입원하지 않아.”

    진우였다.

    진우의 누나가 연희병원 성형외과 의사였기에 부른 건데, 쫑알쫑알 아까부터 되게 신경에 거슬렸다.

    “부러진 곳 없고, 그냥 이마가 조금 찢어진 정도야. 그런데 입원이라니. 심하잖아.”

    대답 없는 은호에게 다시금 힐난이 쏟아졌다.

    “네가 와이프에게 극진한 건 알지만, 이건 오버야. 지나친 오버.”

    “박진우.”

    그의 이름을 부르는 은호의 목소리에 거친 힘이 느껴져 진우가 숨을 죽였다.

    “시끄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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