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65)

21

“해주야.”

그의 목소리에서 그늘이 느껴졌다. 그래서 좀 더 해사한 미소를 지어 보여야 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오늘도 잘할 거니까.”

“뭘?”

“연극이요.”

아무리 이혼을 앞두고 있다지만 계약서의 효력은 아직도 유효하다. 이혼이 마무리되는 순간까지 계약서의 일점일획도 빠뜨리지 않고 이행할 생각이다.

“당신 가족들, 친척들 앞에서 좋은 아내, 좋은 며느리 역할, 잘할게요.”

차은호의 진짜 아내가 될 수는 없겠지만, 최고의 파트너로는 기억되고 싶으니까.

“지해주.”

하지만 해주의 그런 대답이 은호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 마.”

걸음을 멈춘 은호가 그녀를 똑바로 마주했다.

“내가 말했잖아.”

눈빛만큼 어둑해진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녀의 손을 감싸 쥔 그의 손 역시 힘이 잔뜩 들어갔다.

“방어권이 발동될 동안 계약 조항은 의미 없다고.”

찐득하게 그녀를 담아내는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해주는 숨을 죽였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참지 마.”

이상하게도 그가 쏟아 내는 말에 감정이 담긴 듯 느껴진다.

“웃고 싶으면 웃고, 화내고 싶으면 화내. 더는 계약서에 얽매이지 말라는 말이야.”

차은호의 말에 이런 종류의 감정이 느껴진다니.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다.

마치, 이건 마치…….

그녀 때문에 애가 타는 듯 느껴지잖아.

무감, 무정, 무심.

지난 3년,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이 세 가지 요소에 의해 지배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관계 위에 책임과 의무를 덧씌워 지금껏 무탈하게 지내 온 거였다.

그래서 해주는 그 3년이 지독히도 고통스러웠다. 가슴 가득 품은 감정을 끊임없이 비워 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후계자를 얻기 위해 이런 식으로 감정을 이용하다니. 반칙이다.

“그럼 이혼해요, 우리.”

원하는 대로 하라니, 하고 싶은 대로 하라니. 그럼 이혼해 주면 되잖아. 그럼 다 되는 거잖아.

해주의 눈동자가 처연하게 반짝거렸다.

“그건 안 돼.”

“원하는 대로 하라면서요. 내가 원하는 건 이혼이에요.”

비워 내는 데 익숙해진 해주는 아무리 노력해도 비워 낼 수 없는 최근의 사건들이 무척이나 고달팠다. 그래서 더더욱 이혼이 간절해졌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은호가 무심한 대답을 내놓았다.

“98일 뒤에. 그때 이혼해.”

아까와는 달리 그는 그 어느 때보다 무정한 눈빛이었다. 어쩌면 이쪽이 차은호 본연의 모습일 것이다.

“적어도 그때까지 네 98일은 내 것이니까.”

그러면서 그녀의 시간까지 소유하려 하다니. 해주의 담갈색 눈동자가 원망을 품고 은호를 담아냈다. 그러자 그의 무심한 얼굴에 이채가 어렸다.

“그동안 넌 하나만 생각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그가 한쪽 입술을 말아 올리더니 몹시도 매혹적인 미소를 그려 냈다.

“내 유혹을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여자를 싫어하면서, 여자라면 끔찍하다면서. 특히 그를 육체적으로 탐하는 여자를 경멸한다면서,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어젯밤 그녀가 얼마나 추잡하게 그를 탐했는데, 왜 싫어하지 않는 건데? 차곡차곡 쌓아 뒀던 3년 치 욕망을 드러냈는데, 왜 그녀를 밀어내지 않는 건데?

설마, 설마 차은호가 그녀를…… 조금은 다르게 생각하나?

“은호 씨…….”

물어보려 했다. 내가 그래도 조금은 특별하기는 하냐고. 비즈니스 파트너, 그 이상의 의미는 되는 거냐고.

하지만 물을 수 없었다.

“은호 왔니?”

현관문을 열고 원정이 밖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싸늘한 눈빛의 원정이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왔으면 얼른 들어오지, 뭐 하고 있어?”

평소의 환한 미소와 살가운 목소리는 찾을 수 없고, 대신 불편한 심기가 얼굴 가득 드러나 있었다.

그런 원정을 향해 해주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어머니, 생신 축하드려요.”

“앵무새니? 아침에 통화하면서 이미 축하했잖아.”

뾰족한 말투에 찬기가 어리자 얼음 가시가 심장에 박히는 느낌이다.

당황한 해주가 뭐라고 다음 말을 이을 새도 없이 원정이 그녀를 비켜섰다. 그러고는 평소 그녀에게 보여 주던 해사한 미소를 얼굴 가득 머금었다.

“경은 씨?”

다정한 목소리다.

“경은 씨도 얼른 들어와. 이제 곧 식사 시작할 거야.”

그러자 계단 아래쪽에 서 있던 경은이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사모님.”

원정의 다정한 미소와 돌계단을 두드리는 경쾌한 발소리. 이 두 가지가 어우러지며 해주의 심장을 거칠게 옥죄어 왔다.

그때였다.

“맛있게 드세요.”

무심한 인사말을 툭― 던진 은호가 해주를 제 곁으로 바짝 붙여 세웠다.

놀란 원정의 눈이 커다래졌다.

“뭐?”

“해주 데리고 이만 가 볼게요.”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가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뚜렷하게 알 수 있었다.

“은호야.”

제 아들의 목소리에 담긴 노기를 놓치지 않은 원정이 발끈하며 소리쳤다.

“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엄마 생일이라는 거 몰라?”

“어머니야말로 무슨 짓입니까?”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듯 평소보다 낮아진 목소리가 늦가을이 내린 정원을 스산하게 울렸다.

“해주가 누구인지 모르세요?”

감정을 담지 않은 까만 눈동자가 차갑게 번뜩이자 찬 서리라도 맞은 듯 원정이 어깨를 움찔했다.

“내 아내예요.”

“너, 너 지금, 지금 나한테 이러…….”

아무리 그래도 엄마인 것을. 이런 식으로 대할 수는 없잖아. 어느새 눈가에 눈물이 고인 원정이 울먹였다.

하지만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은호가 말을 이었다.

“그 누구도 내 여자를 이런 식으로 대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어머니라고 할지라도요.”

불쾌함을 노골적으로 흘린 은호가 해주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가자.”

그러고는 곧장 등을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그런 제 아들의 모습에 기함한 원정이 고함을 바락 질렀다.

“차은호!”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바들거리며 떠는 원정을 돌아본 해주가 은호의 손을 뿌리쳤다.

“이러지 말아요, 은호 씨.”

잘게 고개를 저은 해주가 은호의 곁을 떠나 원정에게 다가갔다.

“죄송해요, 어머니.”

원정의 어깨를 감싸며 사과하자 금세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쟤 왜 저러니?”

상처받은 얼굴로 은호를 가리킨 원정이 해주에게 따져 물었다.

“네가 말해 봐. 내가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니?”

“아니에요, 어머니. 제가 다 잘못했어요.”

순간, 자괴감이 들었다.

변덕 심하고 조금은 어린애 같은 원정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지난 3년을 이런 식으로 살아왔다.

계약에 의한 것이었기에 힘들지 않았다. 그저 대본대로 움직이는 배우처럼 상황에 맞게 연기한 것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이것조차 쉽지 않다.

“그러니까 노여워 마세요. 네?”

쉽지 않은데, 분명 쉽지 않은데. 이미 길든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고 만다.

“어서 들어가세요. 추워요.”

생긋 미소 짓는 해주의 얼굴에 씁쓸함이 조금 정도 깃들었다.

* * *

해주가 가장 어려워하는 연례행사가 원정의 생일 만찬이었다.

생일 만찬에는 원정의 친정 식구들이 참석하는데, 그중에는 그녀의 선배이자 은호의 외사촌 여동생인 민영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민영, 두 사람의 만남에 계기를 제공한 인물이자 두 사람의 결혼을 가장 크게 반대했던 사람.

여전히 해주를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틈만 나면 그녀를 공격하는 저격수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민영은 해주를 향해 독화살을 스스럼없이 당겼다.

“다들 그거 알아요?”

막 디저트가 나왔을 때다.

“오빠랑 새언니가 처음 만난 게 대학 축제에서였는데, 그날 새언니가 술 서빙을 했거든?”

집안 어른의 생일 만찬에서 하기에 적절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자몽 셔벗을 한술 뜨던 해주가 움직임을 멈췄다.

“거기 얽힌 재밌는 이야기가 있는데, 오빠도 모르지?”

은호의 한쪽 눈썹이 불쾌한 듯 일그러졌지만, 민영은 개의치 않았다.

“그 술 서빙이라는 게 말이야, 보통 힘든 게 아니잖아? 그래서 지원자가 아무도 없어서 집행부인 내가 머리가 좀 아팠거든.”

자몽 셔벗 한 스푼을 입에 넣은 민영이 해주를 바라보았다.

“근데, 걔 있잖아.”

갑자기 걔라니? 해주가 입술 끝에 힘을 꾹 주었다.

“새언니 동기였던 황순경 말이야. 얼굴 없는 걔.”

황순경? 얼굴 없는 걔라니.

당최 누구를 가리키는지 몰라서 해주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기억 안 나? 푸스스한 머리카락으로 얼굴 다 가리고는 두툼한 안경 끼고 다녔던 못난이.”

아― 맞아. 옛 기억을 떠올린 해주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잊고 지냈던 옛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걔 이름이 황순경은 아니었는데?

“황경순…… 아니었어요?”

“황경순이었어? 다들 황순경이라 그러기에 순경인 줄 알았지.”

민영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황경순. 해주 역시 기억하고 있다.

민영의 말대로 얼굴을 죄다 가리고 다녀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목소리만큼은 선명하게 기억한다.

얼굴 없는 동기, 황순경, 조현병 환자, 미친년.

그 아이를 상징하는 별명이 하나씩 늘어나고 결국 한국대학교 경영학과의 대표 왕따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2학년 여름방학. 결국 경순은 학교를 자퇴했다.

그런데 갑자기 걔는 왜?

“걔가 집행부로 찾아와서는 웃기게도 지가 서빙을 하겠다는 거야.”

2학년 때의 학교 축제를 떠올려 보았다.

집행부였던 민영이 찾아와 그녀에게 강제로 서빙을 명령했다.

[지해주, 이번 축제 서빙은 네가 맡아. 짝꿍 하나 배정되었으니까 도망가지 말란 말이야.]

남자 선배들이 죄다 서빙으로 그녀를 지목했다고 했다. 그러고는 그녀에게 파트너라며 그 아이를 던지듯 내주었다.

[건방지게 이번에도 거절해 봐. 내가 인맥 다 동원해서 네 앞길 막을 테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