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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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요하게 흔들리는 벤치에 등을 기대앉은 그는 눈꺼풀을 내린 채였다.

    검고 깊은 호수를 닮은 눈동자. 그 오묘한 존재를 감춘 속눈썹이 반듯한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짙은 눈썹과 오만하게 올라선 콧날, 고집스레 다물린 입술.

    먹색에 가까운 슈트에 맨 암녹색 넥타이가 그의 입술을 더욱 붉고 탐스럽게 보이게 만드는 모양이다.

    “하―”

    입술을 눈에 담는 순간 저도 모르게 한숨이 터져 나왔다.

    저 입술이 키스를 얼마나 야하게 하는지 누가 알까. 아니, 키스만 야하게 할까? 저 요물 같은 입술이 그녀의 몸을 구석구석 잘도 누볐다.

    손바닥에 땀이 고인 해주가 스커트 자락에 손을 비볐다.

    그때였다. 그녀의 기척을 느낀 걸까. 은호의 눈꺼풀이 느른하게 열렸다.

    검은 눈동자에 빛이 들어 호박색이 살짝 덧입혀진 순간 붉은 입술이 움직였다.

    “안녕, 달링?”

    안녕, 달링.

    별것 없는 단어였다. 지금껏 수십 번도 더 들은 말이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미칠 듯이 심장이 간질거린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아무도 없는데, 웬 연기? 그냥 평소처럼 해요.”

    널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부러 까칠하게 답했다. 그러자 은호의 붉은 입술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휘었다.

    “내가 말했잖아. 백 일간 진짜 부부처럼 살 거라고.”

    은호가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젠 이게 평소 모습이 될 거야.”

    그러고는 그녀의 손을 가져갔다. 마치 정말로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듯, 손가락 끝에 지그시 입술을 눌렀다.

    “남자 대 여자로. 잘해 보자고, 달링.”

    전기라도 통한 듯 손끝이 찌릿했다.

    뜨겁고 말랑한 입술이 손마디를 누비자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오소소 돋아난다.

    “이, 이러지 말아요.”

    손을 빼내려 했지만,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하여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었다.

    “차은호 씨는 나한테 남자가 아니니까.”

    “거짓말.”

    미치도록 남자인 그가 너무나 쉽게 진실을 간파했다.

    “흠뻑 젖어서는 애원했으면서.”

    흐, 흠뻑 젖어? 거기다 애원까지 했다니.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당황한 눈동자가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재미있는지, 은호의 미소가 짙어졌다.

    이렇게 말려들면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홍……염살, 홍염살 때문이에요.”

    결국, 해주는 그의 홍염살을 핑계로 내세웠다.

    “나라고 뭐 별수 있겠어요? 나도 여자인데?”

    그녀가 다른 여자들과는 달리 그의 홍염살에 흔들리지 않아 파트너로 선택한 거랬는데, 정말이지 궁색한 변명이 아닐 수 없었다.

    “은호 씨의 그 지독한 살에 당한 거라고요. 하지만 이젠…….”

    궁색하지만, 그래도 제법 그럴듯한 핑계가 되기는 한 모양이다.

    “절대 당하지 않을 거라고요.”

    은호의 얼굴에서 미소가 흩어졌다.

    “내 홍염살 때문이다?”

    “다, 당연하죠.”

    “음―”

    얼굴에서 웃음기를 완전히 걷어 낸 그가 미간을 좁히며 잠시 생각했다.

    그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윽고 한층 밝은 미소가 얼굴 가득 드리워졌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 홍염살이 고맙네.”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었다.

    “얼음 같은 내 아내까지 녹여 주니까.”

    다른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녀를 경멸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의외의 반응에 오히려 당황스러울 뿐이다.

    “바쁘니까 할 말이나 얼른 해요. 이야기할 게 있다면서요.”

    애써 감정을 숨긴 해주가 볼통하게 다그치자 그녀의 손을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런 것 없어.”

    짧게 대답한 그가 그녀를 힘껏 잡아당겼다. 그러자 속수무책으로 끌려가서는 그와 몸이 부닥쳤다.

    “얼굴 보고 싶어서 불렀어.”

    내려다보는 눈빛이 그윽하고도 달콤했다.

    “아침에 그러고는 제대로 얼굴 못 봤잖아.”

    해주는 차마 들이마셨던 숨을 내뱉지 못한 채 움직임을 멈췄다. 그녀를 둘러싼 공기마저 침묵하는 듯 느껴졌다. 아까부터 속수무책으로 덜컹거리는 심장만이 제 존재감을 뾰족하게 드러낼 뿐이다.

    “그리고, 어제 하던 것도 마저 해야지.”

    “……마저 하다니 뭘?”

    놀란 해주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그녀를 아주 재밌다는 듯 바라본 은호가 달콤하게 속삭였다.

    “오늘, H호텔 스위트 예약할까? 우리 신혼여행 갔던 곳인데.”

    농담인 듯 진담 같은 말에 해주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게 무슨 신혼여행이에요. 그냥 사람들 눈 속이기 위해서…….”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사실에 생각이 닿았다.

    “잠깐만.”

    어젯밤에 하던 걸 마저 하자니?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해주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어젯밤에 우리…… 안 했어요?”

    그러자 은호의 미간이 바짝 좁혀졌다.

    “기억 안 나?”

    안 난다. 결정적인 순간이 기억나지 않는다. 하여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안 했어.”

    아주 잠깐이었지만, 은호의 얼굴에 쓴웃음이 비쳤다 사라졌다.

    “해 달라고 애원해서 할까도 싶었는데, 직전에 멈췄어. 술 취한 널 안을 마음은 없거든.”

    안 했어? 발가벗은 채 그토록 야한 키스를 나눴는데 직전에 멈췄다니. 믿을 수 없다. 게다가 아침에 일어났을 때, 몸의 감각이 달랐는데 안 했다니. 거짓말.

    “아니야. 그렇다기에는 너무나 느낌이…….”

    뻐근하게 아린단 말이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한 해주가 뒤를 흐리자 은호의 얼굴에 조금은 사악하다 싶은 미소가 깃들었다.

    “만지긴 했어.”

    마, 마, 만졌다니. 뭘?

    소리를 만들어 내지 못한 질문이 벌어진 입술 사이로 한숨처럼 터져 나왔다.

    “만져 달라고 했잖아.”

    지금 뭐라는 거야.

    “더 깊게 만지라고…….”

    “그만!”

    비명처럼 소리를 내지른 해주가 두 손으로 은호의 입술을 막았다.

    “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해주가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 * *

    평창동으로 향하는 차 안.

    해주가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내가 너랑 결혼해서 얻게 되는 것 중 가장 좋은 게 뭔지 알아?]

    결혼을 앞둔 어느 날 은호가 던진 말이다. 그 질문에 깊은 생각도 없이 답을 내놓았다.

    [창성의 후계자 자리 아닌가요?]

    [아니, 다른 여자들이 함부로 내 몸에 손댈 수 없다는 것. 임자 있는 몸이니까.]

    그리고 이어진 은호의 말에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내심 상처받았다.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것이 여자가 내 몸을 만지는 거야. 내게 다른 마음을 품는 거고 말이야.]

    마른침이 절로 넘어갔지만, 태연하게 웃으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넌 내 최고의 방어막이지.]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앞으로 어떤 마음으로 이 남자의 곁을 지켜야 할지 말이다.

    [감히 아내 있는 남자를 함부로 탐하지는 않을 거잖아?]

    [그 아내가 세면 셀수록 좋겠군요. 무서워서라도 접근하지 않을 거니까.]

    [맞아.]

    [걱정하지 말아요, 차은호 씨.]

    그래서 호기롭게 말했다.

    [최고의 방패가 되어 드리죠.]

    방패 주제에 그를 탐해 버린 추악한 여자가 될 줄 모르고 한 말이었다.

    “미쳤어.”

    차창에 머리를 콩 찍은 해주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 순간 그녀를 태운 차가 평창동 대문 앞에 멈춰 섰다.

    “그런다고 없던 일이 되진 않아.”

    운전대를 잡은 은호가 주차를 마치고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기다란 손가락이 그녀의 턱 끝에 닿았다.

    “그러니까 지금부터는 우리 사이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 보도록 해.”

    평소와 다름없는 눈빛이건만 묘하게 열기가 느껴지는 건 착각일 것이다.

    “좋은 답을 내놓으면, 어젯밤에 애원하던 그거, 해 줄게. 마음껏.”

    낯 뜨거운 말을 대수롭지 않게 던지는 은호에게 경악하며 해주가 얼른 차에서 내렸다.

    도망치듯 대문 앞에 다다른 해주가 초인종을 누르려 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벨을 누르기도 전에 대문이 열렸다.

    놀란 해주가 안으로 들어가자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존재가 그녀를 반겨 주었다.

    “어서 오세요, 지해주 본부장님.”

    그 여자다.

    그녀와 똑같은 은색 뉴비틀의 주인. 그리고 스캔들 속 주인공.

    더 기가 막힌 것은 지금 이 상황이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는 듯 느껴진다는 거였다.

    엇비슷한 키, 똑같은 머리 스타일, 같은 디자인의 옷과 눈꼬리를 위로 살짝 올린 화장법까지.

    지수의 말처럼 데칼코마니를 마주한 듯 묘한 기분마저 들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비서실 박경은이라고 해요.”

    물론, 디테일한 것은 달랐다.

    화장으로 묘하게 닮아 보이게 만들었지, 우선 얼굴 생김이 다르다. 저쪽이 좀 더 크고 화려한 스타일이다.

    옷이나 구두 같은 경우는 해주가 선호하는 디자이너 브랜드로 비슷한 디자인에 색만 조금씩 달리했다.

    순간 섬뜩한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그때였다. 따듯한 온기가 그녀의 몸을 포근히 감쌌다.

    “안 들어가고 뭐 해?”

    은호였다.

    당황한 해주가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그의 손이 그녀의 손을 뜨겁게 감쌌다.

    “가자.”

    여자를 완벽히 무시한 은호가 해주를 데리고 계단을 올랐다.

    “은호 씨, 저 여자…… 그 여자.”

    해주가 뒤를 흘끔 돌아보며 은호의 손을 잡아당겼다.

    “어머니가 저 여자도 초대했나 봐요.”

    “응? 누구를?”

    그제야 뒤를 돌아본 은호가 미간을 좁혔다. 이제야 여자의 존재를 알아본 모양이다.

    그 모습이 지극히 차은호다워서 실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거 알아요?”

    “뭘?”

    “내가 불임이라서 저 여자를 새 며느리로 들일 거라고 소문난 거.”

    은호의 미간이 조금 전보다 한층 더 비좁아졌다.

    “그날 당신 차 안에 저 여자를 집어넣은 것도 어머니래요.”

    “아니라고 했잖아.”

    “알아요.”

    아니라는 건 안다. 아니, 아니라고 말하는 은호를 믿는다.

    “소문이 그렇다는 거지.”

    하지만 일반적인 소문이 아니라는 것 역시 알고 있다. 누군가 지독히도 악의적으로 만들어 낸 소문이고, 그 기저에서 불순한 의도가 느껴져 소름이 끼칠 뿐이다.

    저도 모르게 어깨를 떤 해주가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러자 은호의 눈빛이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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