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65)

19

정명여고 돌깡패 이지수.

여고 시절 지수의 별명이었다.

깡마른 몸에 힘은 또 왜 그렇게 센지, 지수의 힘을 이기지 못한 해주가 마지못해 직원 식당으로 발을 들였다.

웅성거리던 식당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이럴 줄 알고 오지 않겠다고 한 건데.

굳은 얼굴을 애써 풀어 내린 해주가 엷게 미소 지으며 식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눈인사를 건네 왔다.

살포시 웃으며 마주 인사한 해주가 가급적 사람들을 바라보지 않은 채 식판에 음식을 담았다.

그녀를 측은하게 바라보는 시선들이 싫었다. 그녀 나이 열아홉, 장례식장을 찾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던지던 눈빛이다.

[저 어린 것이 부모 없이 어찌 사누.]

고등학교 3학년 가을이었고, 수능이 코앞이었다. 부모를 잃었음에도 장학금을 받고 명문대에 들어가자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독한 것 봐. 지 부모 그렇게 비명횡사했는데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더니, 징글징글할 정도로 이기적인 애야.]

측은한 눈빛은 관심으로, 관심은 이내 비난이 되어 그녀를 모질게도 후벼 팠다.

지금은 그녀를 이토록 가엽게 바라보지만,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대중 앞에서 해주는 그저 숨죽일 뿐이었다.

햄버그스테이크 정식을 받아 든 해주가 구석 자리로 걸음을 바삐 옮겼다.

그때였다. 그녀 앞을 시커먼 그림자가 막아섰다. 그 바람에 식판에 받아 든 수프가 출렁이며 조금 넘쳤다.

당황한 해주가 고개를 들기도 전에 목소리 하나가 뚝 떨어졌다.

“지해주 본부장?”

은호였다.

조명을 등지고 있어서일까. 까만 눈동자가 평소보다 서늘한 빛을 발하고 있다. 하지만 마냥 차갑지만은 않다니 웃기는 일이다.

차가움 속에 담긴 열기가 밤새 있었던 일을 떠올리게 했다.

블라우스 단추를 끄르는 그녀를 타는 듯한 시선으로 담아내던 차은호.

순간, 얼굴에 열이 몰린 해주가 떨리는 마음을 감추기 위해 얼른 시선을 내렸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그녀의 행동에 은호의 입술이 비스듬히 휘었다. 그는 이 상황이 퍽 즐거운 모양이다.

목소리에 웃음기가 어렸다.

“이제 점심 먹어요?”

평소보다 몇 배는 다정한 목소리였다. 아마도 자신의 스캔들과 두 사람의 불화설을 일축하기 위한 연기이리라.

그에게 장단 맞춰 살포시 미소 지은 해주가 간신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네.”

가만히 대답하자 은호의 까만 눈동자가 좀 더 그윽해졌다.

“많이 먹어. 오늘 수프가 맛있었어. 당신 좋아하는 토마토 수프잖아.”

토마토 수프를 좋아하기는 한다. 하지만 한 번도 그런 말을 꺼낸 적 없는데, 어떻게 아는 거지?

“……많이 먹을게요.”

조금은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한 해주가 이내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의 계약 아내로, 비즈니스 파트너로, 지금은 가면을 써야 할 때였다. 계약서대로, 둘 사이에는 그 어떤 문제도 없다는 것을 보여 줘야 한다.

“부회장님은 다 드셨어요?”

“난 먹었지. 벌써 1시잖아.”

“아쉽네요. 일찍 올걸.”

정말로 아쉽다는 듯 콧잔등을 찌푸린 해주가 애교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순간, 자괴감이 들었다.

지금 그녀는 은호와 냉전 중이다. 아니, 어젯밤의 일로 서로가 서로에게 꽤나 어색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 연극을 해야 하다니.

접시 물에 코를 박고 싶은 심정이다.

“당신이 올 줄 알았으면 기다렸다가 같이 먹는 건데. 아쉽네.”

다정하게 그녀의 말을 받아친 은호가 가까운 테이블에서 의자 하나를 뺐다.

단순한 제스처 하나로 그저 평범하기만 하던 직원 식당이 고급 레스토랑으로 돌변하는 듯했다.

“앉아.”

짧은 명령에 선뜻 다가선 해주가 우아하게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은호가 슬며시 의자를 밀어 넣어 주었다.

그런 두 사람을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던 지수가 한 템포 늦게 자리에 앉았다.

어젯밤 그 난리를 치고, 조금 전만 해도 곧 죽을 것처럼 굴던 해주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듯 행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지수에게 대수롭지 않은 듯 시선을 흘린 은호가 해주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나직하게 말했다.

“지해주 본부장, 점심 다 먹고, 옥상정원으로 좀 와요. 할 이야기가 있어.”

어느덧 입술이 귓바퀴에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뜨거운 숨결과 함께 그녀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도망가기만 해.”

* * *

식당을 빠져나온 은호는 곧장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가 옥상정원에 나타나자 짬을 즐기던 직원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물렸다.

창성금융그룹 본사 옥상정원.

계약과 동시에 해주를 창성에 입사시킨 은호는 이곳에서 해주와 보여 주기식 데이트를 즐겼다.

같이 커피를 마시고, 손을 잡고, 서로를 눈에 담으며 웃었다. 사랑에 빠진 연기, 그 아슬아슬하고도 가증스러운 연기를 둘 다 제법 잘 해냈다.

“연기……였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 은호가 늘 앉던 벤치로 다가가 느릿하게 자리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 올라와 보는 것도 결혼식 이후 처음이다.

계약에서 약혼까지 한 달, 약혼에서 결혼까지 다시 한 달.

약 두 달의 시간, 이곳을 무대 삼아 완벽한 사기극을 꾸몄다. 그리고 해주는 그 완벽한 사기극의 깜찍한 공모자가 되어 주었다.

“그런데 뭐? 도망을 가?”

어젯밤 해주가 한 말이 떠올랐다.

술에 취해서는 속 이야기를 잘도 술술 털어놓았다.

[너무 좋아서, 못 떠나게 될까 봐.]

그리고 또 뭐라고 했더라.

느른한 몸짓으로 옷을 벗어 내며 한 말이라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당신은 당신 꿈을 이뤘고, 난 내 꿈을 이뤘으니 목표 달성인 건가? 그럼 이 연극에서 이제 물러나도 되겠네요?]

[왜? 도망이라도 가게?]

[응. 도망갈래요. 차은호 옆에 더 있다가는 내가 말라 죽겠어.]

몹시도 쓰라린 말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아프지 않았다. 마지막 껍질까지 몽땅 벗어 던진 해주가 태초의 모습으로 입술을 겹쳐 왔기 때문이다.

“하― 사람 미치게 만들어 놓고 저만 평온하지.”

벤치에 등을 기댄 은호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움직이며 그의 목을 끌어안던 해주가 떠올랐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그의 무릎에 올라와서는 입술을 겹쳤다. 그리고 가느다란 손이 목덜미를 파고들었지.

그런 그녀를 어떻게 했더라.

키스에 열을 올리느라 제대로 기억나지 않지만, 마음껏 만졌다.

가느다란 허리와 납작한 배를 시작으로 아름다운 몸의 곡선을 따라 손을 놀렸다. 커다란 손에 터질 듯 들어오는 그녀를 거칠게 다룰 수밖에 없었다.

지난 3년간 묵혀 두었던 욕망이 저급한 욕심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그때였다.

어젯밤, 그리고 새벽, 아니, 오늘 아침에도.

그의 심장을 흔들어 놓던 달콤한 향기가 바람결에 스쳤다.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하얀 블라우스에 연보라 브이넥 니트, 회색 스커트를 단아하게 입은 그의 아내가 눈앞에 서 있었다.

조금 전까지는 발가벗은 채 그의 머릿속을 헤집더니, 어느새 요조숙녀가 되어 그를 쏘아보고 있다.

그 극단적인 차이에 입술을 가르고 웃음이 흘렀다.

“안녕, 달링.”

이제는 정말 놓아줄 수 없을 것 같다.

* * *

밥은 먹는 둥 마는 둥. 해주가 식당을 빠져나왔다. 지수의 의심 어린 시선을 감당하기가 버거웠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렇게 죽겠다며 난리를 쳐 놓고선 생글거리며 안면을 바꿨으니. 눈치 빠른 지수가 의아해하는 것은 당연하다.

엘리베이터에 오른 해주가 16층 버튼을 눌렀다. 고속 엘리베이터답게 빠른 속도로 숫자를 더하자 이상할 정도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할 이야기가 있다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슬며시 두려움이 일었다.

어쩌면 오늘 아침에 못다 한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자 발아래가 무너지는 듯 난감함이 밀려왔다.

“미쳤어. 진짜.”

아무리 술에 취했었다지만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3년 동안 꼭꼭 숨겨 둔 욕망을 그런 식으로 드러내다니.

해주가 머리를 엘리베이터 벽에 쿵― 하고 찧었다.

“아무리 진짜 부부처럼 살자고 했어도 어떻게 먼저 그렇게…….”

옷을 벗고 덤벼들어. 덤벼들긴.

“그리고, 진짜 부부 어쩌고 하면서 붙드는 이유가 결국 편한 여자에게서 편하게 후계를 보겠다는 건데, 그런 식으로 장단을 맞춰? 넌 배알도 없어?”

또다시 머리를 찧었다.

게다가 그녀가 넘어갈 때까지 유혹하겠다고 선언한 건 은호인데, 외려 제가 옷을 벗고 설쳐 댔으니. 안 그래도 바닥이던 자존심이 지구 외핵을 뚫고 들어가는 기분이다.

“안 돼. 더는 차은호에게 말려들면 안 되는 거야. 결국 지독하게 상처받고…….”

버려질 거야.

차마 뒷말을 뱉지 못한 해주는 16에서 숫자를 멈춘 계기판을 바라보며 다짐에 다짐을 더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옥상정원으로 나가는 유리문 너머에서 햇살이 뽀얗게 흘러들고 있었다.

지난 3년, 거의 매일 올라와 커피 타임을 갖곤 했던 그녀의 안식처이건만 오늘따라 낯선 기분이 든다. 그건 아마도 차은호, 그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3년 전에는 이렇게 옥상 층에 발을 들이며 무척이나 설렜던 기억이 난다.

두 손으로 머리를 빗어 내리고, 매무새를 정리한 다음 떨리는 마음으로 은호에게 다가섰었지.

아랫입술을 꼭 깨문 해주가 오래전 두 사람의 연극 무대가 되어 주었던 옥상정원으로 발을 들였다.

정원의 어디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걸음은 자연히 그가 있을 곳으로 향했다. 오른쪽으로 돌아 스무 걸음, 화단을 지나면 나오는 자판기. 그리고 그 곁의 흔들벤치.

그곳에 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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