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65)

18

“요, 요, 요망한 인간이 말이야. 사람을 아주 우습게 만드는 거 있지.”

술에 취해 발음이 뭉개지면서도 또박또박 말을 뱉으려 애쓰는 모습이 가련했다.

차은호 앞에서는 결코 무너질 수 없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내가 반드시 이 인간 눈에서 피눈물을 뽑게 할 거야. 아주.”

어금니를 악물고 으름장을 놓았건만, 은호는 그저 픽― 웃을 따름이다.

“그렇게 해. 네 뜻대로 하라고. 할 수 있으면 말이야.”

분명 차가운 웃음인데, 어쩐지 조금은 허탈해 보이기도 했다. 지친 듯 보이기도 하고 말이다.

“이지수 팀장은 그만 돌아가요.”

미소를 지운 은호가 서늘한 눈빛으로 지수를 바라보았다.

그런 은호를 마주 보며 잠시 머뭇거린 지수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부회장님, 제가 감히 한 말씀만 드려도 될까요?”

그냥 조용히 사라질 생각이었는데, 없던 오지랖이 발동한 모양이다.

“해주, 부회장님 많이 좋아해요. 아니, 부회장님이 세상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천애 고아인 해주의 유일한 가족. 그리고 첫사랑이자 남편.

심장이 돌로 만들어졌을 거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만큼 모든 것에 심드렁한 해주가 유일하게 관심을 가진 존재. 아니, 유일하게 마음을 빼앗긴 존재.

그게 차은호 당신이라는 걸 부디 알아줬으면.

“부회장님 스캔들, 해주에게는 상당히 충격이었을 거예요.”

세상이 무너진 기분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이렇게 엉망으로 망가졌겠지.

“당연히 그 소문이 엉터리라고 믿으니까 이 정도로 말씀드리는 거고요.”

그러니 제발,

“해주 울리지 마세요. 불쌍한 아이예요. 아시잖아요.”

어느덧 지수의 눈시울이 빨개져 있었다.

그런 지수를 여전히 서늘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은호가 무감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 팀장, 그만 가요.”

알았다느니, 걱정하지 말라느니.

그런 대답을 기대했는데, 싸늘한 인사를 던질 뿐이다.

“수고 많았어요.”

* * *

지수가 돌아가고 나자 은호가 해주 옆에 자리했다.

테이블에 머리를 올린 채 잠들어 버린 해주를 황당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술이라고는 맥주 한 잔, 와인 반 잔이 한계인 것을. 왜 안 하던 짓을 하는지.

그의 키스 때문일까, 아니면 스캔들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미국행 티켓 때문일까.

“차은호, 미워.”

잠결에 흘리는 말에도 심장이 아프다.

“나도 너 미워.”

테이블에 엎드린 해주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자그마한 머리통이 동그랗게 손에 잡혔다. 그러자 낮에 한 키스가 떠오른다.

목덜미로 손을 넣어서는 이 자그마한 머리통을 끌어당겼었지. 이 여자를 잡아먹고 싶어서.

그러자 더없이 해주가 얄미워졌다.

“일어나, 지해주.”

제삼자 앞에서 이혼을 거론한 죄를 물어야 할까. 아니면 술에 취해 창성의 며느리가 지녀야 할 우아함을 지키지 못한 죄를 물어야 할까.

이도 저도 아니면, 그와의 결혼에 종지부를 찍으려 드는 괘씸한 죄를 물을까.

결 좋은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휘저은 은호가 한숨을 토하듯 나직이 말했다.

“집에 가자.”

그러자 무겁게 내려앉았던 해주의 눈꺼풀이 힘겹게 올라섰다.

“못 가.”

곧 울 듯한 목소리다. 이럴 때는 꼭 투정 부리는 아이 같다.

“왜 못 가?”

그의 물음에 말간 갈색 눈동자에 물기가 어렸다. 그러더니 기어코 머리를 들어 올린다.

힘겹게 자세를 고쳐 앉은 해주가 은호를 빤히 쳐다보았다.

“차은호가 또 키스할까 봐.”

하― 은호의 입술을 가르고 헛헛한 웃음이 흘렀다. 키스할까 봐 집에 갈 수 없다니, 도대체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해.

“그렇게 싫었어?”

목구멍 언저리가 조이듯 빠듯했다. 손가락을 넣어 넥타이를 느슨하게 푼 은호가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도톰한 입술이 쉽게 대답을 주지 않고 달싹거린다. 짧지 않은 시간이 흘러서야 입술이 열렸다.

“아니.”

“그럼?”

느릿하게 대답하는 그녀에게 다그쳐 묻자 조그마한 목소리가 한숨처럼 번졌다.

“좋아서.”

해주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의 넥타이 끝에 닿았다.

“너무 좋아서, 못 떠나게 될까 봐.”

물기 어린 눈으로 그의 남색 넥타이를 만지작거리더니 기어코 넥타이를 풀어냈다. 그 손길이 조금은 야하게 느껴져 은호의 턱이 단단히 굳었다.

“너 정말.”

술에 취해 저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는 모양이다.

“너야말로 내가 우습지?”

“응, 우스워. 당신도 그러는데 나라고 못 해?”

풀어낸 넥타이를 바닥에 떨어뜨린 해주가 그의 목덜미를 살며시 어루만졌다.

“너 정말 낯설다, 지해주.”

“낯설 수밖에. 여긴 자메뷰(jamais vu)잖아.”

그러고는 입술이 살며시 맞물렸다.

* * *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고통스럽게 몸을 뒤척이던 해주가 불현듯 눈꺼풀을 반짝 들어 올렸다.

“뭐야?”

이상한 일이었다. 생경한 감각이 온몸을 넘실거리며 휘감는 느낌이다.

입술은 물집이라도 잡힌 듯 아리고, 목덜미도, 가슴도, 심지어 거기도…….

순간 해주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온몸이 허전하다. 이상한 예감에 가슴으로 슬그머니 손을 가져간 해주는 절망하고 말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완전 누드 상태. 이런 상태로 잠이 들다니, 믿을 수 없다.

그때였다. 그녀의 다리 사이로 다리 하나가 드리워졌다.

“아악!”

결국 비명을 지른 해주가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불 끝을 끌어다가 야무지게 몸을 가린 해주는 낯선 다리의 주인을 경악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알몸이 틀림없는 은호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녀의 다리에 제 다리를 얽고 있었다.

“미, 미쳤어. 이게 무슨 짓이에요.”

해주가 울먹이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은호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나른한 목소리를 뱉었다.

“왜 그래?”

왜 그래? 지금 왜 그러냐는 질문이 나와?

“당신 뭐예요? 왜 옷을 벗고 있어요?”

술에 취했었다. 이기지도 못할 술을 과하게 마신 건 인정한다. 그렇다고 술 취한 여자를 범하는 건, 범죄잖아.

울먹이는 해주를 기가 막힌다는 듯 바라보며 은호가 대답했다.

“네가 벗겼잖아.”

뭐라는 거야. 그녀가 벗겼다니. 그럴 리가 없잖아.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하지만 느닷없이 떠오르는 장면 하나에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다.

침대 끝에 앉은 은호에게 다가서서는 셔츠 단추를 허겁지겁 풀어내는 하얀 손.

입술을 슬그머니 벌린 해주가 제 두 손을 바라보았다.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이 하얗고 창백한 손이 셔츠를 벗겨 내고 바지 버클을 풀었다.

[천천히 해. 안 도망가.]

다급함에 버둥거리는 그녀에게 차분히 명령하던 목소리도 떠오른다.

미쳤다. 바지를 벗겨 내고 마지막 꺼풀마저 벗겨 낸 그녀가 결국 이 두 손으로……. 미쳤어.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감아쥔 해주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물었다.

“그럼 난 왜 옷을 벗…….”

하지만 이 또한 이미 답은 알고 있었다. 기억이 하나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대답하지 말아요.”

하지만 은호는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사악한 미소를 얼굴 가득 담은 그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듯 잡았다.

“그것도 네가 벗었어.”

* * *

미쳤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

해주가 테이블에 이마를 쿵― 찧었다.

“본부장님?”

순간, 당황한 지수가 해주를 다그치듯 불렀다. 테이블에 이마를 지그시 누른 해주는 그제야 회의 중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차마 고개를 들어 올리지 못하고 가만히 있자 눈치를 살피던 경영전략본부 팀원들이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나같이 해주의 복잡한 심경을 이해한다는 표정이다.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할게요. 다들 일 보세요.”

해주를 대신해 팀원들을 해산한 지수가 회의실 문을 꼭 닫았다. 달칵― 소리가 들리고서야 해주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얼마나 세게 이마를 찧었던지, 동그란 이마 가운데가 빨갛게 물들었다.

그런 그녀를 지수가 걱정스레 들여다보았다.

“너 정말, 괜찮니?”

“아니, 하나도 안 괜찮아.”

테이블에 이마를 몇 번 더 찧은 해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평소답지 않은 성마른 걸음걸이였다.

“여기서 떨어져서 죽어 버릴래.”

호기롭게 창문 손잡이를 잡는 해주를 바라보며 지수가 코웃음을 쳤다.

“제대로 열리지도 않는 창에서 뭔 소리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창문이라고 열어 봤자 기껏해야 한 뼘, 머리도 내밀지 못할 것이다.

“옥상으로 올라갈까?”

반쯤 열었던 창문을 굳게 닫은 해주가 비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깔끔하게 죽으려면 높을수록 좋겠지?”

“미친년.”

지수의 입에서 당장에 욕지거리가 흘렀다.

“너 정말 왜 이래? 오전 내내 얼이 나가서는. 부회장님이랑 화해 안 한 거야?”

뭘 생각하는지, 지수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이지러졌다.

“박경은, 그 여우 년 때문이야? 카섹스한 거 헛소문 아니래?”

카, 카섹스라니. 어떻게 그렇게 천박하고 추잡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 경악한 눈빛으로 지수를 바라보던 해주가 이내 눈꼬리를 내렸다.

“헛소문……이든, 아니든. 뭔 상관이야.”

천박하고 추잡하다니. 술에 취해서는 남자를…… 아니, 차은호를 성추행한 그녀야말로 천박하고 추잡한 존재인 것을. 또다시 고개 드는 자괴감에 한숨을 푹 내쉰 해주가 꺼져 가는 촛불처럼 가느다란 목소리를 내뱉었다.

“차라리 그 여자랑 잘되면 좋겠어.”

그래, 어쩌면 그게 차라리 나을지도 모르겠다. 미련 없이 차은호를 떠날 수 있으니까.

순간, 그녀의 등짝에 불이 붙듯 통증이 일었다. 중학교 시절 배구 선수 아니랄까, 지수가 그녀의 등에 강스파이크를 날렸다.

“얼른 퉤퉤퉤, 해. 말이 씨가 된다는 거 몰라?”

까무스름한 지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작게 퉤퉤, 시늉만 낸 해주가 회의실을 나섰다.

마음에 없는 소리기는 했다. 은호가 ‘그 여자’와 행여 소문 속의 난잡한 짓을 한 게 맞다면, 아마 식음을 전폐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누구보다 차은호에 대해 잘 알기에 의심조차 할 수 없었다.

은호는 그런 남자가 아니니까.

문제는…… 그녀인가.

또다시 한숨을 푹― 내쉰 해주가 회의실 문을 열었다.

“난 점심 건너뛰고 옥상에서 좀 쉬고 있을게. 나중에 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