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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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소문 들었어? 회장님이 들인 그 새 비서 말이야. 부회장님과 카섹스했다는 그 여자. 회장님 사모님이 며느리처럼 아끼는 사람이래. 지해주 본부장님이 불임이라 일부러 차은호 부회장님에게 붙여 줬다는 말이 있어. 우리 본부장님 이제 어떡하냐.>

    창성금융그룹 직원들 사이에는 사내 게시판 외에 익명이 철저히 보장되는 커뮤니티가 하나 더 있다.

    그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이었다.

    올려져 있던 시간은 단 3분. 하지만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다.

    오후쯤 되자 소문은 새로운 소문을 물고 널리 널리 퍼져 나갔다. 새로운 소문의 캡처본이 지수에게 닿은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6시, 퇴근 시간. 하지만 경영전략본부에 소속된 직원들은 그 누구도 퇴근을 꿈꾸지 못했다. 본부장인 해주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덧 시간은 8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우리 본부장님 어떡하냐. 정말.”

    지수가 이끄는 제1팀의 윤 과장이 한 말이었다. 그러자 대번에 걱정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떠들어 대는 소리를 기가 막힌 표정으로 듣고 있는 지수에게 윤 과장이 다시금 속삭였다.

    “인사과 박 과장이 그러는데, 점심시간에 옥상정원 올라갔더니 본부장님이 엉엉 울고 있더래요. 그 소문이 사실이었나 봐요. 그 카섹스 이야기.”

    “아니야.”

    결국 지수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다들 퇴근해.”

    지수의 말에 제2팀의 팀장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지수 팀장이 책임져야 해? 나 오늘 아버지 제사란 말이야.”

    그러자 너나없이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입었다.

    “내가 다 책임질 테니까 다들 사라져요. 본부장님 다른 일로 머리 복잡한 거니까.”

    그렇게 주변을 정리한 지수가 해주의 방으로 다가갔다. 노크했지만, 답이 없는 걸 보니 얼이 빠지긴 빠진 모양이다.

    문을 열자 해주가 보였다.

    책상에 팔꿈치를 올려 이마를 괸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사내 게시판에 익명으로 올라왔던 그 추악한 소문을 되새기고, 또 되새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만 고민하고, 퇴근하자.”

    그제야 해주의 시선이 지수에게 머물렀다.

    “몇 시니?”

    “8시 넘었어.”

    “벌써?”

    놀란 해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네가 버티고 있어서 다들 벌서고 있는 거 방금 퇴근시켰어.”

    “이런, 미안해서 어쩌지?”

    “미안해서 어쩌기는? 내일 커피나 사.”

    “그래야겠다.”

    해주가 몸을 일으켜 컴퓨터를 끄고 재킷을 입었다. 평소처럼 차분하지 못하고 허둥대는 게 여간 이상하지 않았다.

    “너 괜찮은 거 맞아?”

    걱정 가득한 지수의 질문에 클러치를 들어 올리던 해주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렇게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입꼬리가 기계적으로 위를 향했다.

    “그러엄. 괜찮고말고.”

    발그레 상기된 얼굴로 예쁘게 웃어 보이는 해주는 평소와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거짓말.”

    불안하게 떨리는 눈빛, 안절부절못하는 표정, 힘이 잔뜩 들어가 불거진 손마디. 괜찮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런 그녀를 심각한 얼굴로 들여다본 지수가 그녀의 이름을 나직이 불렀다.

    “해주야.”

    그저 이름 하나 불렀을 뿐인데, 커다란 눈망울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였다.

    “술 한잔할래?”

    * * *

    홍보팀과의 간담회, 금융인 협회 오찬 회의, 해외 지점 임원들의 연간 실적 브리핑, 창성생명 출범을 위한 임원단 회식.

    은호의 오늘 스케줄은 풀(full)이었다.

    저녁 회식 도중 잠시 자리를 빠져나온 은호가 휴대전화를 꺼냈다.

    캄캄하게 불 꺼진 액정을 들여다보며 잠시 해주와의 일을 떠올렸다.

    [당신, 나빠. 정말 싫어.]

    키스에 열띤 반응을 보일 때는 언제고, 원망 가득한 눈빛으로 등을 돌리던 해주가 온종일 눈에 밟히고 있었다.

    나빠, 싫어.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짧은 단어가 모질게도 심장에 박혔다.

    “내가 싫다.”

    그래, 정말 싫을지도 모르겠다.

    서로 합의하에 계약을 맺어 결혼까지 했다지만, 분명 해주의 결혼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처음 1년은 윤규의 박해가 심했다.

    고아 주제에 창성의 외며느리 자리를 차지하고서는 그것밖에 못 하냐며 모진 말도 들었다. 그의 친가나 외가 사람들 역시 해주를 대놓고 무시하기 일쑤였다.

    그나마 원정이 해주를 아꼈는데, 그 살가움 역시 며느리를 대하는 태도는 아니었다. 원정에게 해주는 부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윤규가 해주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부터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알게 모르게 박해는 이어졌다.

    지해주가 무너지지 않았던 이유는 단 하나다. 그와 그녀의 관계성은 사랑이 아니라 계약에 의한 것이라는 것. 둘 사이에 존재하는 계약서가 해주의 멘탈을 굳건히 지켜 주었다.

    빨개진 눈시울로 울음을 참는 것을 몇 번 보긴 했지만, 늘 꿋꿋이 이겨 냈다.

    하지만, 이젠 그마저도 벽에 부닥친 모양이다. 도망칠 궁리를 여름부터 한 것을 보니 말이다.

    휴대전화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늦지 않게 들어갈 것이라고 전화라도 걸어 볼까 했는데, 결국 전화를 걸지 않은 은호는 주머니에 휴대전화를 밀어 넣었다.

    그때였다.

    재킷 안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혹시 해주에게서 걸려 온 전화일까, 은호가 급히 휴대전화를 꺼냈다.

    “이지수?”

    전화를 건 이는 이지수 팀장이었다.

    이 시간에 이 팀장이 왜?

    시간을 확인한 은호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전화를 받았다.

    -부회장님?

    지수의 목소리가 아주 다급하게 이어졌다.

    -여기 좀 오셔야겠어요. 해주가 아주 그냥 꽐라…… 그러니까 지금 완전히 만취 상태예요.

    지해주가 술을……?

    은호의 미간이 바짝 좁혀졌다.

    “어딥니까?”

    -이태원 ‘jamais vu’요.

    * * *

    이태원 골목길의 작은 와인 바 ‘jamais vu’. 해주의 단골 술집이었다.

    그렇다고 해주가 술을 잘 마시냐. 그건 또 아니었다. 그저 한 달에 한 번 정도 이곳을 찾았고, 하우스 와인 한잔을 즐기고는 자리를 물렸다.

    그러기를 3년. 이렇게까지 취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와인 한 병을 혼자 다 비운 해주가 테이블에 머리를 올리고는 잠들어 있었다.

    아니, 차라리 잠을 자면 좋으련만 당최 알아들을 수 없는 헛소리를 지껄여 댔다.

    지수가 제 처량 맞은 친구를 안타까이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

    “지해주, 네 남편 불렀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그러자 해주가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누굴 불렀다고?”

    “차은호 부회장님.”

    “차은호? 그 인간을…… 왜 불러?”

    발그레 취기가 오른 얼굴에 초점이 맞지 않는 눈, 확실히 취했네. 취했어.

    그토록 사랑하는 남편을 그 인간이라고 하다니.

    지수가 혀를 끌끌 차고는 해주 앞으로 물잔을 내밀었다.

    “바람난 거 아니라며. 이럴 때일수록 네가 단단해야지 소문이 사그라드는 거야.”

    “차라리 바람이나 피웠으면…….”

    구시렁거리듯 내뱉는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지수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되물었다.

    “뭐? 뭐라는 거니?”

    그때였다. 빨간색 레트로풍의 철문이 열리며 훤칠한 남자가 들어섰다.

    어디를 배경으로 세워 둬도 화보로 만들어 버리는 남자. 지해주의 남편 차은호.

    “야, 저기 오셨다. 네 남편.”

    지수가 손을 들어 올렸다.

    * * *

    문을 열고 들어간 와인 바 구석 자리.

    테이블 위에 자그마한 머리를 기댄 여자는 그의 아내가 틀림없었다.

    ‘jamais vu’, 또 여길 온 거야?

    한숨을 길게 내쉰 은호가 긴 다리를 뻗어 그녀 곁으로 거침없이 다가갔다.

    “부회장님.”

    해주의 곁을 지키던 지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는다.

    “그냥 평소처럼 하우스 와인으로 딱 한 잔만 마시려고 했는데, 얘가 오늘따라 이상하게 병나발을…….”

    해주를 바라보는 은호의 눈빛이 점점 험악해져서 지수는 뒷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입술을 꾹 닫았다.

    이럴 때는 도망이 최선이다.

    “그럼 저는…….”

    벗어 두었던 코트와 핸드백을 집어 든 지수가 허리를 직각으로 꺾어 인사했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이 잉꼬부부가 벌이는 최초의 부부 싸움에 말려들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안녕히 계세요.”

    얼른 인사를 마치고 막 테이블을 벗어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해주의 손이 그녀의 코트 자락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어딜 가. 날 버리고.”

    머리도 제대로 못 가누면서 힘은 또 얼마나 센지. 누구는 속이 타들어 가는데 이젠 아예 노래까지 흥얼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정신 차려. 이 미친녀…… 아니, 본부장님.”

    코트를 움킨 손가락을 떼어 내려 애쓰는 중 이젠 손목마저 잡히고 말았다.

    “지수야.”

    초점이 맞지 않는 몽롱한 눈으로 지수를 바라본 해주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술에 취해서 주정을 부리고 있기는 하지만, 참 맑고도 슬픈 눈이다. 들여다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먹먹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한다는 말이.

    “나 이혼할 거다?”

    뜬금없이 이혼을 선언한 해주가 시선을 돌려 은호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눈동자 가득 원망을 담아냈다.

    “이 인간이랑 헤어질 거라고.”

    “이런 미친.”

    은호 앞이라 욕도 삼가려고 했는데, 결국 참지 못한 지수가 해주의 등짝을 한 대 쳤다.

    “야, 취하려면 곱게 취해. 이혼이 그렇게 쉬운 줄 알아? 부부 싸움 한 번 했다고 이혼하게? 그럼 난 열두 번도 더 했어.”

    안쓰럽기는 하지만 모질게 손을 떼어 낸 지수가 은호에게 시선을 던졌다.

    “부회장님, 어떻게 좀 하세요. 그날 화해한 거 아니었어요?”

    목소리에 얼마쯤의 원망이 묻어났다. 이 잘난 남자와 사느라 제 소울메이트인 지해주가 얼마나 전전긍긍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얘가 얼마나 힘들면…….”

    “힘들기는? 나 하나―도 안 힘들어. 열받은 것뿐이지.”

    지수의 말을 가로막은 해주가 은호를 향해 검지를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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