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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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빠, 차은호.”

    어떻게 그녀에게, 어떻게 그녀를.

    “흐윽. 흑.”

    결국 입술을 가르고 울음이 터졌다.

    그렇게 한 10분가량을 울고만 있었다.

    그녀의 재킷 주머니에서 진동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전화를 받을 마음이 도무지 들지 않는데, 점심시간 즈음 그녀를 찾는 지수의 전화인 듯하여 고개를 들었다.

    휴대전화를 꺼내 발신자를 확인한 해주가 미간에 실금을 그었다.

    “선배?”

    전화를 건 이는 그녀의 대학 선배이자, 은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현욱이었다.

    전화를 받을까, 잠시 망설인 해주가 마지못해 초록색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해주야.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렀다.

    “선배.”

    -…….

    순간 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선배?”

    다시 한번 그를 부르자, 현욱이 심각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너 울었어?

    역시 강현욱. 섬세하기 짝이 없는 그가 대번에 그녀의 목소리에서 물기를 알아챘다.

    “아뇨? 내가 왜 울어. 감기 걸렸어요. 감기.”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 낸 해주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감기, 맞아?

    “그럼요. 근데 왜 전화하셨어요?”

    용건만 간단히 하고 끊고 싶은 마음에 안부를 생략한 해주가 급히 물었다.

    -바쁘니?

    “네? 네, 조금. 업무 중이었거든요.”

    -너 양승태 교수님 전화 못 받았어?

    “양 교수님이요? 못 받았는데요?”

    -너한테 전화하신댔는데? 암튼.

    현욱의 목소리에서 흥분이 느껴졌다.

    -너 인마, 합격했어.

    “……?”

    -컬럼비아대학교 경영대학원 양 교수님 추천서 말이야. 너로 결정됐어.

    감격스럽다는 듯 목소리 끝이 떨리기까지 했다.

    “네?”

    -왜? 안 믿겨? 너, 꿈이 이루어졌어. 내년 9월, 컬럼비아 갈 수 있다고.

    양승태 교수님의 컬럼비아 경영대학원 장학생 추천서가 그녀에게? 내년 9월에 컬럼비아에 갈 수 있어?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의 눈물이 눈망울 가득 차올랐다.

    “정말이요?”

    -해주야, 축하해. 4년 만이잖아, 인마.

    * * *

    해주가 뛰쳐나간 문을 우두커니 바라보던 은호가 제 입술을 엄지로 쓸었다.

    거부하면, 밀어내면 관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말랑하게 삼켜진 입술이 주는 감촉이 미치게 좋아서, 난감하게도 그녀가 그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어서, 끝까지 밀어붙이고 말았다.

    입술을 가르고 헛헛한 웃음이 흘렀다.

    “미치겠네.”

    들끓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다니,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생각할 필요도 없이 답은 뻔했다.

    “지해주, 너 때문이잖아. 내게 의논도 없이 컬럼비아 유학을 결정해?”

    한국대학교 경영학과 양승태 교수에게 전화가 걸려 온 것은 1시간 전의 일이다.

    올해 4분기부터 창성의 경영 자문을 맡게 된 양 교수가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 소식을 전했다.

    [-부회장님? 축하드립니다.]

    처음에는 그가 부회장 자리에 오른 데 대한 축하 인사로 시작했다. 평범한 안부 전화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해주 군 말입니다.]

    제 제자들에게는 성별 불문하고 ‘군’을 붙이는 양 교수가 해주 이야기를 꺼냈다.

    [-매년 제가 컬럼비아 경영대학원에 우수 학생 한 명을 추천해서 보내는데, 지난 8월에 해주 군이 신청했거든요.]

    [그게 무슨…….]

    [-내년 9월 장학생으로 해주 군이 선정되어서 연락드렸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역시 창성이 선택한 우수한 인재답습니다.]

    해주의 꿈이 컬럼비아대학교 경영대학원 진학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와의 계약을 통해 최종적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 그것이라고 했으니까.

    그는 부회장이 되어 창성의 실질적인 주인이 되는 것이고, 그녀는 돈과 인맥을 모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것이었다.

    [그거 알아요? 은호 씨는 돈이 많으니 그 비싼 등록금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겠지만, 저 같은 소시민은 양승태 교수님의 장학생이 되지 않는 이상은 꿈도 꾸지 못한다는 거. 게다가 더 속상한 건.]

    해주가 계약서에 도장을 찍으며 한 말이었다.

    [그나마 그 장학생 추천서도 힘 있고, 백 있는 애들만 가질 수 있다고요.]

    석사 과정을 밟으면서 지켜본 결과가 그렇더라며, 이제 차은호라는 배경을 얻었으니 다음 차례는 제가 될 거라고 웃었다.

    “도대체 넌…….”

    알고는 있었는데, 이상할 정도로 서운하고 화가 밀려들었다.

    결국, 이혼 요구의 배경에는 미국행 티켓이 깔려 있었나. 또다시 헛헛한 웃음이 입술을 타고 흘렀다.

    그때, 인터폰의 벨이 울렸다. 나직이 한숨을 내쉰 은호가 버튼을 눌렀다.

    “네.”

    -부회장님? 회장님이 찾으십니다.

    윤규가 찾는다는 말에 미간을 좁힌 은호가 천천히 방을 나섰다.

    * * *

    “어지러우세요?”

    회장실에 들어선 은호가 소파에 앉아 혈압을 재고 있는 윤규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윤규의 입술에 엷은 미소가 걸렸다.

    “조금 어지럽구나. 앉아.”

    소파 자리를 눈짓한 윤규가 혈압을 재고 있는 비서에게 그만 나가 보라 손짓했다. 그러자 비서의 시선이 은호에게 와 닿았다.

    “차는…….”

    그 여자다. 지난 금요일, 임원 회식 날 성가시게 굴던.

    “됐습니다. 금방 나갈 거라서.”

    싸늘하게 대답한 은호가 자리에 앉았다.

    그런 은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윤규가 혀를 끌끌 차고는 비서에게 얼른 나가라 재차 손짓했다.

    “창성의 수장으로, 넌 좀 부드러워질 필요가 있어.”

    “굳이요?”

    제 아버지의 말에도 서늘한 코웃음을 흘릴 뿐이다.

    “용건만 말씀하세요. 길게 시간 못 냅니다.”

    왼쪽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한 은호가 잠시 뒤에 있을 홍보팀 미팅 시간을 가늠했다.

    “너희 둘.”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은 윤규가 대뜸 본론을 꺼냈다.

    “다른 문제 있는 건 아니지?”

    은호의 한쪽 눈썹 산이 삐뚜름하게 올라섰다.

    “다른 문제라니요?”

    “단순한 부부 싸움인지, 아니면 심각한 트러블인지 묻는 거다.”

    그러자 은호가 픽― 웃음을 흘렸다.

    “단순한 부부 싸움에도 못 미치는 사랑싸움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다행이라는 듯 윤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무 문제 없겠구나.”

    은호의 미간에 짙은 세로줄이 그려졌다.

    “무슨 말씀이세요?”

    “인사 명령을 내릴까 해.”

    갑자기 인사 명령이라니. 무슨……?

    “방금 저 애 말이다. 새로 들어온 박경은이라는 비서. 저 애를 부회장실로 보낼까 하는데?”

    윤규의 말에 은호의 얼굴이 서늘하게 굳었다.

    “필요 없습니다.”

    회사를 은호에게 맡기고 뒤로 물러났다지만, 여전히 창성에는 윤규의 눈과 귀가 많았다.

    그런 윤규가 임원 회식 자리에서 흘러나온 소문을 듣지 못했을 리 없다.

    회식에서 먼저 돌아간 신임 부회장, 회식 내내 꼬리를 치다 그를 뒤따라 나간 회장의 새 비서. 호텔 룸까지 올라갈 시간이 없어 주차장에서 카섹스를 즐긴 두 사람.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만들어져 떠돌고 있는 지금, 그 여자를 굳이 부회장실로 인사이동시킨다?

    도대체 왜? 무슨 생각으로 그런 쓸데없는 일을 만들어?

    “사양하겠습니다. 비서는 정 실장 하나면 충분하거든요.”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은호를 바라보며 윤규의 인상이 굳었다.

    “받아들여.”

    엄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은호 역시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회장님.”

    “나도 들었다. 그 말도 안 되는 소문.”

    “그런데 왜 굳이 이런 명령을 내리세요?”

    은호의 반발에 윤규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심경이 꽤 복잡한 듯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었다.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내가 들어서라도 떼어 놓아야지. 하지만 사실이 아니지 않니. 그러니 받아들이라는 말이야.”

    “잘라도 시원치 않을 여자를 떠안아라, 이 말씀이세요?”

    “해주를 위해서다.”

    해주를 위해서라니, 그게 어떻게 해주를 위해서야. 정말로 해주를 위한다면, 그런 소문의 근원이 된 여자를 바로 처리해야 맞지. 끔찍하게 며느리를 아끼는 윤규라면 응당 그렇게 하는 게 맞는 거다.

    “이게 어떻게 해주를 위한 겁니까? 해주를 더 괴롭히는 일이죠.”

    “박경은, 저 아이 말이다.”

    또다시 긴 한숨을 내쉰 윤규가 찬찬히 말을 이었다.

    “네 엄마 낙하산인 건 알지?”

    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정이 호텔 피트니스에서 만나, 나이 불문하고 우정을 쌓은 여자라고 들었다.

    “네 엄마가 저 애를 부회장실로 보내 주기만 하면, 해주에게 그 어떤 압박도 넣지 않을 거라고 약속했다.”

    윤규의 말에 은호가 실소했다.

    원정의 성격에 이번 주말에 있었던 일이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젠 아주 해주가 불임이라 철석같이 믿는 눈치니, 앞으로 얼마나 해주를 못살게 굴지 안 봐도 뻔했다.

    그럼 착해 빠진 해주는 반항 한번 못 하고 그저 견디기만 하겠지. 아니, 이혼하겠다는 의지를 더욱 불태우려나.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다.

    어금니를 사리물자 은호의 날렵한 턱선에 굵은 힘줄이 잡혔다.

    “그리고, 그런 더러운 소문을 지어낸 게 만약 저 아이라면 네가 직접 쳐 내야 하지 않겠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금으로서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박경은, 그 섬뜩한 여자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윤규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코웃음을 흘린 은호가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굳이 곁에 두지 않아도 쳐 낼 수 있으니 걱정 없습니다. 그리고…….”

    옷깃을 잡아당겨 매무새를 정리한 은호가 서늘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해주 괴롭히지 마세요. 이젠 아무리 어머니라고 해도 봐 드리지 않을 거니까.”

    명백한 선전포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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