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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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 구해 줬잖아요. 두 번째로.”

    기억은 대번에 그날로 날아갔다.

    어두운 공원 안, 차마 울지 못해 주먹으로 가슴을 치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다짜고짜 한잔하자며 낯선 남자가 다가왔다.

    싫다는 해주의 팔을 막무가내로 잡아당기는 남자에게 은호가 던진 말이다.

    [내 여자야. 그러니까 그 손 떼.]

    위험해진 순간, 가로등을 등지고 나타난 구원자. 그 목소리가 왠지 귀에 익어 심장이 요동친 해주는 얼굴을 확인하고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다.

    웃기는 일이었다.

    축제에서 본, 선배의 사촌 오빠.

    그 남자가 거의 5년을 잔상처럼 쫓아다니며 잊히지 않고 있었는데, 그런 식으로 마주치다니.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운명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으니까.

    “고마웠어요. 그날도.”

    시선은 멀리 보이는 청담공원에 고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모든 감각은 귓가에 내려앉는 그의 숨결로 집중되었다.

    “그날도? 그럼 첫 만남에서도 고마웠단 이야기?”

    등 뒤로 그의 가슴이 닿았다. 이러면 곤란한데. 입술을 질끈 깨문 해주가 그를 슬쩍 밀어내며 빠져나오려 했다.

    하지만, 단단히 버티고 선 그는 한 치의 틈도 허용하지 않았다.

    “말해 봐. 첫 만남도 고마웠어?”

    오히려 몸을 돌려세운 해주가 그와 유리창 사이에 꼼짝없이 갇힌 꼴이 되고 말았다. 물러서려 했지만 차가운 유리창이 등에 닿을 뿐이다.

    “당연히, 고마웠죠.”

    곤란함에 해주의 목소리 끝이 떨렸다. 하지만 은호는 이 상황이 제법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입술 끝을 비스듬히 말아 올린 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처음 듣는 이야기네. 여태 한 번도 그날 일에 대해서 말한 적 없잖아.”

    “고마웠어요. 고마웠는데…….”

    좀 비켜 주면 좋으련만, 물러서지 않는 은호로 인해 점점 숨쉬기가 곤혹스러워지고 있었다.

    “고맙다고 하려니 그날 은호 씨가 너무 까칠해서, 말하기 싫었어요.”

    “내가 까칠했다?”

    떨리는 마음을 숨긴 채 심드렁하게 내뱉은 대답에 은호가 코웃음 쳤다.

    “웃기지 마. 까칠하고, 뾰족했던 건 너였어.”

    무슨 소리야. 뾰족했다니. 그날 얼마나 떨렸는데.

    “나더러…….”

    해주가 말을 끊고 마른침을 삼켰다.

    목구멍이 갑갑하게 조여 와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자 같지도 않다고 했잖아요.”

    그 말 한마디가 그녀의 결혼 기간을 지배했다. 여자 같지도 않은 널 여자로 취급하는 게 싫어서, 라고 했었지. 아마.

    그게 그녀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는지 그는 모를 것이다.

    “그리고 다시 만나서도 비슷한 말을 했어요.”

    “내가?”

    무슨 소린지 통 모르겠다는 듯, 은호가 미간을 좁혔다.

    “그날 공원에서 남자를 쫓아 버리고 던진 말이, ‘머리가 이상한 거 아니야? 이런 식으로 접근하고 말이야. 다들 눈이 어떻게 된 거지?’, 였어요.”

    늦은 밤, 조용한 공원에 불던 초가을의 시원한 바람과 함께 그녀에게 전해진 말이 오랫동안 잊히지 않았다.

    “5년 만에 본 건데 말이죠.”

    마치 5년 동안 줄곧 만났던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말을 놓으며 나무랐다.

    [왜지? 왜 다들 널 내버려 두지 않지? 딱 봐도…… 그러면 안 되게 생겼는데.]

    “그랬나?”

    해주의 말에 당최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듯 은호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뭐 상관없어요. 나도 은호 씨 남자로 안 보니까.”

    심드렁한 그녀의 말에 은호의 눈빛이 짙어졌다.

    “그래? 그럼 지금은 어때?”

    까만 눈동자가 그녀의 얼굴을 끈적하게 훑어 냈다.

    “무슨…… 소리예요?”

    “나랑 이렇게 닿아 있는 것 말이야.”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발끝까지 추락했다.

    “아무 느낌도 안 들어?”

    아무 느낌도 안 드냐고? 아까부터 미칠 것 같다.

    키가 큰 은호가 창틀을 짚기 위해 상체를 숙인 바람에 그의 입술이 닿을 듯 가까워져 있었다. 당연히 두 호흡이 섞였고, 그의 체온이 후끈거리며 공기를 타고 전해졌다.

    그가 내뱉는 달큼한 날숨이 그녀의 뱃속 어딘가를 어지러이 배회해 당장에라도 주저앉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또다시 농담 같은 말이 던져졌다.

    “지금 이대로 키스해도 남자로 안 볼래?”

    농담이지? 키스해 버린다니.

    하지만 눈빛에서 조금의 장난기도 읽을 수 없었기에 해주가 불안한 목소리를 바락 내질렀다.

    “차은호 씨!”

    경고처럼 이름을 불렀지만, 은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층 더 심각해진 얼굴로 무겁게 말을 내뱉을 뿐이다.

    “방어권 발동이야.”

    또 그 얼어 죽을 방어권.

    “앞으로 남은 99일. 너와 나, 우리 둘. 진짜 부부처럼 지낼 거야.”

    “지금까지 그렇게 지내 왔잖아요. 진짜 부부처럼.”

    계약에 의한 사이라지만, 남들 보는 앞에서는 정말이지 진짜 부부처럼 행동했다.

    사랑에 빠진 연기를 능숙하게 한 덕에 창성 최고의 잉꼬부부란 별칭도 얻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어떻게 진짜 부부처럼 지내? 그러니까 지금, 그래서 키스를 하겠다는 거야?

    “어젯밤처럼 그렇게 침대 가장자리에 붙어서 자는 거 안 돼. 따로 출근하는 것도 금지야.”

    어젯밤, 침대 가장자리 끝에 매달리다시피 잠든 해주가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만한 일로 이런 극단적인 상황을 연출해.

    “남들이 안 보는 곳에서도 애정 표현 할 거야.”

    “난 그렇게 못 해요.”

    “누가 너더러 그렇게 하래?”

    곧 울 듯한 얼굴로 대답하는 해주를 뭉근히 바라본 은호가 나직이 대답했다.

    “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창틀을 짚고 있던 은호의 손이 어느덧 그녀의 손목에 닿았다.

    “넌, 그냥 가만히 있으면 돼. 나와 아이를 만들 수 있을지 없을지 타진하면서 말이야.”

    맥을 짚기라도 하는 듯 손목을 더듬는 손가락이 뜨겁다.

    “그러다 받아들여 주면 고맙고, 아니면…….”

    말을 잠시 멈춘 은호가 몹시도 유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너 계속 유혹하면 그만이고.”

    ‘미쳤군요!’, 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가 입술을 겹쳐 왔기 때문이다.

    미치도록 뜨거웠다.

    원래 사람의 입술이 이렇게 뜨거웠나? 아니, 그날 새벽, 그녀를 덮쳤던 입술도 이토록 뜨거웠나? 심지어 입술을 가르고 흘러 들어오는 숨결마저도 뜨겁다.

    목구멍과 폐부가 달아오르고, 심장이 불길에라도 휩싸인 듯 타들어 가는 듯하다.

    단단한 듯 말랑한 입술이 거칠게 맞물리더니 대번에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읍.”

    눈을 동그랗게 뜬 해주가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팔을 단단히 잡힌 그녀는 도망조차 치지 못했다.

    밀어내야 하는데, 밀어내지 않으면…… 마음을 들키는데.

    그녀의 이성은 도망가라며 미친 듯이 경고를 날리는데, 그녀의 몸은 어느덧 노곤하게 허물어져 갔다.

    유리창에 마주 댄 등은 한기가 들 정도로 차가운데, 그의 가슴에 짓눌린 심장은 타는 듯한 열기로 온몸을 데워 나갔다.

    스르르 눈꺼풀이 덮인 것은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다. 심장의 명령이었지.

    애무하듯 움직이는 은호의 입술이 그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아랫입술을, 윗입술을. 때로는 둘 모두를. 간지럽히고, 애태우고, 빨아들였다.

    맛있는 사탕을 음미하며 먹듯 핥고, 빨고, 씹는 행위가 지독히도 야했다.

    점점 숨이 가빠져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숨을 쉬기 위해 벌어진 입술 사이로 은호가 뜨겁게 밀려들었다.

    처음에는 그저 단순히 스치듯 키스를 하고 말겠거니 했는데, 아니었다. 아주 딥, 딥, 딥한 키스가 될 모양이다.

    모든 것이 지나치게 뜨거워 입 안이 화끈거릴 정도였다. 깊숙하게 파고드는 그를 힘겹게 받아들인 해주는 아찔한 감각에 다리가 흔들렸다.

    그러자 그가 그녀의 몸을 단단히 붙들었다. 왼손이 허리를 감아 제 몸에 바짝 끌어다 붙이고, 오른손이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도망가지 못하게 단단히 붙든 그가 더 깊게 침범해 들어왔다.

    입 안에서 거칠게 부대끼는 감각이 온몸을 예민하게 흐트러뜨리고 있었다.

    보드라운 캐시미어 슈트를 손에 꼭 거머쥔 해주는 어느덧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져 버렸다. 그저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아찔한 감각과 미치도록 달콤한 타액을 들이마시며 가쁜 숨을 내쉴 뿐이었다.

    한계까지 몰렸다고 생각했을 때다.

    은호가 그녀에게서 입술을 물렸다.

    가슴이 들썩일 정도로 가쁜 숨을 토해 내는 해주가 흐릿해진 시선으로 은호를 바라보았다.

    은호의 호흡 역시, 조금은 흐트러져 있길 바랐다. 하지만, 그는 눈곱만큼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서늘하게 눈동자를 빛내며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이래도 내가 남자가 아니야?”

    순간 뒤통수를 세게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결국, 남자로 보지 않는다는 그녀의 말에 자존심이 상해서 이런 짓을 한 모양이다.

    “너 내게서 도망 못 가. 절대로.”

    해주의 입술이 파들거리며 떨렸다. 하지만 은호는 더욱 잔혹한 웃음을 흘릴 뿐이다.

    “당신, 나빠.”

    해주가 그의 가슴을 힘껏 밀어냈다.

    “정말 싫어.”

    그러고는 도망치듯 부회장실을 빠져나왔다.

    잔인한 남자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제 뜻에 어긋나는 일이 있으면, 무슨 일이 생겨도 바로잡는 사람이다. 원하는 것은 반드시 손에 넣어야 했고, 한번 뜻을 세우면 굽히지 않았다.

    그런 그가 이혼을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사람을 가지고 놀아.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해주는 비상계단을 밟아 옥상정원으로 올라갔다.

    찬 바람을 맞자 비참하게도 눈물이 흘렀다.

    이제 곧 점심시간이 될 테고, 식사를 끝낸 사람들은 커피 한잔의 여유를 즐기기 위해 옥상정원을 찾을 것이다.

    그녀에게 주어진 평화로운 시간은 겨우 30분. 옥상정원 제일 후미진 곳에 자리한 해주가 무릎을 세워 앉아서는 머리를 묻었다.

    배신감과 서러움이 동시에 밀려들면서 심장이 서늘해져 갔다.

    조금 전, 은호에 의해서 잔뜩 달궈진 심장이기에 밀려드는 한기는 곱절로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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