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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름 끼치게 무서웠다는 듯 지수가 울상을 지었다.
“그래서 전화 안 했어. 카드 내역 조회하면 당장에 발렌시아호텔 뜰 거고, 사용 시간 보면 감 딱 올 거고, 너 끌고 집에 가셨을 테니까 말이야.”
지수의 반응 하나하나를 눈에 담으며 은호의 말투와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저 통화를 하는 것만으로도 꼼짝없이 제압당할 수밖에 없는 카리스마의 소유자.
상대를 제 마음대로 쥐락펴락하면서도 절대 원망을 듣지 않는 마성의 남자.
정말 얄미울 따름이다.
“괴물.”
뜬금없이 내뱉은 말에 지수의 눈이 동그래졌다.
“나더러 하는 소리야?”
“아니, 차은호.”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이름을 싸늘하게 짓씹었다.
“부회장님이 왜 괴물이야? 완벽한 사랑꾼이신데?”
완벽한 사랑꾼.
그래, 창성금융그룹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고, 지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모든 게 완벽한 거짓말이고, 두 사람은 계약관계라는 것을 가장 친한 친구에게조차 말하지 못한 해주는 그저 냉가슴만 앓을 뿐이었다.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는 해주를 바라보며, 지수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나저나, 부부 싸움은 잘 마무리 지은 거지? 그 여자랑 그런 거…… 아니지?”
‘그 여자’라는 말에 해주의 얼굴에 빗금이 그어졌지만, 이내 얼굴에 맑은 미소를 띠었다.
“응. 아니야.”
아직은 연극이 진행 중이니 그 어떤 잡음도 밖으로 표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행히 지수는 해주의 미소에 속아 주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지수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당연히 아니지. 아닐 줄 알았어. 부회장님이 어디 그럴 분이시니?”
그때였다.
지하 주차장 가운데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 앞으로 은색 뉴비틀이 느릿하게 지나갔다.
* * *
은색 뉴비틀.
창성금융그룹 본사 주차장에 존재하는 수많은 차 중, 지금까지는 해주의 것이 유일했다. 그렇다 보니 은색 뉴비틀은 창성에서만큼은 해주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똑같은 차가 창성에 나타났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더욱 묘한 것은 주차를 끝낸 은색 뉴비틀에서 내린 여자였다.
웨이브 진 긴 갈색 머리, 펜슬 스커트와 깃이 넓은 블라우스, 그리고 콤비로 입은 재킷. 커다란 클러치와 스틸레토 힐까지.
뒷모습뿐이었지만, 지나치게 눈에 익은 모습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책상 앞에 앉아 생각에 빠져 있던 해주가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사람이 들어온 것도 모르고 말이야.”
지수였다.
결재판을 손에 든 지수가 본부장실 유리문 앞에 서서 고개를 기우뚱 기울였다.
“아니야. 생각은 무슨.”
자세를 고쳐 앉은 해주가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본 지수가 한 템포 늦게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아까 그 뉴비틀 말이야. 알아봤어.”
지수 역시 출근할 때 본 뉴비틀을 신경 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말을 꺼내는 목소리가 심각했다.
“그거 그 여자야.”
“그 여자?”
“회장님 새 비서.”
회장님 새 비서라니, 그 여자?
가면을 쓸 새도 없이 해주의 얼굴이 와그작 구겨졌다.
“섬뜩해. 옷 입은 것 봤지? 머리 스타일하며, 걸을 때 산들거리는 것까지 전부 너랑 똑같아.”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다.
뒷모습만큼은 영락없는 해주 자신이었으니까.
“나만 이런 생각 하는 거 아니야. 심지어 엘리베이터에서는 넌 줄 알고 인사한 사람도 있었대.”
손목 안쪽의 여린 살을 따라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지금 이거, 되게 되게 찝찝한 거 알지? 지난 금요일 사건이 우연히 일어난 일은 아닌 것 같단 말이야.”
해주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찝찝하고 불쾌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결재나 하자.”
얼굴에서 감정을 지워 낸 해주가 만년필 뚜껑을 열며 지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한숨을 얕게 내쉰 지수가 결재판을 책상에 올렸다.
“이건, 우리 1팀 기획서고 이건 2팀 기획서야.”
차은호 부회장 체제를 맞아 경영전략본부에서 만든 창성의 미래 전략 기획서였다.
전통적인 은행의 개념을 넘어, 모바일 뱅킹을 출범한 창성의 청사진이기도 했다.
준비 과정 내내 함께했기에, 대략의 개요만 읽은 해주가 결재란에 사인했다.
“이대로 올리면 되겠다.”
어쩌면 이 기획안이 해주의 마지막 기획일 듯하여, 조금은 헛헛한 마음도 들었다.
“수고 많았어.”
만년필을 내려놓은 해주가 두툼한 결재판을 지수에게 다시 내밀었다.
하지만 지수는 결재판을 받지 않았다.
“부회장님이 결재 끝나면 직접 부회장실로 가지고 오라셨어.”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턱 끝으로 해주를 가리켰다.
“내가?”
“응. 얼굴 보고 이야기 좀 하자셔.”
말을 전한 건 저면서, 지수의 얼굴 가득 근심이 어렸다.
“어제 하루 연차 쓰면서 화해한 줄 알았더니, 도대체 얼마나 심하게…….”
뒷말을 잇지 못한 지수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두 사람 사이의 이상기류를 부부 싸움이라고 단정한 지수는 제 친구를 위해 진심 어린 충고를 내놓았다.
“부부 싸움도 길게 하면 안 좋아. 특히 이럴 때는 말이야.”
이럴 때라니, 사생활이 깨끗하던 은호가 스캔들을 일으킨 이때를 말하는 건가.
두 사람의 문제는 그런 것 때문이 아닌데, 마치 그게 이유라는 듯 순간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왜 이런 마음이 드는지, 이건 꼭 진짜 부부 같잖아. 서로 질투하고, 불안해하고, 애달파하는 진짜 부부.
해주의 갈색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런 해주를 걱정스레 바라본 지수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가서 싸우지 말고, 차분하게 잘 물어봐. 그 빌어먹을 년 얼굴이 너랑 닮았는지 아닌지. 난, 회장 비서실 앞에서 얼쩡거려 볼 테니까.”
* * *
두툼한 결재판을 가슴에 안은 해주가 부회장실로 들어섰다.
커다란 창문 앞, 은호의 뒷모습이 보였다.
187cm, 장신의 남자가 두 손으로 창틀을 짚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뒷모습이 새삼 근사해 손가락이 곱아들었다.
인기척을 느낀 그가 천천히 뒤돌아보았다.
그의 몸에 딱 맞춘 세비로 장인의 고급스러운 슈트가 그의 육체를 보다 매혹적으로 느끼게 만드는 모양이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부드럽게 흐르는 슈트가 단단한 육체의 윤곽을 어렴풋이 드러냈다.
정신없이 그의 몸을 바라보던 해주가 시선을 들어 그와 눈을 맞추었다.
짙은 빛을 띠며 어둑하게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 기분이 좋지 못한 모양이다.
“미래 전략 기획서 가지고 왔습니다, 부회장님.”
애써 그의 시선을 피한 해주가 책상으로 다가가 결재판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그의 발소리가 창문에서 책상까지 묵직하게 이어졌다.
“지해주.”
결재판에 커다란 손이 올라섰다.
“너 나한테 뭐, 할 말 없어?”
할 말이라니. 물어야 할 것은 있지만, 그에게 딱히 건넬 말은 없다. 해주의 눈동자가 다시 은호를 말갛게 담아냈다.
“할 말……이라니요?”
일순, 짤막한 침묵이 흘렀다.
“아니야.”
그녀에게서 시선을 내린 은호가 자리에 앉더니 결재판을 열어 거침없이 사인했다.
“안 읽어 봐요?”
해주의 미간이 좁혀졌다.
아무리 그룹 내 최고의 브레인으로만 구성된 경영전략본부의 기획서라지만, 어떻게 읽지도 않고 사인을 해. 너무나 차은호답지 않은 일이었다.
“네 작품인데, 읽어 봐야 해?”
무언의 질문을 은호는 한마디로 일축했다.
“완벽할 거잖아.”
단호한 대답이었다.
그런 그의 반응에 어째선지 약이 올랐다. 직접 가지고 올라오라기에 뭔가 큰 틀에서의 수정 요청이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온 건데.
“그럼 왜 오라고 했어요? 어차피 사인만 할 거.”
뾰족한 말이 튀어 나갔다.
“부회장실 구경하라고.”
툭, 하고 던진 이유가 허탈할 만큼 실없게 느껴졌다. 기껏 새 사무실이나 자랑하려고 그녀를 불렀다니. 뭐라 한마디라도 쏘아 주려 입술을 달싹였을 때다.
이어진 그의 말에 허탈한 한숨이 해주의 입술에서 흘렀다.
“네가 만든 내 자리, 보기는 해야 할 거 아니야.”
책상에 팔꿈치를 올린 그가 손깍지를 끼고는 턱을 올렸다. 그러고는 까맣게 반들반들한 눈동자에 이채를 띠며 그녀를 또렷이 담아냈다.
“나 여기 앉히느라 3년을 미친 듯이 달렸잖아.”
그랬다. 그가 계약을 통해 거머쥐려 했던 창성금융그룹의 부회장 자리.
그 자리를 그에게 안겨 주려 밤낮없이 일했던 해주다. 하지만, 결국 그는 제힘으로 모든 걸 얻어 냈다. 절대 그녀가 만든 것이 아니었다.
“내가 만든 건가? 본인이 직접 만들었으면서.”
귓등을 붉힌 해주가 조금은 무안한 듯 말했다. 그러자 그의 눈 속에 담겨 있던 어둑한 빛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너 없이는 절대 못 했어.”
어느덧 묵직해진 그의 목소리가 빈말이 아님을 넌지시 알렸다.
“너 그거 알아?”
자리에서 일어난 은호가 따라오라며 눈짓했다. 그러고는 창문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런 그를 눈에 담으며 이끌리듯 다가선 창문 앞.
“이 창문 너머로 청담공원이 보여.”
은호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겨 유리창에 바짝 붙여 세웠다.
“우리가 5년 만에 재회한 곳이 저기였지, 아마?”
해주를 유리창으로 밀어붙인 그가 그녀를 품듯 창틀에 두 손을 짚었다. 조금 전, 이 방에 들어올 때 봤던 그 자세 그대로였다.
그 바람에 지나치게 가까워진 그의 입술이 그녀의 귓가 어딘가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절로 목이 움츠러들고 발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난 그날 너 되게 반가웠는데.”
3년 하고도 한 달 전의 일을 떠올리는 은호의 목소리가 귓가를 부드럽게 두드렸다.
“나도…… 되게 반가웠어요.”
반가웠다. 아니, 설렜다.
8년 전, 조금은 기이하게 마주쳤던 은호를 다시 마주한 그날. 한 번 더 그에게 반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