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65)

13

씻고 나와.

그 말 한마디를 남긴 은호가 방을 떠나고, 해주는 한참을 멍하니 침실 문만 바라보았다.

그의 손이 닿았던 손목이 불이라도 붙은 듯 뜨겁게 느껴졌다.

진저리 치듯 어깨를 부르르 떤 해주는 곧장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더운물이 해바라기 수전을 타고 폭포수처럼 떨어졌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야?”

낙하하는 물줄기에 몸을 들인 해주는 급변한 상황을 곰곰이 곱씹어 보았다.

그와 그녀의 계약은 복잡한 듯 보이지만 비교적 간단한 내용이다.

우선, 남들 보기에 그럴듯한 가짜 부부가 되자는 것. 그리고 이 가짜 결혼을 이용해서 서로 원하는 것을 손에 넣자는 것.

그 과정에서 서로를 어떻게 이용하든 용납하자는 것. 대신, 서로를 이성으로 대하지는 말자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계약을 위태롭게 만드는 것일 테니.

그리고 은호는 지난 금요일, 드디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다.

“그럼 계약을 끝내도 아무 상관 없잖아.”

명실상부, 피라미드 최고층의 부회장이 되었으니 말이다.

이 계약의 종료가 아쉬운 사람은 마땅히 그녀여야 한다. 아직 원하는 것을 완벽히 얻지 못했으니까.

그런 그녀가 이혼을 요구하는데, 못 해 줄 게 뭐야.

“설마…….”

설마 그녀를 놓지 못할 다른 이유가 있을까? 지난 3년을 함께 보내며 그녀에게 없던 마음이 생겼다거나, 뭐 그런?

“아니지?”

* * *

“아니야.”

완벽한 자태로 식탁 앞에 앉은 해주에게 싸늘한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그깟 청담동 건물이 탐나서 널 붙드는 거겠어?”

물론, 질문부터가 틀려먹었다.

설마 그녀를 여자로 보고 있냐는 질문을 던졌어야 했는데, 그녀를 붙드는 이유가 ‘윤규가 명의 이전한 청담동 건물 때문이냐’고 물었다.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그럼요?”

“말했잖아.”

은호의 입매가 서늘한 미소를 그렸다.

그러고는 그녀를 붙드는 이유를 한마디 말로 일축했다.

“난 변화가 싫다고.”

알고 있던 사실이다.

은호는 변화를 싫어한다.

아니, 귀찮아한다.

새로운 환경에 맞춰서 저를 바꿔야 한다는 사실이 제일 무가치하다고 말한 사람이다.

창성금융그룹의 개혁, 변화의 바람.

그런 걸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그는 사업에 있어서는 개혁과 변화의 상징이었고, 창성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 혁명가였다.

그런 변화의 바람을 주도하고 있는 장본인으로서 부담감을 느끼는 걸까. 제 사생활만은 지극히 단조롭고 보수적이었다.

그런 은호에게는 새로운 여자와 계약을 맺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극도의 스트레스가 될 터였다.

“실컷 맞춰 놓은 삶의 패턴을…… 바꾸라니. 지나치잖아.”

너무나 차은호다운 대답이라 뭐라 토를 달 수도 없었다.

그녀를 여자로 생각하는 건 아닌지, 의구심이 들었던 1시간 전의 저가 수치스러울 뿐.

“왜 그런 표정이야?”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짓씹고 있던 해주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런 표정이라니요?”

은호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설마, 내가 널…… 행여 여자로 보고 있나? 그런 걸 생각하는 거야?”

“아니요?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해주의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갔다.

속내를 들킨 듯해 귓등이 빨갛게 물들었지만, 긴 머리카락에 숨겨 두어 들킬 염려는 없다.

은호에게 저를 여자로 보는 건 아니냐고 묻지 않은 이유는 이미 답을 알고 있어서다.

차은호에게 지해주는 여자가 아니다.

은호를 처음 본 날, 벌써 8년도 더 전에 알게 된 사실이다.

[왜 도와주셨어요?]

[여자도 아닌 널 여자 취급하는 인간들이 싫어서?]

[여자가 아니라니……. 그럼 내가 남자라도 된다는 말인가요?]

[젠더로 따지면 여자지. 하지만 섹슈얼로 따지면…… 여자라고 보기 애매하잖아?]

생판 모르는 남자의 도움에 고맙다는 말 대신 왜 도와준 거냐고 따져 묻는 저도 웃겼지만, 처음 보는 그녀에게 반말을 시전하며 빈정대는 은호도 웃겼다.

대학교 2학년, 학교 축제에서였다.

해주의 1년 선배이자 은호의 사촌인 민영의 초대로 은호가 경영학과 주막을 찾았을 때였다.

곧 하버드로 유학을 떠나는 나민영의 고종사촌 차은호. 그의 등장만으로도 퀴퀴한 주막이 화사해진 듯했다.

경영학과는 물론이고 다른 학과의 학생들까지 죄다 그의 미모를 눈에 담으려 몰려들었다. 차은호는 그야말로 축제의 꽃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강제로 서빙을 맡게 된 해주는 복잡한 주막 안을 헤치며 파전을, 막걸리를, 혹은 홍합탕을 날랐다.

그때 과 선배들이 해주에게 아주 짓궂은 장난을 쳤다. 그냥 뒀으면 그날의 웃음거리로 전락할 뻔한 그런 사건이었다.

그런 해주를 은호가 구해 주었다.

그렇게 은호는 축제의 꽃에서 왕자님이 되었다.

그게 두 사람의 첫 만남이었다.

“절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그녀를 여자로 보는 것 같냐는 은호의 질문에 제법 단호한 대답을 던졌다.

그래서일까, 은호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아니라면 다행이네.”

부드럽게 미소 지은 은호가 포크를 들어 올렸다.

“아침 먹어. 배고프다.”

그러고는 파프리카 오믈렛을 한 점 떠 입에 넣었다.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 서운한 건가?

또다시 말도 되지 않는 생각에 사로잡힌 해주는 고개를 내젓고는 오믈렛의 작은 조각을 입에 넣었다.

달콤한 파프리카와 고소한 치즈가 들어간 오믈렛인데, 이상하리만큼 입에 썼다.

* * *

늘 그랬듯, 출근은 따로 했다.

은호는 정 실장을 대동한 채 그의 검은색 벤틀리에 올랐고, 해주는 그녀의 출근용 차량인 은색 뉴비틀을 탔다.

은색 뉴비틀. 해주의 보물 목록 1호이다.

해주에게는 이 자그마한 차 외에도 재작년에 윤규가 생일 선물로 준 포르쉐 파나메라가 있다. 하지만, 그녀는 늘 이 은색 뉴비틀만을 고집했다.

24개월이나 할부하기는 했지만, 오롯이 그녀의 월급으로만 산, 그녀의 첫 차였기 때문이다.

해주의 차가 먼저 대문을 빠져나오고 은호의 차가 뒤따랐다.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상황이었다.

느릿하게 운전하는 해주의 차를 요 앞 네거리에서 은호의 차가 앞지를 것이고, 그는 8시 45분쯤 회사에 도착, 그녀는 8시 55분쯤 회사에 도착하겠지.

그렇게 두 차가 어긋날 때까지는 백미러를 통해 은호의 실루엣을 훔쳐보는 것으로 출근의 서막을 연다.

그런 생각으로 해주는 백미러를 흘끔거리며 운전을 했다.

“응? 왜 안 가지?”

네거리를 지났건만, 은호의 차가 그녀의 차를 앞지르지 않았다.

마치 그녀를 호위라도 하는 듯, 느릿한 뉴비틀을 날렵한 벤틀리가 천천히 뒤따랐다.

“뭐야? 차은호.”

몹시도 의아했다. 평소의 그라면 굼벵이라고 놀리는 문자라도 보냈을 텐데 말이다. 놀리기는커녕, 그녀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아주 천천히 회사에 도착했다.

백미러를 통해 뒤를 보자 정문 앞에 세운 벤틀리에서 은호가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정확히 그녀의 차를 향해 있었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차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미쳤나 봐.”

이상할 정도로 심장이 벌렁거렸다.

집을 나서면 늘 타인처럼 멀기만 했던 사람인데, 왜 그런 시선을…….

“왜긴 왜야? 이혼 안 하려고 저러는 거지. 저런다고 누가 마음을 바꿀 줄 알고?”

퉁― 차 문을 닫는 소리가 지하 주차장에 요란하게 울렸다.

“지해주!”

걸음을 옮기는 해주 곁으로 지수가 다가왔다.

“그렇게 닫는다고 차가 부서져? 더 세게 닫아야지.”

“부수면 되겠니? 저게 얼마짜리 차인데? 나 저거 할부 갚느라 고생했어.”

새침하게 눈을 흘긴 해주가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었다. 그러자 지수가 바짝 붙어 서며 조잘거린다.

“애걔? 창성금융그룹 차은호 부회장님 사모님께서 왜 이러셔? 저 정도 차야 색깔별로 주차장에 줄지어 둘 수 있으면서?”

장난스레 던지는 말에 해주가 인상을 찌푸렸다.

“농담도?”

혀를 쏙 내밀고 헤실거리던 지수가 걸음을 멈추며 해주를 잡아 세웠다.

“해주야.”

엘리베이터에 닿기 전에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그저께 밤에 그런 모습을 보였으니 할 말이 없을 수가 있나.

“너 괜찮은 거야?”

아니나 다를까,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의 안부를 물어 왔다.

그 새벽 시간에 그녀를 위해 기꺼이 호텔까지 동행해 주고, 제 카드를 군말 없이 내준 그녀의 친구.

해주에게 지수는 그런 존재였다.

“일찍도 물어본다.”

그런 지수에게 샐쭉하게 눈을 흘긴 해주가 장난 섞인 말을 이었다.

“너 어제는 왜 전화 안 했니? 사랑이 식은 거니? 내가 집에 들어갔는지 안 들어갔는지 걱정되지도 않았어? 네 카드까지 갖고 있는데, 내가 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부회장님이 연락하셨어.”

장난스러운 해주의 말에 심각하게 미간을 찌푸린 지수가 얼른 대답을 내놓았다.

“너 호텔 데려다주고 막 나오는데, 전화가 왔어.”

그날 상황을 떠올리는지, 지수의 눈빛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다짜고짜 너한테 카드 줬냐고 물으시더라.”

이야기를 전해 듣는 해주의 눈빛도 덩달아 짙어지고 있었다.

“대답 안 하니까, ‘줬군요.’ 대번에 알아맞히는 거 있지?”

‘줬군요’에서 은호의 목소리를 흉내 낸 지수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러더니 뭐라고 그러셨는지 알아?”

이제는 눈동자 가득 공포를 담았다.

“지금부터 이 팀장 카드 사용 내역을 조회할 건데, 동의하죠? 동의해야 할 겁니다. 아니면 이 사태의 모든 책임을 이 팀장에게 물을 거니까.”

은호의 낮은 목소리를 흉내 내느라 턱을 잔뜩 내린 지수가 말을 맺더니 해주의 손을 덥석 잡았다.

“당연히 동의했어. 나도 살아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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