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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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라고요?”

    이혼 유예 청구권이라니. 그게 무슨…….

    그런 게 있었어?

    “계약서 제13조, 제2항. 이혼 유예 청구권. 만일 이혼을 요구받은 쪽이 이혼을 원하지 않을 경우 이혼 유예를 청구할 수 있으며, 이혼 유예 청구권이 발동될 경우 갑과 을은 100일간의 이혼 유예기간을 가진다.”

    계약을 시작할 당시, 이혼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주의 깊게 보지 않았던 조항이다.

    아니, 그와의 결혼을 성급하게 결정하느라 계약서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으로 흘려 보았던 게 틀림없다.

    “그 권한을 사용하겠다는 거야.”

    당황한 채 말문이 막힌 해주를 은호가 비웃듯 바라보았다.

    “앞으로 100일, 이혼 유예기간이라고.”

    “그런 게 어딨어요. 난 기억나지도 않는 조항인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비소를 흘린 은호가 코트 주머니에서 계약서 사본을 꺼냈다.

    그러고는 붉게 줄을 친 조항을 해주 앞으로 내밀었다.

    제13조 이혼.

    그의 말대로 제2항에 이혼 유예 청구권이 명시되어 있었다.

    “이게 제일 중요하지.”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그 아래 조항을 가리켰다.

    “계약서 제13조, 제3항. 이혼 유예 청구권이란 결혼을 유지하기 위한 방어권으로, 유예기간 동안 유예를 청구한 쪽의 요구 사항은 모든 계약 조건에 우선한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계약서를 읽는 해주의 인상이 구겨졌다.

    그런 해주를 바라보는 은호의 얼굴에 오만한 미소가 떠올랐다.

    “유예기간이 지나고도 이혼할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보내 줄게.”

    이미 마음의 결정을 한 듯 은호의 눈빛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네 말대로 다른 여자 구해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을게.”

    마치 선심 쓰듯 그녀의 요구를 받아들이겠다고 말하는 은호는 불어오는 늦가을 바람처럼 스산하기만 했다.

    “하지만, 앞으로 100일간은 무조건 내 뜻에 따라야 해.”

    * * *

    뜻에 따르라더니.

    “이게 뭐예요?”

    해주는 제 침대에 놓인 은호의 베개를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금부터 100일간, 한 침대 쓸 거야.”

    “미쳤어요?”

    그녀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은호가 한 일은 제 베개를 해주의 침대에 올려 두는 거였다.

    “미쳤다니. 방어권을 쓰는 거잖아.”

    “은호 씨.”

    이건 정말이지 말도 되지 않는 일이다. 차은호와 한 침대를 쓰다니.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잖아요.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각자의 방을 갖는다.”

    상기된 얼굴로 따져 들자 은호가 싱겁게 웃으며 대답했다.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어. 방어권을 가진 자의 요구 사항은 모든 계약 조건에 우선한다.”

    해주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가 보여 준 계약서에 분명히 명시되어 있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따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믿……을 수 없어.”

    “확인해 보든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은호가 그녀의 책상을 눈짓했다.

    창문 앞 제 책상으로 걸어간 해주가 비밀번호를 눌러 맨 아래 서랍을 열었다.

    그러고는 떨리는 손으로 파일에 보관해 놓은 제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

    계약서를 넘기는 손이 어지러웠다.

    제13조. 계약 조항을 따라 읽는 해주의 갈색 눈동자가 파들거리며 떨렸다.

    그런 해주를 지그시 눈에 담은 은호가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첫 번째 요구 사항이야.”

    낮게 깔린 중저음의 목소리가 숨통을 틀어막기라도 할 듯 아찔하게 울렸다.

    “앞으로 100일간, 매일 내 옆에서 잠들고 일어나.”

    해주 곁으로 은호가 천천히 다가섰다.

    “서재로 도망가는 것도 안 되고, 외박하는 것도 안 돼.”

    가까이 다가선 그에게선 시트러스 향을 품은 매혹적인 향기가 전해졌다.

    숨을 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도, 조금씩 폐부를 파고든 향기는 어느덧 심장을 옥죄었다.

    계약서 위에 올려진 손을 낚아챈 것은 그 순간이었다.

    “이제부터 네 자리는 여기.”

    은호가 해주를 잡아당겨 제 곁에 바짝 붙여 세웠다.

    “내 곁이야.”

    날숨이 섞일 만큼 가깝게 그녀를 끌어다 놓은 그가 밤보다 까만 눈을 기이하게 빛내며 말했다.

    “적어도 100일 동안은.”

    * * *

    긴 밤이 지나가고, 아침이 밝았다.

    침대 가장자리에 매달리듯 누워 잠들었던 해주가 몸을 꼼지락거렸다.

    온몸에 힘을 주고 잤더니 쥐가 날 지경이다.

    “아야야.”

    반대쪽으로 돌아누우려 몸을 움직이자 아야― 소리가 절로 흘렀다. 근육이 잔뜩 굳어 있었다.

    어젯밤 은호가 누웠던 자리로 시선을 던졌다. 비어 있었다.

    은호 때문에 잠들 수 없었던 해주는 새벽이 되어서야 간신히 눈을 붙였는데, 얄밉게도 은호는 잘 자는 듯 보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보이질 않는다.

    “어딜 간 거지?”

    광활한 킹사이즈 침대 반대편을 바라보며 해주가 몸을 일으켰다.

    아침 6시.

    해주가 눈을 떴으니 그 정도 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알람을 맞추지 않아도 귀신같이 늘 같은 시간에 일어났으니까.

    사이드 테이블에 놓인 시계를 확인했다.

    5시 49분.

    화요일은 조찬 회의가 없으니 은호의 출근 시간은 9시이다. 7시쯤 일어나 8시 정각에 아침을 먹고 출근. 그럼 아직 침대 속이어야 할 텐데.

    은호의 루틴을 꿰고 있는 해주가 의아함에 고개를 기우뚱 기울였다.

    “불편해서 자기 방에 갔나?”

    그래, 그럴지도 모르잖아? 아니, 분명히 그럴 거야.

    안도의 한숨을 나직이 흘린 해주가 막 고개를 돌리려던 참이다.

    “나 찾아?”

    욕실 문이 딸칵― 열리며 노란 조명 빛이 침대로 흘러들었다. 그리고 그 노란 조명과 함께 길쭉하게 드리운 그림자 하나.

    놀란 해주가 고개를 돌리자 막 샤워를 끝내고 욕실을 나서는 은호가 보였다.

    저절로 미간이 좁혀지고 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기가 막혔다.

    목욕 가운을 느슨하게 묶은 그가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아 내며 다가왔다.

    욕실의 노란 조명이 마치 스포트라이트인 양 은호에게 후광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반쯤 벌어진 가운 너머 보이는 근육질의 단단한 가슴, 날렵한 턱선을 타고 미끄러지듯 흐르는 물방울, 익숙한 바디워시 향기에 섞여 든 야릇한 체향. 그리고 그의 매혹적인 육체가 뿜어내는 열감.

    불과 몇 초밖에 되지 않는 짧은 순간임에도 은호의 모든 것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정말이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지해주가 막 잠에서 깬 모습이라…….”

    해주 곁으로 바짝 다가선 은호가 여상한 얼굴로 읊조렸다.

    “신혼 첫날 이후 처음이네.”

    은호의 말에 신혼 첫날을 떠올려 보았다.

    남산의 특급 호텔 스위트룸.

    커다란 침대 끝에 매달리다시피 잠들었던 해주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마주한 광경은 무척이나 놀라웠다.

    언제 일어난 건지, 완벽하게 차려입은 은호가 신문을 읽으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넥타이는 반듯했고, 머리카락은 한 올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런 그가 그녀를 무심하게 바라보며 무정한 한마디를 던졌다.

    [머리가 꼭, 사자 같군.]

    머리가 꼭, 사자 같군.

    그 뒤로 해주는 그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없었다. 아니, 그 누구에게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다.

    고개를 돌린 해주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빠르게 빗었다.

    “씻고 올게요.”

    머리를 대충 정리한 해주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앞을 막아선 은호가 길을 비켜 주지 않았다.

    “왜? 이대로도 예쁜데.”

    예쁘다는 말에 심장이 덜커덕거렸다.

    새카만 눈동자를 묘하게 빛낸 그가 그녀의 손목을 느닷없이 잡아 올렸다.

    “밥부터 먹자. 배고파.”

    배가 고프다니. 이제 겨우 6시인데.

    해주의 눈빛이 의아함으로 물들자 은호가 대번에 말을 이었다.

    “우리, 어제 점심, 저녁, 아무것도 못 먹었어. 배고플 만하잖아.”

    어제 평창동에서 돌아와서 저녁도 먹지 않은 채 계약에 관한 열띤 토론을 펼쳤다.

    계약서를 확인했고, 법적 근거를 따져 가며 해당 조항을 해석했다.

    결국, 100일간 그의 요구 조건은 무엇이든 들어줘야 한다는 사실에 동의했고, 그대로 침대에 누워 함께 잠을 청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저녁을 굶게 되었다. 밥 따위를 먹을 정신이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점심을 안 먹은 건 아니었다.

    “난 어제…….”

    정말이지 유치한 발상이었다.

    그가 ‘우리’라는 단어로 두 사람을 묶는 것이 불편하고 싫었기 때문이다.

    “점심 먹었어요.”

    점심을 먹었다는 사실을 기어코 알려 준 해주가 제 손목을 거머쥔 그의 손을 모질게 뿌리쳤다.

    그러자 은호의 미간에 세로줄이 가늘게 새겨졌다.

    “매정하네, 지해주. 난 어제 목구멍으로 음식이 넘어가질 않던데.”

    마치 상처받았다는 듯 구겨지는 눈매에 헛웃음이 날 뿐이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코웃음을 흘리자 은호의 입매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뭐, 아무렴 어때. 점심을 먹었든, 안 먹었든 아침은 둘이서 같이 먹을 건데.”

    눈 깜짝할 새 손을 다시 가져간 그가 그녀를 침대에서 일으켜 세웠다.

    갑작스러운 반동에 몸이 휘청였다.

    본능이었다. 넘어지지 않으려 무엇이든 잡아야 했다.

    그런데 그것이 하필 은호의 어깨였고, 그와 동시에 그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둘렀다.

    어쩔 수 없이 그와 몸이 닿았다.

    순간, 눈앞이 어지러울 정도로 아찔함을 느꼈다.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선 얼굴, 연한 물 냄새에 섞여 든 야릇한 향기, 애매하게 맞닿은 단단한 몸.

    그 모든 것이 해주에게 생경한 감각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지난 3년, 가짜 부부 놀이를 하며 수도 없이 마주한 얼굴이건만, 아니 수도 없이 맞닿은 몸이건만, 제대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뺨을 빨갛게 물들인 해주가 들이마신 숨을 내뱉지 못하고 파르르 떨자, 은호의 입술을 가르고 픽― 웃음이 흘렀다.

    “알았어. 그럼 먼저 씻어.”

    한 발 뒤로 물러선 그가 그녀의 몸을 놓아주었다.

    “씻고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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