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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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말이 쏟아질지 머릿속이 하얘지는 순간, 서재 안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애 붙잡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데리고 왔으면 어서 들여보내.”

    윤규였다.

    평소와 달리 노기 띤 목소리에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흘렀다.

    마지못해 길을 비킨 원정이 서재 문을 열었다.

    원정이 먼저 발을 들였지만, 윤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당신은 나가. 해주와 둘이서 이야기할 테니까.”

    “여보!”

    발을 구르며 항변하는 원정에게 윤규의 서늘한 눈빛이 내려앉았다.

    그러자 한마디도 더 말을 보태지 못한 원정이 자리를 물렸다.

    등 뒤로 문이 닫히자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뛰놀았다.

    두려움과 미안함이 뒤엉켜 심장은 물론이고 뇌까지 기능 이상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앉거라.”

    윤규의 허락이 떨어지기 전까지 얼어붙은 듯 서 있던 해주가 차마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떼어 냈다.

    자리에 앉자 윤규가 그녀를 불렀다.

    “해주야.”

    이름을 부르는 따뜻한 목소리에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 했다.

    은호와 가짜 결혼을 감행하고, 가장 좋았던 게 이거였다. 그녀에게 이름을 불러 주는 부모가 생겼다는 것.

    원정과 달리 해주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윤규는 처음에는 정말이지 무서운 시아버지였다.

    1년이 지나서야 간신히 해주를 인정했고, 그 후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시아버지가 되어 주었다.

    그래서 더 미안했다.

    “아버님, 죄송해요.”

    해주의 목소리 끝이 촉촉이 젖어 있었다.

    “네가 왜 죄송해. 내가 미안하구나.”

    야단맞을 각오를 하고 이곳에 발을 들였다. 그런데 웬걸, 오히려 윤규가 그녀에게 사과했다.

    “네 시어머니 저러는 것, 내가 대신 사과하마.”

    “아니에요, 아버님. 제가…….”

    윤규의 말에 민망함을 감추지 못한 해주가 어쩔 줄 몰라 하자 윤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신률, 그치가 왔었다며?”

    지나치게 신률을 의지하는 원정을 마뜩잖게 여기는 윤규였다.

    안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데, 별장에 몰래 들어온 데다 괴상한 짓거리까지 했다니.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아이야 천천히 가지면 될 것을, 아직 서른도 안 된 애를 데리고선.”

    쯧, 윤규가 짧게 혀를 찼다.

    “네가 어제 일로 상처받지 않았으면 하는구나.”

    대충의 자초지종은 윤규도 파악하고 있었다. 아니, 그 새벽에 원정에게 소리소리 지르는 은호로 인해 모를 수가 없었다.

    해주가 별장을 뛰쳐나가고, 그 뒤를 따르는 은호를 원정이 기어코 붙잡았다.

    [얘,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니? 오늘이 어떤 날인데.]

    성을 내며 파르르 떠는 원정에게 은호가 싸늘하게 물었다.

    [어떤 날인데요?]

    [오늘 아이를 만들어야 아들이란 말이야. 하필 이런 날 쟤는 저러고 싶다니?]

    칭얼대듯 말하는 원정에게 은호가 고함을 질렀다.

    [어머니 할 일이 그렇게 없으세요? 아니면, 작년처럼 저희 안 보고 사실래요?]

    [은호야, 난…….]

    [해주 그냥 두시라고 분명히 말했어요. 해주가 애나 낳으려고 나랑 결혼한 줄 아세요?]

    조금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지난 3년. 그저 순종적이기만 했던 해주가 처음으로 훅을 날렸고, 은호는 생전 처음으로 날것 그대로의 감정을 드러냈다.

    뭔가 지나치게 완벽하던 두 사람이 조금은 인간다워 보인 사건이기도 했다.

    “네게 사과하는 의미에서 말이다.”

    오늘 해주를 부른 목적을 조심스레 밝혔다.

    “선물을 주고 싶은데, 받아 주겠니?”

    준비해 둔 서류를 해주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해주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건…….”

    “청담동에 있는 빌딩인데, 진즉에 너 주려고 등기까지 마쳤어.”

    올 초에 해주 이름으로 명의를 옮겼다. 한 달 뒤에 있을 두 아이의 결혼기념일에 선물로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세금도 다 냈으니 넌 그냥 고개만 끄덕이면 된다.”

    하지만 해주는 곤란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수 없어요. 아버님 전…….”

    거절을 말하는 순간, 서재 문이 벌컥 열리며 은호가 들어왔다.

    “뭐가 문제야? 받아.”

    갑작스러운 은호의 등장에 놀라기도 잠시, 해주에게 다가선 그가 그녀의 손을 거칠게 낚아챘다.

    “아버지 죄송해요. 제가 해주와 할 이야기가 좀 있어서요.”

    그러고는 그녀를 힘껏 잡아당겼다.

    “너, 따라와.”

    은호의 손에 이끌려 평창동 본가 밖으로 나온 해주는 그제야 그의 손을 뿌리쳤다.

    “이것 놔요.”

    힘껏 그를 뿌리친 해주가 뒤를 돌아 평창동 저택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황당한 시선으로 은호와 해주를 바라보던 윤규의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어제에 이어, 또다시 못 볼 꼴을 보이다니. 불효도 이런 불효가 없다.

    게다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재 앞을 지키고 있던 원정은 또 어쩌란 말인지.

    “부모님 앞에서 이게 무슨 짓이에요? 적어도 인사는 하고 나왔어야죠.”

    그러자 은호의 입술을 뚫고 삐딱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이혼하는 마당에 그런 게 신경은 쓰여?”

    순간,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발밑으로 떨어져 내린 듯했다.

    이혼을 결심한 주제에, 은호의 입에서 이혼 이야기가 나오자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로 기분이 이상해졌다.

    하지만, 이런 감정을 은호에게 들킬 수는 없는 일이다.

    “이혼해 주겠다는 건가요?”

    태연한 얼굴에 서늘한 목소리.

    지난 3년간 뒤집어쓰고 있던 가면에 좀 더 힘을 주며 해주가 물었다.

    그러자 은호의 얼굴 역시 좀 더 차갑게 그림자 졌다.

    “이유나 좀 알자.”

    유려한 붉은 입술이 매섭게 휘어지며 불쾌함을 토로했다.

    “지난 3년, 아니, 불과 어제 아침까지만 해도 잘만 지냈어. 그런데, 이혼이라니.”

    다그치는 목소리에 경멸이 어린 듯해 가슴이 쓰라렸다.

    “도대체 이유가 뭐야?”

    은호 입장에서는 지나가다 날벼락을 맞은 꼴일 것이다.

    계약서대로 잘만 살다가 갑자기 감정적으로 대하는 해주가 황당하기도 할 것이고 말이다.

    “아이 때문이야? 내가 아이 갖자고 해서?”

    “맞아요.”

    틀렸지만, 맞다.

    “좀 더 복잡하지만, 기본적인 건 맞아요.”

    “알아듣게 이야기해.”

    정확하게 말하면, 그녀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의무감으로 아이를 만들려고 하는 은호 때문이다.

    아니, 이제 와서 그에게 사랑을 기대하게 된 저 자신이 비참하기 때문이다.

    아니, 더는 차은호를 비즈니스 파트너로 대할 수 없는 그녀의 빌어먹을 심장 때문이다.

    “난 당신과 달리 의무만으로는 아이를 가질 수 없어요. 아이는 계약 조항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게 아니라고요.”

    그녀의 말에 은호가 미간을 좁혔다.

    그래, 차은호는 이런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겠지.

    “적어도 아이는, 사랑으로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랑이라니. 은호와 그녀 사이에 불가능한 단 하나가 사랑인 것을.

    “그러니, 우리 사이에 아이가 만들어질 가능성은 없어요.”

    “가능성이 없다.”

    해주의 말을 되뇐 은호가 코웃음을 치며 서늘히 말했다.

    “그럼, 안 만들면 되겠네. 지금까지도 아이 없이 잘만 살았으니까.”

    “당신 4대 독자예요.”

    그녀의 결심을 흔들려는 은호에게 조금 더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창성금융그룹의 후계자를 낳아 그룹을 이을 의무가 있는 사람이라고요.”

    그녀의 첫사랑인 차은호와 부부로 살아간다는 환상에 빠져 모르는 척 무시했던 현실.

    “1년 전 일도, 어제 일도, 모두 맥락은 같잖아요. 내가 아이를 가지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란 거.”

    은호에게는 아이가 필요하다.

    “아이를 가지지 않는 한,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똑같은 일이 반복되겠죠.”

    그 빈도는 점점 잦아지고, 그 정도는 심해질 것이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아이 낳아 줄 여자를 구해요. 아니…….”

    ‘복사꽃 사주’의 여자가 나타났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었다. 은호 역시 알고 있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미 내 대타가 존재할지도 모르죠.”

    해주의 목소리 끝이 가늘게 떨렸다.

    서글픔과 안타까움에 배신감과 질투가 뒤섞인 복잡한 감정. 여태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추악한 감정에 자괴감마저 들었다.

    “그 여자 데리고 다시 계약 맺어요. 이번에는 꼭 후계자 낳는 조항까지 계약서에 포함시키고요.”

    “지해주.”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은호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가슴을 눌렀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사랑 없이 아이를 만들 수 있는 당신에게는 그편이 훨씬 안락하고, 편안한 삶이 될 거예요.”

    다 엉터리 소리였다.

    은호를 위한 게 아니라 저 자신을 위한 거였다. 응답받을 수 없는 감정에서 도피하기 위해. 그래야 그녀가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으니까.

    “진심이야?”

    해주를 바라보는 은호의 눈빛이 짙어졌다.

    그러자 심장이 또다시 들썩인다.

    시선을 피해 눈을 내리깐 해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진심이에요.”

    “좋아, 이혼해.”

    간단명료한 대답이 떨어졌다.

    “해 줄게, 이혼.”

    확고하면서도 단호한 대답이었다.

    “네 말이 맞아.”

    명료한 대답에 해주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난 후계자가 필요한 인간이고, 혼외자를 만들 수는 없어.”

    평소대로의 은호였다.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눈빛, 무감한 얼굴, 태연한 목소리.

    “내 아이는 내 법적 아내가 낳아야 하고, 날 거부하는 네게서 내 아이를 낳을 방법은 없겠지.”

    이미 계산이 다 끝났다는 듯, 대답에 막힘이 없다.

    “그래, 좋아. 이혼하자.”

    심지어 희미한 전투력마저 느껴져 의아할 지경이었다.

    그런 그에게서 의외의 말이 떨어졌다.

    “대신, 계약서대로 진행해.”

    “계약서대로……라니요?”

    “계약서 제13조, 제1항. 갑과 을은 서로에게 이혼을 요구하여 계약을 종료할 권리가 있으며, 구두 또는 서면으로 요청할 수 있다.”

    은호가 계약서의 이혼 조항을 읊었다.

    “계약서대로 을인 네가 갑인 내게 구두로 이혼을 요구한 거야. 받아들일게.”

    고개를 끄덕인 은호가 태연한 얼굴로 이혼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잠시 뜸을 들인 그의 얼굴에 엷은 웃음기가 어렸다.

    “그리고 나는 지금부터 이혼 유예 청구권을 발동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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