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65)

10

그를 향한 감정을 견고한 둑에 가둬 두고, 들키지 않을 거라고, 잘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한 그녀의 오만함 때문이다.

그래. 그 키스는 그저 그녀의 둑에 던져진 작은 돌멩이였다.

철옹성처럼 견고하다고 생각했던 둑은 하찮은 돌멩이 하나에도 터져 버릴 만큼 어설프고, 조악했고 말이다.

그 사실이 부끄럽고, 그 사실에 화가 나고, 그 사실을 부인하고 싶을 뿐이다.

“말하면요? 당신이 들어주기나 해요?”

또다시 이어지는 어설픈 자기방어.

감정을 숨기며 그에게 싸늘한 눈빛을 보내는 스스로가 역겹기만 하다.

“도대체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예요? 설마 지수를 닦달하기라도 했어요?”

“그딴 걸 왜 해. 번거롭게.”

해주의 물음에 서늘하게 답한 은호가 무심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럼, 차에 추적 장치라도 달았어요?”

그러자 이번에는 웃음을 터트린다.

“추적 장치? 맞아. 지해주에게 달아 뒀지.”

“농담하지 말아요.”

이런 상황에서조차 농담 따위를 던질 수 있는 그의 여유가 얄미웠다.

빨개진 얼굴로 바락 소리치자 웃음을 거둬들인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잠옷 차림에 휴대전화 하나 달랑 들고 나간 게 너야. 이지수 팀장에게 도움받았을 게 뻔하고, 카드 하나 정도는 받았겠지 했어.”

그의 대답에 해주의 미간이 좁아졌다.

“CS카드 쪽에 지수 카드 내역 조회시켰어요? 이 새벽에?”

“집 나간 마누라 찾는다는 소리는 안 했어.”

또다시 이어진 농담 같은 말에 해주는 기함할 뿐이었다.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카드 조회를 해.

“은호 씨, 미쳤어요? 이 새벽에 당신 직원들…….”

“그러게 왜 그랬니?”

서늘한 은호의 목소리가 해주의 입을 막았다.

“나한테서 도망쳐 봤자 기껏해야 갈 곳이 이런 싸구려 호텔밖에 없는데, 왜 이런 무모한 짓을 하는 거야? 사람 미친놈 만들어 가면서.”

그의 까만 눈동자가 노여움을 마음껏 드러내며 그녀를 다그쳤다.

이런 모습의 은호는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까만 눈동자에 섬뜩한 빛이 어렸다.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서는 은호는 새카만 밤 같다. 빛이 들지 않은 어둠. 끝없이 펼쳐진 암흑. 꼭 암울한 그녀의 마음 같다.

코앞까지 다가서는 그를 꼼짝도 하지 못한 채 바라본 해주는 짙은 슬픔에 잠겼다.

그래, 도망쳐 봤자 갈 곳이 이런 싸구려 호텔밖에 없는 그녀다. 찾아갈 사람이 기껏해야 이지수, 그 외에는 아무도 없다.

그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은호가 지독히도 잔인하게 느껴졌다.

그런 그녀에게 은호는 또 하나의 비수를 던졌다.

“다른 여자에게서 아이를 낳아?”

서늘한 목소리에 비소가 어렸다.

“내가 말했지. 혼외자 따위 만들지 않는다고.”

그녀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남자처럼 느껴졌다.

“사랑 없이 아이 만들기가 그렇게 힘들어?”

분명 분노와 뒤섞인 또 다른 감정이 있는데, 그게 도무지 뭔지를 모르겠다.

“그게 이렇게까지 싸울 일이야? 사랑 그깟 게 뭐라고.”

그 정체불명의 날카로운 감정이 뾰족한 칼날이 되어 해주를 거칠게 후벼 팠다.

“좋아, 그럼. 지금부터 널 사랑할 테니까, 너도 나 사랑해 봐. 그러면 되겠네.”

심장에 비수가 박히는 듯했다.

“차은호 씨, 정말…….”

이토록 무정한 얼굴로, 이토록 잔인한 말이라니.

“당신 최악이네요.”

너무나 차은호다운 말이라 더더욱 서글펐다.

그녀의 첫사랑은…… 그래, 원래 이런 남자였지. 여자라는 존재를 끔찍이도 싫어하고, 사랑이라는 감정을 우습게 아는 남자. 그래서 그에게 여자가 아니기로 했고, 사랑을 숨기기로 했었지.

“좋아요. 결심했어요.”

하지만 더는 그렇게 살 수 없을 것 같은 해주는 즉흥적이면서도 즉각적인 선택을 해 버렸다.

“그래요. 그게 맞겠어요.”

바짝 다가선 그에게서 한발도 물러나지 않은 해주가 도도한 눈빛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혼해요, 우리.”

* * *

이혼해요, 우리.

해주의 말에 얼어붙은 것은 은호 쪽이었다.

싸늘한 갈색 눈동자가 뾰족하게 반들거려 할 말을 잃었다.

[이혼 이야기를 하려거든 집에 가서 해. 이딴 곳이 아니라.]

결국 반강제로 그녀를 집에 데려다 놓은 그는 이른 출근을 해야만 했다.

진득하게 이야기를 나눠 봤어야 했는데, 하필 조찬 회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시간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이혼이라니.

“하!”

짙은 한숨을 내쉰 은호가 쓴웃음을 토해 냈다. 그러고는 인터폰 호출 버튼을 눌렀다.

-네, 부회장님.

“잠시 들어와요.”

그의 부름에 비서인 정 실장이 재빨리 그의 집무실로 발을 들였다.

“부르셨습니까?”

“정 실장님도 소문 들었습니까?”

심기 불편한 은호의 얼굴에 정 실장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소문…… 말씀이십니까?”

소문이라는 단어 하나에 이미 대답할 준비를 마친 정 실장은 제 상관의 표정을 좀 더 기민하게 살폈다.

“헛소문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야말로 헛소문이다.

술에 취하기는 했지만 주차장까지 반듯한 걸음으로 걸어 나왔고, 정 실장이 보는 앞에서 여자를 매정하게 뿌리쳤다.

흔한 장면이었다.

은호에게 질척대는 수많은 여자가 처참하게 내쳐지는 장면.

대부분이 엄청난 미인이었고, 개중에는 톱스타도 끼어 있을 정도로 화려한 이력이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여자의 유혹에 넘어간 적 없던 남자다. 제게는 아내밖에 없다는 듯 지조와 절개가 유난했다.

차은호는 그런 남자였다.

그런데, 그런 그를 두고, 뭐?

아버지의 여비서를 끼고 사라져서는 주차장에서 뭘 해?

정말이지 웃을 가치도 없는 헛소리였다.

그래서 떠들어 대는 직원들에게 같잖은 소리 하지도 말라며 코웃음 정도만 흘렸는데, 일이 커진 모양이다.

“어디서 흘러나온 건지 확인해 주세요.”

심각한 목소리였다.

“그날 회식 자리에 남아 있었던 임원들, 싹 다 털어 봐요.”

“네, 부회장님.”

소문의 근원을 찾으라는 명령에 정 실장이 고개를 숙였다.

“아, 그리고, 그 회장님 비서 말입니다.”

은호의 미간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박경은 씨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 여자.”

심각한 얼굴을 한 은호가 긴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무언가 깊이 생각할 때의 버릇이다.

“정보 좀 캐내 봐요. 가급적 자세하게.”

갑자기 그 여자의 정보를 캐내라니.

의아한 명령이었지만, 묻지 않았다.

은호의 곁을 지킨 지 벌써 5년. 그의 명령에 의미 없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네, 알겠습니다.”

절도 있게 고개를 숙인 정 실장이 집무실을 나서고, 은호는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한숨을 길게 내쉰 은호는 해주를 떠올렸다.

질질 끌다시피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서는 방에 내던지듯 집어넣었다. 그러자 붉어진 눈시울을 한 해주가 그를 원망스레 바라보았다.

곧 울 듯한 눈을 하고선 싸늘하게 그를 쳐다보는 지해주. 그녀의 차가운 눈빛에 이상할 정도로 가슴 가운데가 뻐근했다.

[어설프게 도망갈 생각일랑 하지도 마. 도망가려면 제대로 도망치든지.]

[네, 제대로 도망치죠. 그러니 이혼해 줘요. 아니, 계약 해지라고 해야겠네요.]

“하, 이혼.”

헛웃음이 흘렀다.

“그걸 하자고.”

좀 더 커다란 웃음이 입술을 뚫고 나왔다.

누가 봤으면 미쳤다고 할 만큼 신경질적이고, 시니컬한 웃음이었다.

그러기를 한참. 웃음을 거두어들인 은호가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래, 이혼. 까짓것, 하지 뭐.

원래의 태연한 얼굴로 돌아온 은호가 서늘한 웃음을 머금으며 집무실을 나섰다.

* * *

평창동에서 호출이 왔다.

하루 연차를 내고 집에서 쉬고 있던 해주는 평창동으로 가기 위해 준비를 서둘렀다.

많이 울었던 탓에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화장으로 가려 보려 했지만 역부족이다.

“이걸 어째.”

헛헛한 웃음을 흘린 해주는 가리는 것을 포기한 채 옷을 입었다. 회색 에이치라인 스커트에 아이보리색 트윈 니트. 재벌가의 며느리다운 단아한 복장에 자그마한 진주 귀걸이로 포인트를 주었다.

준비를 끝낸 해주는 캐시미어 코트를 끼어 입고서 집을 나섰다.

밖으로 나가자 평창동에서 보낸 기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오지 않을까 봐 직접 차를 보내다니. 지극히 원정다운 선택이다.

쓴웃음을 지은 해주는 군말 없이 까만색 세단에 몸을 실었다.

한남동 집을 떠나 평창동 시댁까지.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들이 어찌 지나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입술 끝을 짓씹으며 생각에 빠져 있던 해주는 어느새 눈에 들어온 익숙한 풍경에 손끝을 말아 쥐었다.

“도착했습니다.”

기사의 말에 말없이 고개를 까딱인 해주가 차에서 내려섰다.

거대한 저택을 바라보자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하지만 피할 수 없기에 깊이 심호흡한 그녀는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돌계단 끝, 저택 현관문 앞에 원정이 서 있었다.

“어머니.”

어색한 미소로 다가서자 원정이 땅이 꺼질 듯 한숨을 폭, 내쉬었다.

“들어가자. 네 시아버지 기다리신다.”

“네.”

평소와 달리 차가운 얼굴로 앞장서는 원정을 해주가 조용히 뒤따랐다.

거실을 지나쳐 서재로 안내한 원정이 문 앞에서 발을 멈췄다.

“해주야.”

갑자기 뒤를 돌아본 원정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네, 어머니.”

무슨 말이 나올지, 짐작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너 혹시, 불임이니?”

하지만, 지나치게 예상한 대로의 말이 튀어나오자 그건 또 그것대로 상처가 되었다.

당신의 아들에게는 조금의 하자도 없다는 듯, 아이가 생기지 않는 원인을 그녀에게서 찾고 있었다.

“…….”

차마 대답하지 못한 해주가 침묵하자 원정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깃들었다.

그녀의 침묵을 긍정이라고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너 정말…….”

다시 입을 여는 원정의 입술이 파들거리며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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