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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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섞는다는 말을 어찌 저렇게 태연하게 할까. 귓등을 빨갛게 물들인 해주가 찻잔을 거머쥐었다.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들어 올리던 해주가 순간 멈칫, 움직임을 멈췄다.

“하나만 더요.”

다시금 찻잔을 내린 해주가 오늘 온종일 궁금했던 것을 입 밖으로 꺼냈다.

“결혼하고 3년. 욕망 해소 어떻게 했어요?”

“무슨 소리야?”

“당신 말대로, 당신 남자잖아요.”

그것도 무척이나 섹시하고 지독히도 매혹적인 남자.

“참고 살지는 않았을 거잖아요.”

아무리 여자가 끔찍하다고는 하나, 성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제 새벽만 해도 그는 온몸으로 그의 뜨거운 욕망을 드러냈다.

어제가 처음이었을까? 절대 아니겠지.

그럴 때마다 그는 어떻게 욕망을 해소했을까.

“아무 여자나 안았어요? 아니면 애인이라도 있는 거예요?”

질문을 하면서도 심장이 터질 듯 아팠다. 차은호에게 여자가 있냐고 묻는 저가 비참하기만 했다.

하지만 은호는 이 상황이 퍽 즐거운 모양이다.

“글쎄, 어땠을 것 같아?”

빙글빙글 웃으며 대답한 그가 그녀의 얼굴을 관찰하듯 살폈다.

그런 그에게 제 아픈 심장을 들킬 듯해, 얼른 찻잔으로 시선을 떨어뜨려야 했다.

유백색 찻잔에 붉은 찻물이 일렁거렸다.

웃기는 일이다. 이깟 차 한잔에 없던 사랑이 생긴다니.

그렇다면 해주에게는 무용지물인 것을.

이미 마음이 차고도 넘치는데 말이다.

지난 3년, 그의 욕망을 어찌 해소했을지 그게 뭐가 중요해.

중요한 건 그녀의 마음이지.

지난 3년, 그녀의 욕망은 어찌 해소했더라. 그저 참고, 숨기고, 억누르고. 거짓으로 옷 입고, 가면을 쓰느라 수명이 깎였을지도 모르겠다.

“싫어요.”

억눌러 둔 마음이 마치 봇물처럼 터져 나오려 했다.

“난 싫어.”

이깟 차 한잔에 마음이 동한 은호가 그녀를 안으려 든다면, 견딜 수 있을까.

아니, 견딜 수 없다.

“당신하고 그 짓, 하기 싫어.”

사랑 없이 나누는 육체적 관계.

그 상대가 차은호라면 더더욱 견딜 수 없다. 아니, 비참함에 죽어 버릴지도 모르겠다.

찻잔을 부술 듯 내려놓은 해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 말고도 당신 상대해 줄 여자 많을 테니, 딴 데 알아봐요.”

손끝이 파들거리며 떨리고,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이왕이면 그 여자에게 아이도 낳아 달라 하고.”

그러고는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로 인해 은호의 표정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어쩌면 다행이었다.

구질구질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터트려 버린 그녀를 은호가 얼마나 차가운 눈으로 바라봤을지.

그 차가운 눈빛을 눈에 담았다면 분명 몇 곱절 깊게 상처받았을 것이다.

* * *

웃기는 꼴이었다. 플란넬 잠옷에 맨발, 머리는 젖은 채다.

계단을 내려오던 중 원정을 마주친 듯한데, 도저히 얼굴을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아 그대로 지나쳤다.

현관을 나오자마자 마주한 은호의 비서에게서 차 키를 빼앗듯 받아서는 그대로 차에 올랐다.

황당한 얼굴과 당황한 목소리.

뭐라고 말한 것 같은데, 기억나지 않는다.

새벽 1시.

휴대전화 하나 달랑 가지고 양평을 떠난 해주는 서울까지 멈추지 않고 달렸다.

몇 통의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감정의 봇물이 터질 대로 터져 버려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눈물을 흘려야 했다.

집으로 돌아가 다시 은호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기에 그대로 지수의 집을 향했다.

다행히 지수가 전화를 받아 주었다.

“지수야, 나 좀 도와줘.”

흐느끼듯 내뱉는 해주의 말에 지수가 당장에 아파트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코트, 운동화, 카드 하나.

해주가 부탁한 물건들을 내민 지수는 자초지종을 캐묻지 않았다.

그저 그녀 대신 차를 몰고 제집에서 가장 가까운 호텔에 데려다준 지수는 그녀가 방에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어서 들어가. 아무 생각 하지 말고, 푹 자고.”

친정이 없는 해주에게 있어 가장 가까운 존재. 그런 지수에게조차 제 속사정을 그대로 말할 수는 없다는 게 서글펐다.

“지수야.”

문을 열고 객실로 들어서던 해주가 뒤를 돌아보았다.

“은호 씨에게는…….”

곤란한 표정으로 뒷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부회장님께는 아무 말도 안 할게.”

아마도 부부 싸움을 하지 않았나, 생각하는 모양이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이유 또한 충분했고 말이다.

“내일 연차 처리도 확실하게 할게.”

위로하듯 상냥한 목소리를 던지는 제 친구에게 해주는 어설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마워.”

민망함과 고마움이 공존하는 표정을 지어 보인 해주는 얼른 방으로 들어왔다.

등 뒤로 문이 닫히자 그제야 숨이 쉬어졌다.

심장이 뿜어내는 열기가 더운 한숨이 되어 터져 나오자 또다시 눈가가 습해졌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코트를 입은 채 침대에 털썩 엎드린 해주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 감정을 추슬러 보려 애쓰며 머릿속을 비워 내려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차갑게 번뜩이던 은호의 까만 눈동자가 잔상처럼 떠돌았다.

잠이 들기는 글렀다.

* * *

잠이 들 것 같지 않았건만, 피곤했던지 설핏 잠에 빠진 해주는 무서운 꿈을 꿨다.

복사꽃 사주를 가진 또 다른 여자.

그 여자를 평창동 집에 데리고 온 원정이 커다란 식탁, 해주의 자리를 내준다.

은호와 윤규가 들어오고 식사가 시작된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랬던 듯, 함께 웃고 떠들며 식사를 마친 그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2층으로 올라간다.

별장? 이번에는 평창동 집이 아니라 양평의 별장이네.

여자가 이끄는 대로 계단을 밟은 은호는 동편 방으로 들어선다.

야릇한 향냄새, 붉은 차.

원정이 준비해 준 모양이다.

어느새 얇은 아사 잠옷으로 옷을 갈아입은 여자가 은호에게 느리게 다가선다.

유혹하듯 끈적이고, 몹시도 매혹적인 몸짓이다.

두 사람의 입술이 맞물리고, 은호의 손이 여자의 몸을 헤집는다. 토요일 새벽, 그녀의 몸을 더듬었을 때처럼 말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결국…….

“헉, 싫어.”

토하듯 숨을 내뱉은 해주가 눈꺼풀을 반짝 들어 올렸다.

“꿈이야?”

불쾌한 꿈이고, 무서운 꿈이었다.

호텔 방. 서늘한 침대 위에 누워 있건만, 얼마나 식은땀을 흘린 건지 온몸이 땀에 젖었다.

부스럭거리며 움직인 해주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딩동.

벨이 울렸다.

시간을 확인한 해주가 눈을 가늘게 떴다.

“……누구지?”

새벽 5시. 이 시간에 지수가 왔을 리 없는데.

머뭇거리는 새, 다시 벨이 울렸다.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린 해주는 숨을 죽였다.

왠지, 지금 벨을 누르는 이가 누구인지 알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설마…….”

그녀의 설마를 확인이라도 시켜 주려는 듯, 노크와 함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해주, 문 열어.”

순간, 목구멍이 좁혀지기라도 하는 듯 숨이 막혔다.

저 남자가 여길 어떻게. 아니, 여길 왜.

소리가 나오지 않을 만큼 좁혀질 대로 좁혀진 목구멍에 극도의 통증이 동반되었다.

꼼짝 못 한 채 얼어붙은 해주는 신경질적으로 울리는 벨 소리와 노크 소리에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질 뿐이다.

아무리 벨을 눌러도 문이 열리지 않자, 지극히 차은호다운 반응이 돌아왔다.

“이 시간에 호텔 사람들 다 깨울 생각 아니면, 문 여는 게 좋을 거야.”

더는 벨을 누르지도 않았다.

서늘하고도 강압적인 목소리로 마지막 경고를 던질 뿐이다.

“부숴서라도 들어갈 테니까.”

하, 역시 차은호.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간신히 움직인 해주가 코트 깃을 꼭 여미며 침대를 나섰다.

열 걸음도 채 되지 않는 거리를 걷는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은호를 마주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다시 그를 본담.

더는 태연해질 수 없는데.

아랫입술을 짓씹은 해주가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그러고는 먹히지도 않을 말을 던졌다.

“그냥 가요. 며칠 쉬고 들어갈 테니까.”

돌아갈 거라고, 기대하며 던진 말은 아니었다. 그저 혼자 있게 내버려 달라는 작은 부탁 같은 거였지.

아니나 다를까. 은호는 그녀의 부탁을 간단히 묵살했다.

“창성금융의 신임 부회장이 부부 싸움 끝에 호텔 문을 때려 부쉈다고 기사가 떠도 좋아?”

농담이나 협박이 아니었다.

그는 제가 던진 말은 반드시 실천에 옮기는, 그런 사람이니까.

턱에 힘을 주자 입술 안쪽 살이 터졌다.

입술을 씹고 있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너무 힘껏 깨문 모양이다.

비릿한 피 향기에 미간을 좁힌 해주가 결국 문을 열었다.

철컥.

문이 열리자 차가운 공기와 함께 익숙한 향이 그녀의 폐부를 훑었다.

커다란 은호의 실루엣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싶더니 손목이 확 당겨졌다.

방으로 들어서며 손목을 잡아챈 그가 그녀를 침대 쪽으로 잡아당겼기 때문이다.

힘으로도, 그 무엇으로도 차은호를 이길 수 없다.

그래서 떼어지지 않는 걸음을 간신히 떼어 내며 그가 이끄는 대로 따랐다.

“너 뭐야.”

그녀를 던지듯 내팽개친 은호가 서늘한 얼굴로 물었다.

“도대체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뭐가 문제야?”

잠시 잡혔던 손목에 통증이 일었다.

하지만, 심장의 통증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말을 해야 알 것 아니야.”

말을 해야 한다. 알고는 있다.

그와 그녀가 지난 3년, 완벽한 비즈니스 파트너로 지낼 수 있었던 이유는 뭐든 서로 공유했기 때문이다.

서로의 마음과 몸을 제외하고는 뭐든 공유하는 사이.

그게 약속된 첫 번째 조건이었고, 두 사람의 가짜 결혼을 탄탄하게 만들어 준 비결이기도 했다.

그런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틀어져 버린 걸까?

토요일 새벽, 그가 갑자기 한 키스 때문에?

아닐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애초에 첫사랑인 남자와 이딴 거래를 한 그녀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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