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65)
  • 8

    “누가 유혹을…….”

    기가 막혀 콧김을 뿜던 해주가 입술을 닫았다.

    차라리 차분히 은호에게 사실을 털어놓고 도움을 구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어머니가 신률 도사님께 날을 받으셨어요.”

    “날?”

    고개를 끄덕인 해주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오늘 합방하면…… 아들을 낳을 거래요.”

    순간, 은호의 미간이 바짝 좁혀졌다.

    “그래서 합방하게?”

    “미쳤어요?”

    발끈한 해주가 은호에게서 등을 돌렸다.

    미간을 좁히며 서늘한 눈빛을 보내는 은호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표정의 변화가 놀라움인지, 불쾌함인지. 어떻게 따지고 들어도 상처가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최대한 심드렁한 목소리를 꾸며 냈다.

    별일 아니라는 듯, 어차피 쇼라는 듯.

    “그냥 시늉만 하자는 거예요. 우리가 이 방에서 뭘 하는지까지 감시하지는 않을 거잖아요.”

    애써 목소리의 떨림을 감춘 해주가 다시 욕실을 향했다. 얼른 잠옷을 입고, 얼른 잠에 빠져야지. 그래서 아침이 되면 얼른 여길 도망쳐야지. 그런 생각뿐이었다.

    욕실로 들어간 해주가 문을 닫았다.

    “세상에.”

    잠옷을 펼쳐 본 해주는 기가 막혀 말문이 막혔다.

    “이렇게 다 비치는 옷을 어떻게 입으라고.”

    속옷까지 빼앗긴 마당에, 맨몸에 이걸 어떻게 입어. 속이 다 비칠 텐데.

    잠옷 속에 손바닥을 넣어 보자 손금까지 확인될 만큼 얇은 천이었다.

    어떡하지. 그렇다고 벗고 잘 수도 없고.

    목욕 가운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일부러 치운 건지 찾을 수가 없다.

    그때 그녀의 등 뒤로 문이 벌컥 열렸다.

    깜짝 놀란 해주가 느슨해진 수건을 여미며 뒤를 돌아보았다.

    “왜, 왜요?”

    해주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런 해주를 찐득하게 눈에 담은 은호가 무감한 목소리로 물었다.

    “진짜 여기서 잘 거야?”

    “방법 있어요? ……이러다가는 이혼당하게 생겼는데?”

    해주의 목소리 끝이 흔들리고 말았다.

    “무슨 소리야?”

    둘 사이에 이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계약 해지가 존재할 뿐이지.

    그런 그녀에게 신률과 원정은 이혼의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

    “당신, 4대 독자잖아요.”

    손이 귀한 집안의 외아들.

    그런 아들이 홍염살로 인해 단명한다고 했으니, 원정은 평생을 불안하게 살았을 것이다.

    복사꽃 사주의 아내와 결혼해서 목숨을 구하나 했는데, 이번에는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

    “대가 끊기게 생겼는데, 얼마나 불안하시겠어요. 그러니 대충 장단이라도 맞춰 드려…….”

    “입어.”

    그녀의 말을 자른 은호가 불쑥 옷가지를 내밀었다.

    두툼한 재질의 남자 잠옷.

    “이건…… 당신 거잖아요.”

    잠옷을 받아 든 해주가 놀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난 벗고 자도 돼. 원래도 벗고 자고.”

    여전히 무감한 목소리이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무감하지 않았다.

    새카만 우주를 닮은 눈동자가 이채를 띠고 번뜩였다.

    “그리고, 오늘 여기서 자고 가겠다는 네 선택, 후회하지는 마.”

    * * *

    수건을 벗고 커다란 잠옷을 입은 해주가 욕실 밖으로 나왔다.

    제대로 말리지 않아 물기가 흐르는 긴 머리카락에 플란넬 소재의 두툼한 잠옷.

    발그레하게 물든 뺨과 수줍은 듯 흔들리는 눈동자.

    마치 신혼 첫날밤의 해주를 떠오르게 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신혼여행을 가지 않은 두 사람은 남산에 있는 H호텔에서 첫날밤을 가졌다.

    뜨거운 밤을 보내라는 친구들의 메시지가 이어졌고, 윤규와 원정은 아들 부부의 첫날밤을 위해 최고급 샴페인을 보내기까지 했다.

    그날 샤워를 끝내고 나온 해주의 표정이 딱 저랬던 듯하다.

    어색한 미소와 수줍은 눈동자. 젖은 머리카락과 야릇한 냄새.

    그런 해주에게 샴페인 한잔을 건넨 은호는 그저 태연히 잠자리에 들었었다.

    손 한번 잡지 않고 말이다.

    “갈아입었네?”

    그날처럼 무감한 시선을 보낸 은호가 그녀에게 찻잔을 내밀었다.

    “와서 차 한잔해. 벗고 있느라 추웠을 텐데.”

    그러자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가 서둘러 다가왔다.

    “은호 씨, 그 차는…….”

    당황한 듯 흔들리는 눈동자가 제법 귀여웠다.

    “왜? 뭐라도 탔대?”

    은호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그게…….”

    잠시 말을 멈춘 해주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자 매끈한 목선이 여리게 흔들린다.

    “어머니가 자기 전에 꼭 마시라고 말씀하셨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녀의 입술과 목을 바라보던 은호의 시선이 해주의 시선과 맞물렸다.

    “그럼, 되게 되게 수상한 거잖아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금 이 방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되게 되게 수상한 것뿐이야.”

    고개를 끄덕인 은호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저 향도, 네 목욕물도, 그리고 너도.”

    어느덧 해주에게 멈춰 선 까만 눈동자가 이채를 띠고 빛났다.

    “거기다 겨우 차 한잔 정도 더 한다고 해서 뭔가 극심해지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러고는 다시 한번 그녀 몫의 찻잔을 툭 건드린다.

    “마셔, 효도해야지.”

    웃음을 참고 있는 듯 은호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그런 은호를 원망스레 바라본 해주는 체념한 듯 의자에 앉았다.

    결국 은호의 입술을 뚫고 픽― 웃음이 흘렀다.

    해주의 맞은편에 자리한 은호가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워 냈다.

    “이제 진지하게 이야기해 보지.”

    답답하게 목을 조르고 있던 넥타이를 풀어낸 그가 본론을 꺼냈다.

    “이혼이라니, 무슨 말이야?”

    이혼당하게 생겼다는 해주의 말이 께름칙하기 짝이 없었다.

    “그저 짐작만으로 한 이야기는 아닐 거잖아. 뭐가 더 있지?”

    그의 물음에 해주의 낯빛이 하얗게 물들었다.

    안 그래도 복잡하던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졌다.

    그녀를 대체할 수 있는 여자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은호가 알게 되면, 화를 낼까, 반길까.

    아무것도 판단하지 못한 해주는 그저 입을 다물기로 했다.

    “없어요. 아무것도.”

    시선을 내린 해주가 고개를 저었다.

    그때였다. 은호가 뜻밖의 말을 불쑥 던졌다.

    “아이, 생각 있어?”

    놀란 해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네?”

    “나와 아이 만들 생각 있냐고 묻는 거야. 효도하고 싶은 거잖아, 너.”

    그녀를 바라보는 까만 눈동자가 비소를 품었다.

    “아니, 이혼당하기 싫은 건가?”

    피식― 웃음을 흘린 은호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말을 이었다.

    “이렇게 눈속임만으로 아이가 생기는 것도 아닌데, 일단 뭘 해야 생길 거 아니야.”

    당황으로 물든 해주의 갈색 눈동자가 파들거리며 떨렸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은호는 좀 더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할 거냐고 묻는 거야, 섹스.”

    노골적인 단어에 한층 더 놀란 해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마른침을 삼켰다.

    “네가 한다고 하면, 계약서 수정하고.”

    계약서를 수정한다니, 스킨십 조항을 말하는 건가. 계약서 그 어디에도 아이에 대한 조건은 없는데.

    무섭도록 쿵쾅거리는 심장을 애써 잠재우며 해주는 차분해지려 노력했다.

    차은호와 그녀 사이에 아이라니.

    아니, 그와 그녀가 관계를 맺는다니.

    상상해 본 적은 있지만, 가능할 거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다.

    마른침을 삼킨 해주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은호 씨는 나와 할 의향이 있다는 거예요?”

    목에 이물질이라도 걸린 듯, 목소리가 잘 새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이런 대화가 이토록 힘든데, 은호는 너무나 쉽게 답을 내놓는다.

    “못 할 이유 없잖아. 넌 여자고 난 남자고, 우린 부부인데.”

    너무나 심드렁한 대답이라 김이 다 샐 지경이었다.

    그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은 안다.

    그녀는 여자고, 그는 남자고, 둘은 부부다. 부부가 육체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

    하지만,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런 관계를 맺을 정상적인 부부가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보통의 부부가 가진 ‘사랑’이라는 기반이 없다.

    “사랑 없이 어떻게 그 짓을…….”

    “그 짓이라니, 아이를 만드는 행위인데. 모든 종류의 생명체가 다 하는 거잖아. 생식 행위.”

    은호는 부부 사이의 육체적 관계를 아이를 만드는 행위라고 말한다.

    그저 단순히 아이를 만들기 위한 생식 행위라고.

    “사랑 없이 아이를 어떻게 만들어요.”

    해주의 목소리 끝에 물기가 어렸다.

    그런 해주에게 은호는 좀 더 잔혹한 말을 던졌다.

    “사랑 없이 결혼도 했으면서.”

    “그게 이거랑 같아요?”

    발끈한 해주가 입술 끝을 짓씹었다.

    “당신은…… 사랑 없이 그게 가능해요?”

    “못 할 것 없지. 난 남자잖아.”

    순간, 불룩해진 은호의 앞섶이 떠올라 대번에 그의 말을 이해해 버렸다.

    그래, 남자는 그런 동물이지. 아무 여자에게나 욕정을 느끼고, 그 순간 배설해 버리고 나면 그만인.

    눈시울이 홧홧해지고 코끝이 시큰해진 해주는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 발끝까지 힘을 꼭 주었다.

    그런 해주를 은호의 까만 눈동자가 꿰뚫을 듯 바라보았다.

    “혹시 알아? 이 차를 마시면 없던 사랑이라도 생길지? 아니면, 사랑이 없어도 그게 가능하거나.”

    찻잔을 들어 올린 은호가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고는 해주에게도 얼른 마시라며 눈짓을 보냈다.

    가슴이 아릿해졌다.

    이깟 차에 의지해야 그녀를 품을 수 있을 만큼 그의 마음은 차가운 모양이다.

    “하나만 물을게요.”

    목소리가 비집고 나오자 목구멍이 아렸다. 꼭 돌덩이라도 삼킨 기분이다.

    “내가 거부하면, 나 말고 다른 여자를 통해서라도 아이를 낳을 건가요?”

    최대한 태연해지려 노력한 해주가 담담히 물었다. 그러자 은호의 미간에 가느다란 세로줄이 그려졌다.

    “혼외자를 만들 거냐고, 묻는 거야?”

    “이를테면요.”

    해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난 혼외자 따위는 만들지 않아. 창성의 명성에 먹칠할 수는 없잖아?”

    지극히 차은호다운 대답이었다.

    그래, 그는 그럴 것이다.

    밖에서 여자를 안을지언정, 제 발목을 잡을 그 어떤 빌미도 주지 않겠지.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 금융회사로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창성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입술을 꼭 다문 채 그를 바라보고 있자, 은호가 그녀의 찻잔을 눈짓했다.

    “마셔. 마시고 생각해. 나와 몸을 섞을 건지 말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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