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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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불면증까지 겪으면서, 그더러는 이해하라고 말했다.

    [뭘 어떻게 해야 CCTV 단 것을 이해할 수 있는데?]

    [불안하신 거예요. 내가 어머니처럼 아이를 못 낳게 될까 봐. 차씨 가문의 대가 끊길까 봐.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어머니를 원망해요. 먼저 속인 건 우린데?]

    그런 이유로 원정을 한마디도 더 추궁하지 않은 은호는 그대로 2층을 향했다.

    동편 방.

    양평 별장에서 가장 아름다운 방이다.

    별장을 지을 때 원정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만든 방인데, 정작 그녀는 한 번도 사용해 보지 못했다고 들었다.

    윤규가 2층 계단을 밟으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덕에 동편 방은 양평 별장을 찾는 손님 중 가장 귀한 존재를 위한 방이 되었다.

    그 방에 해주를 넣어 두고, 또 무슨 꿍꿍이인 건지. 부적이라며 귀걸이를 선물했을 때 데리고 떠났어야 했다.

    인상을 찌푸린 은호가 방으로 들어섰다.

    방 안 가득, 묘한 향이 흘러넘쳤다.

    아마도 향을 피워 둔 모양이다.

    제일 먼저 커다란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겉 커버가 벗겨진 침대 위에 세트로 보이는 잠옷 두 벌이 놓여 있었다.

    기가 막혀 코웃음을 흘린 은호가 방을 둘러보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티 세트, 반쯤 열린 창문과 펄럭이는 커튼, 옷걸이에 걸린 은회색 드레스.

    불어 들어오는 바람결에 하늘거리는 드레스를 보자, 해주의 살 내음이 나는 듯하다.

    느리게 다가선 은호가 드레스 자락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그때였다.

    달칵, 소리가 들리더니 욕실 문이 삐죽 열렸다.

    “어머니……?”

    애교 섞인 목소리가 원정을 찾았다.

    “어머니, 저 다 씻었어요. 잠옷 안 주세요?”

    조용히 속닥거리는 목소리가 퍽 정겹기도 했다.

    정말로 여기서 자기라도 하겠다는 건지.

    한숨을 짤막하게 내쉰 은호가 침대로 걸어가 잠옷을 집어 들었다.

    얇은 아사 잠옷.

    평소에 해주가 입는 것과 비슷한 디자인이다.

    “뭐야, 잠옷이 죄다 어머니 취향이었던 거야?”

    헛헛한 웃음을 흘린 그가 한 줌도 안 되는 잠옷을 들고 욕실로 다가갔다.

    인기척을 느낀 걸까. 삐죽 열린 문틈으로 하얀 손이 살며시 내밀어졌다.

    뭉게뭉게, 욕실의 수증기가 문틈으로 빠져나오며 아로마 향기와 뒤섞인 그녀의 살 내음을 은은히 전해 주었다.

    지해주, 그녀는 알까.

    제가 뿜어내는 향기가 얼마만큼 자극적이고 야한지.

    하얗게 팔랑거리는 손을 지그시 눈에 담은 은호는 잠옷을 전해 주려 손을 뻗었다가 다시 거둬들였다.

    “어머니?”

    아직도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둔감한 제 아내가 조금은 원망스럽다.

    그래서였다.

    잠옷 대신 손을 내민 이유가 말이다.

    * * *

    커다란 욕조에 보랏빛 물이 넘실댔다.

    원정의 말로는 아로마 오일을 넣었다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아 찜찜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거부할 명분이 없었던 해주는 보랏빛 물에 1시간이나 몸을 담가야 했다.

    무엇을 넣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몸이 나른해지는 것만은 확실했다.

    나른하면서도 몽롱한 기분이 든다고나 할까. 바짝 굳어 있었던 어깨가 풀리고, 다리가 느슨해졌다.

    욕조에 몸을 담그며 조금 전의 일을 떠올렸다.

    깨끗한 몸과 정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기만 하면 된다고 말한 원정은 기어코 해주에게 대답을 받아 냈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해주에게 신률의 엄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작은 사모님의 사주가 특이하다고는 하나,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요. 그 자리를 대신할 ‘복사꽃 사주’의 여자가 또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해주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똑똑한 분이시니, 내 말뜻은 금방 이해하실 겁니다.]

    [대를 잇지 못하면, 쫓겨난다는 이야기인가요?]

    그녀의 짐작이 맞은 모양이었다.

    눈치를 살피던 원정이 두 손을 휘저으며 펄쩍 뛰었다.

    [아니야, 해주야. 대를 잇지 못한다니? 왜 그런 말을 해. 너 금방 아기 가질 거야. 걱정하지 말라니까?]

    쫓겨날 걱정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임신 걱정을 하지 말라니. 결국, 아이를 갖지 못하면 쫓아내겠다는 뜻이잖아.

    생각지도 못한 협박에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는 듯했다.

    [그러니까 넌 아무 걱정도 하지 말고, 그냥 은호에게 사랑받기만 하면 돼.]

    고운 눈웃음을 지은 원정이 다정한 손길로 해주의 귀밑머리를 뒤로 넘겨 주었다.

    섬뜩한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해주의 입꼬리가 파들거리며 떨렸다.

    대를 잇지 못하면 쫓겨난다니,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경우의 수다.

    진짜 결혼이 아니라 계약에 의한 비즈니스 관계였기에, 아이나 이혼에 관하여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다.

    그렇게 원정의 손에 이끌려 2층으로 올라오기 전, 뒤돌아본 해주가 신률에게 물었다.

    [도사님, 3년 전에 그러셨죠? 복사꽃 사주는 백 년에 한 번 태어날까 말까 한 아주 귀한 사주라고. 그런데, 그런 사주의 여자가 또 있다니. 저와 같은 사주의 여자를 이미 찾으신 건가요?]

    신률은 끝까지 해주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다만, 오만한 눈빛으로 해주를 짓누르듯 바라볼 뿐이었다.

    “찾은 모양이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데도 한기가 들었다.

    그녀가 아이를 갖지 못하는 게 확실해지면, 그녀를 대신하도록 여자가 준비되어 있다.

    그래서 원정의 눈빛이 그토록 불안정했던 거야.

    “하, 기막혀.”

    이 사실을 은호는 알고 있을까.

    모르고 있다면, 알려야 할까.

    머릿속이 복잡해진 해주는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아 보랏빛 물에 머리를 푹 담갔다.

    1, 2, 3, 4, 5…….

    참을 수 있을 만큼 숨을 참으며 생각을 떨쳐 내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꼬리에 꼬리를 물고 불길한 생각들이 확대되어 갔다.

    그러다 문득 그녀가 아닌 다른 여자를 품고 있는 은호를 떠올렸다.

    다정하게 시선을 맞추며 춤추는 두 사람, 유려했던 춤이 끝나자 손등에 입을 맞추는 은호. 서로 마주치는 시선이 뜨겁다. 손등을 떠난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향한다. 조심스럽게 다가서서는 부드럽게 맞물리는 입술, 움직임이 커질수록 가빠지는 호흡과 뜨겁게 타오르는 심장. 천천히 드레스가 벗겨지고, 기어코 하나가 된다.

    “읍!”

    물속이라는 것도 잊은 채 숨을 들이켠 해주는 콜록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미쳤어. 어떻게 이런 망측한 생각을.”

    다른 여자로 시작했던 망상이었건만, 어느새 그녀가 되어 은호를 느끼고 있었다.

    욕조에서 벌떡 일어난 해주는 커다란 수건을 펼쳐 몸을 닦았다.

    “그런데, 옷이…… 없네.”

    몸을 닦고서 습관처럼 선반으로 손을 뻗었지만, 준비된 옷이 없었다.

    양평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한다고는 생각지도 못했기에 여별의 옷이나 속옷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미간을 좁힌 해주가 욕실 문을 쳐다보며 원정을 기다렸다.

    욕실로 해주를 데리고 들어와서는 다짜고짜 드레스를 벗겨서 가지고 나가더니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속옷이랑 잠옷을 가져다주신다더니, 아직인가?”

    수건으로 몸을 꽁꽁 싸맨 해주가 문밖으로 귀를 기울였다.

    언뜻 발소리를 들은 듯했다.

    “어머니?”

    조심스럽게 문을 연 그녀가 원정을 조용히 불렀다.

    “어머니, 저 다 씻었어요. 잠옷 안 주세요?”

    묵직한 발소리였다.

    원정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무게감이었지만, 원정이 아니면 누구겠냐는 안일한 생각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문틈으로 손을 내밀었다.

    조금이라도 잠옷을 빨리 받기 위한 제스처였다. 그런데, 웬걸. 손가락 끝에 잠옷이 살짝 닿더니 금세 사라졌다.

    불길한 생각이 든 것은 그때였다.

    열린 문틈으로 차가운 공기가 밀려들었다.

    “어머니?”

    선득하게 한기가 들어 어깨를 움츠린 해주가 미간을 좁혔다.

    원정이 아닌 거야? 그럼 누구……?

    머리가 해답을 찾기도 전에 본능이 답을 먼저 찾아냈다.

    차은호?

    문밖으로 내밀어져 있는 그녀의 손목에 익숙한 감촉이 닿았다.

    무정하지만 뜨겁고, 단단하지만 부드러운 은호의 손이다.

    놀란 그녀가 손을 물리려 했지만, 잡아당기는 은호가 빨랐다.

    몸을 가리고 있는 수건을 놓칠세라, 한 손으로 수건 끝을 꽉 부여잡은 해주가 활짝 열린 문밖으로 당겨졌다.

    새된 비명이 그녀의 입술에서 흘렀다.

    “은호 씨.”

    은호의 코앞까지 끌려간 해주가 그를 원망스레 쏘아보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에요?”

    “무슨 짓이냐고? 사라진 내 아내를 찾는 중이었지.”

    해주의 물음에 태연히 대답한 은호가 미간을 슬쩍 좁혔다.

    “그런데 넌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일까?”

    커다란 수건으로 몸을 아슬아슬하게 가린 해주는 뺨을 붉게 물들이며 그의 손을 떨쳐 냈다.

    “보면 몰라요? 계약 이행 중이잖아요.”

    수건 끝자락을 단단히 여민 해주가 새침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은호의 한쪽 눈썹이 삐뚜름하게 올라섰다.

    “계약 이행?”

    “당신 부모님에게 그럴듯한 며느리가 되라면서요. 그래서 지금 효도하는 중이라고요.”

    “효도?”

    은호는 실소하고 말았다.

    “여기서 하루 자고 가라는 아버님, 어머님 말씀에 순종하는 중이에요.”

    나원정 여사가 해주에게 요구한 효도가 과연 여기서 자고만 가는 걸까.

    절대 아닐걸.

    한쪽 입술 끝을 비스듬히 말아 올린 은호가 재미있다는 듯 해주를 바라보았다.

    “그게 다야?”

    웃음기가 묻어나는 목소리에 놀린다고 생각한 걸까. 뾰족한 시선을 은호에게 보낸 해주가 그의 손에 들린 잠옷을 빼앗듯 낚아챘다.

    “아니면요?”

    뭐가 더 있겠냐며 고개를 바짝 치켜올린 해주가 도도하게 물었다.

    그런 해주를 향해 코웃음을 흘린 은호가 테이블 위의 향을 가리켰다.

    “저 향이 뿜어내는 이상한 냄새가 네 몸에서도 나.”

    그러고는 그의 시선이 해주의 손에 들린 잠옷을 향했다.

    “그런 야한 잠옷에, 수상한 차에……. 효도 차원으로 날 유혹하기라도 하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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