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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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취해서 걸을 수 없을 정도였어.”

    갑자기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해주가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술 깨워서 들어가느라 호텔 주차장에 잠시 머물렀던 거야.”

    지금, 그는 소문에 대해 변명하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

    어느새 움직임을 멈춘 은호가 진지하게 말했다.

    “내 알리바이는 정 실장이 증명해 줄 거야.”

    믿어 달라는 듯, 검은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빛났다.

    “증명할 필요 없어요. 은호 씨 말이면 충분하니까.”

    사실, 그런 것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여자라면 몸서리치는 남자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런 은호가 여자에게 현혹되어 그런 짓을 저질렀을 리 없다.

    해주가 걱정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노골적으로 저를 유혹하는 여자를 두고 집으로 돌아온 은호.

    그런 은호가 그 여자로 인해 시각적 흥분 상태였을지. 그래서 그 격한 욕망을 그녀에게 푼 건 아닌지.

    “새벽에 집에 들어왔을 때.”

    말을 꺼내는 목구멍이 따끔따끔하다.

    “맨정신이었어요?”

    “글쎄. 어땠을 것 같아?”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그를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은은한 미소를 품은 그가 또다시 물어 왔다.

    “그러니까 내 말은, 넌 어떤 대답을 원하냐고.”

    그녀는 어떤 대답을 원하는 걸까. 혼란스럽기만 했다.

    맨정신이었어도, 아니었어도.

    그녀가 진실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말을 잃은 해주는 그저 연한 갈색 눈동자를 떨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침묵이 길어지자 결국 은호가 먼저 입술을 열었다.

    “말했잖아.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술에 많이 취했었다고.”

    뭉근하던 눈빛이 온기를 잃어 갔다.

    “맨정신이었겠어?”

    또다시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한 은호는 그 후, 차가운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래서 더욱 혼란스러웠다.

    맨정신이었든 아니었든, 그가 그녀에게 키스한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차은호는 도대체 왜 그런 키스를 그녀에게 퍼부은 걸까?

    입술이 살짝 닿았다 떨어지는 버드 키스도 아니고, 정말이지 욕정을 가득 품고 파고드는…… 아찔한 키스였다.

    그가 그녀에게 그런 키스를 할 이유가 전혀 없었기에 해주의 머릿속은 점점 복잡해져만 갔다.

    은호는 지난 3년간 단 한 번도 그녀를 이성으로 대하지 않았다.

    연극을 위해 손을 잡거나 끌어안은 적은 있지만, 입술을 부닥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런 은호가 계약 조항을 어겨 가면서까지 그녀를 안으려고 했던 게 만약 다른 여자 때문이라면?

    행여 다른 여자로 인해 잔뜩 달아오른 몸을 풀기 위해, 술기운을 빌려 정욕을 해소하려 한 거라면.

    더는 이 연극을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이다.

    그런 해주의 혼란스러움에 방점을 찍은 것은 파티가 끝나고 난 후였다.

    * * *

    밤 11시. 양평 별장에서 성대하게 열린 파티도 이제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미 반 정도의 손님이 돌아갔고, 떠들썩하던 파티도 점차 조용해지는 중이었다.

    먼저 귀가하는 지수를 배웅하고 들어온 해주를 원정이 조용히 불렀다.

    “해주야.”

    행여 누가 볼까, 복도 안쪽에 숨어 있던 원정이 그녀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 봐.”

    그녀의 시아버지인 윤규는 그룹 임원들과 포커를 치고 있고, 은호는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원정 역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임원 사모들과 티타임을 갖고 있었는데…….

    불길한 예감에 미간을 좁힌 해주가 원정에게 다가갔다.

    “어머니? 여기서 뭐 하세요?”

    원정이 그녀를 부른 곳은 사용인들이 드나드는 쪽문 쪽이었다.

    “조용하게 할 이야기가 있어.”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의 손을 낚아채듯 잡고서 복도 깊숙한 곳으로 이끌었다.

    원정이 그녀를 데리고 간 곳은 쪽문 바로 옆의 자그마한 방이었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예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신……률 도사님?”

    그곳에는 원정의 정신적 지주이자, 삶의 기쁨이라고도 할 수 있는 무속인 신률이 앉아 있었다.

    짙은 보라색 두루마기를 입은 그는 쥐처럼 반들거리는 까만 눈동자로 해주를 쳐다보았다.

    “오랜만입니다, 작은 사모님.”

    작년 이맘때, 그러니까 그 문제의 CCTV 사건이 있고 난 직후. 대모산 자락에 있는 그의 자택에서 만나고 처음이니 오랜만이기는 했다.

    “네, 그간 잘…… 지내셨어요?”

    어색한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네자 얇은 입술이 차가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난 잘 지냈습니다만.”

    잠시 말을 끊은 신률이 해주를 꿰뚫기라도 할 듯 빤히 바라보았다.

    “작은 사모님께서는 그리 잘 지내지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강한 신력으로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는 물론이고 내면까지 꿰뚫어 본다는 신률은 정‧재계 인사들이 서로 모셔 가려 할 만큼 영험한 무속인이었다.

    그런 그가 시선을 고정한 채 눈을 떼지 않자, 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이러다가 그녀의 비밀을 들킬 것만 같아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아닌데요? 잘…… 지냈는데요?”

    어설픈 거짓말로 둘러댔지만,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비소를 던진 신률이 그녀의 가슴 가운데를 날카롭게 후벼 팠다.

    “아직 태기가 없으시니, 잘 지내지 못하는 거지요. 창성금융그룹의 후계자를 낳아야 하는 분이 말입니다.”

    나무라듯 던지는 말에 해주의 입꼬리가 파들거리며 떨렸다.

    그러자 딱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찬 신률이 서늘하게 물었다.

    “약은 잘 드십니까?”

    1년 전부터 원정을 통해 신률이 환을 보내오고 있었다.

    아이가 잘 들어서는 약이라는데, 그녀에게는 필요 없는 물건이기에 받는 족족 버렸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 없기에 해주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럼요. 잘 먹죠.”

    의구심 가득한 까만 눈동자가 그녀를 찬찬히 살폈다.

    안색을 살피는가 싶더니 뜬금없이 그녀의 손목을 쥐었다.

    “그럼, 맥을 짚어 보겠습니다.”

    심각한 표정으로 맥을 짚는 신률을 바라보며 해주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행여 맥을 짚어 보고 약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될까, 간이 콩알만 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히 들키지는 않은 모양이다.

    “괜찮을 것 같습니다.”

    맥을 다 짚은 신률이 원정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원정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럼 오늘, 합방해야 하겠죠?”

    “네, 준비하시지요.”

    이게 다 무슨 소리야? 합방이라니.

    “어머니?”

    놀란 해주가 제 시어머니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환희에 찬 원정이 흥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얘, 오늘 아이를 만들면 아들이래.”

    아이를 만들면…….

    원정의 말에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돋고 손바닥에 땀이 배었다.

    “너희 둘 사주 넣고 날 받았단 말이야. 그래서 도사님이 직접 오셔서 네 몸 상태 검사해 주신 거고.”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시어머니가 어떻게 아들 부부 잠자리까지 관여해.

    “어머니.”

    뭐라고 말을 해 보려 했지만, 원정이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해주야, 오늘이야.”

    마치 결전을 앞둔 장수처럼 비장한 표정이라 더는 토를 달지 못했다.

    “아무 걱정 하지 마. 넌 그저 깨끗이 씻고, 정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어. 그거면 돼.”

    “…….”

    “알겠니?”

    젊어서 자궁암을 앓은 원정의 트라우마.

    손 귀한 집안에 시집와 겨우 아들 하나 낳고 자궁을 덜어 낸 그녀는 병적으로 후사에 집착했다.

    그런 원정의 상처를 알기에 원망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원정을 속이고 있는 건 어디까지나 지해주, 그녀이니까.

    목구멍 가득 치밀어 오르는 아픔을 삼킨 해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 * *

    파티가 끝나고 손님들 대부분이 돌아갔건만, 해주가 보이지 않았다.

    지수를 비롯해, 해주의 입사 동기들이 자리를 떠난 뒤부터 그녀가 보이지 않는 듯하다.

    주위를 둘러보던 은호가 지나가던 원정의 비서를 붙잡았다.

    “과장님, 해주 못 봤어요?”

    “작은 사모님은…… 피곤하셔서 먼저 침실로 올라가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침실로 올라갔다고요?”

    은호의 미간이 심각하게 좁혀졌다.

    무슨 소리야. 침실로 올라갔다니.

    양평에서 하룻밤 자고 가라는 윤규와 원정의 부탁이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원정이 또 무슨 일을 어떻게 꾸밀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비서인 정 실장까지 대기시켜 둔 상태였는데 침실로 올라갔다니.

    미간을 좁힌 은호가 긴 다리를 뻗어 별장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갔다.

    중간쯤 올랐을 때다. 원정이 상기된 얼굴로 1층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어머, 은호야.”

    은호를 발견한 원정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꼭 잘못하다 걸린 아이 같은 얼굴이다.

    그런 원정을 바라보는 은호의 눈빛이 사뭇 차가웠다.

    “해주 어딨어요?”

    원정이 대답을 머뭇거리자 또 한 번 차갑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어딨냐고요.”

    “피, 피곤해서 쉬고 싶다길래, 내가 동편 방을 내줬어.”

    다그치는 말에 재빨리 대답한 원정이 은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원정을 지나친 은호가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은호야, 해주…….”

    해주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은호가 발을 멈추고 원정을 뒤돌아봤다.

    까만 눈동자가 어찌나 차가운지, 원정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지금은 씻고 있어.”

    “씻는다고요?”

    안절부절못하며 말을 잇던 원정이 구질구질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응. 오늘 많이 긴장했는지 어깨랑 종아리가 많이 뭉쳤대서, 내가 욕조에 아로마 오일 풀어 주고 내려오는 길이야.”

    오늘 많이 긴장했던 것은 사실이다.

    특히나 이틀 전 회식에서 있었던 일이 다소 과장된 바람에 신경까지 썼으니, 머리가 아팠을 것이다.

    그랬기에 더더욱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녀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제 방에서 편하게 쉴 수 있게 해 줘야 하는 것을.

    “어머니, 도대체…….”

    할 말이 수십 가지는 되지만 하지 않았다.

    “아닙니다.”

    해주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은호 씨는 어머니에게 너무 야박해요. 그냥 조금만 더 이해하려고 해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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