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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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수야.”

    창성금융그룹 경영전략본부 제1팀장 이지수. 해주와는 사사로이 고등학교, 대학교 동기이자 절친한 친구 사이이다.

    해주의 부름에 파티 참석자들과 떠들던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해주야.”

    반가운 눈웃음을 보낸 그녀는 얼른 근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지. 오셨어요? 본부장님?”

    그러고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더니 그것도 아니라는 듯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것도 아니다. 부회장님 사모님이시지.”

    빨간색 드레스 자락을 사뿐히 들어 올린 지수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우아하게 인사했다.

    “사모님, 축하드립니다.”

    지수의 축하 인사를 필두로 함께 모여 있던 사람들 역시 저마다 인사를 건넸다.

    그녀의 남편이자 창성금융그룹 차윤규 회장의 외아들인 은호가 명실상부한 그룹의 주인이 된 걸 축하하는 거였다.

    “고마워요, 다들.”

    그렇게 형식적인 인사가 끝나고 담소를 나누던 중, 해주는 평소와 달리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은 모두 해주의 입사 동기들이다.

    지수를 포함해 모두 네 명인 이들은 그녀가 이 자리에 있기까지 수많은 도움을 준, 말 그대로 그녀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어째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묘하게 틀어져 있다.

    “다들 왜 그래?”

    하나같이 걱정 가득한 눈빛이라 본능적으로 긴장이 밀려들었다.

    “무슨 일 있어?”

    해주의 물음에 서로 눈치만 보던 이들이 결국 지수에게 총대를 짊어지웠다.

    “해주야, 그게…….”

    일단 말을 꺼내기는 했는데,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한 지수가 입술만 달싹였다.

    “뭔데 이렇게 심각해?”

    불안한 기색을 애써 감춘 해주가 웃으며 물었다.

    그러자 용기를 낸 지수가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금요일, 부회장님 몇 시에 들어오셨니?”

    “1시쯤? 왜?”

    불길한 예감은 늘 빗나가지 않는다고, 은호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그러자 심장이 불길한 움직임을 보이며 불규칙적으로 날뛰었다.

    “임원단 회식 말이야. 거기 새로 입사한 회장님 비서도 참석했다는데.”

    새로 온 회장님 비서.

    그녀도 들은 바 있다.

    그녀의 시어머니인 원정과 피트니스에서 만나 친해졌다는 젊은 여자이다.

    해주와 동갑으로 자운그룹 비서실 소속인 그녀를 특별히 스카우트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왜?

    “아주 이상한 소문이 퍼졌어.”

    “소문?”

    * * *

    이상한 소문이라기보다, 더러운 소문이었다. 그것도 아주 지독하게 악의적으로 만들어 낸 소문.

    “기가 막혀서.”

    머리를 식히기 위해 잠시 발코니에 나온 해주는 결국 실소하고 말았다.

    임원단 회식에서의 일을 전해 들은 뒤로 복잡하게 꼬여 가는 제 뱃속을 여실히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배알이 꼴린다는 게 이런 느낌인 거였어?”

    그때였다.

    제 뒤쪽으로 인기척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려던 참이다. 미처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익숙한 향기가 그녀를 먼저 덮쳐 왔다.

    차은호?

    그 순간 발코니 난간을 쥐고 있는 해주의 손 위로 커다란 손이 겹쳐졌다.

    그리고 등에 맞닿는 단단한 가슴.

    그녀의 남편이자 소문의 주인공인 은호가 틀림없었다.

    마치 백 허그를 하듯, 온몸으로 그녀를 품은 은호가 조용히 속삭였다.

    “추운데 여기서 뭐 해?”

    지독히도 매혹적인 목소리에 심장이 쿵, 떨어져 내린다.

    “그냥 바람 좀 쐬려고요.”

    태연한 척 대답하는 그녀의 귓가에 뜨거운 숨결이 내려앉았다.

    “배알이 꼴려서?”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댄 은호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걸 또 언제 엿듣고는.

    간지러움을 참느라 입술을 꾹 깨문 해주가 원망스러운 시선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네, 배알이 꼴려서요.”

    둘러댈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당당히 제 속내를 밝힌 해주는 새침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뭉근히 데워진 눈빛이 그녀의 얼굴을 면밀히 살폈다.

    “사랑스러운 내 아내께서 왜 배알이 꼴리셨을까?”

    마치 정말로 그녀가 걱정된다는 듯, 바라보는 시선이 퍽 애달프다.

    연기라는 것을 아는데도, 그의 눈빛에 심장이 녹아내릴 듯 떨려 왔다.

    그런 제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발끝까지 힘을 준 해주가 몸을 완전히 돌려세워 그를 마주 보았다.

    “나의 갑님께서 품위 유지를 제대로 안 하셨던 모양이더라고요.”

    서늘한 눈빛을 꾸며 내고는 호기롭게 말을 던졌지만, 해주는 이내 후회하고 말았다.

    기껏 몸을 돌려세웠는데, 난간을 짚은 은호가 한 발짝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그의 품 안에 꼼짝없이 갇힌 꼴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난감할 수가.

    닿을 듯 가까워진 얼굴로 인해 서로의 숨결까지 느껴지다니. 어제 새벽의 기억이 절로 재생되고 있었다.

    하지만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다.

    “금요일, S호텔에서는 몇 시에 나왔어요?”

    그러자 심드렁한 목소리가 태연하게 대답을 내놓았다.

    “11시 40분쯤?”

    “집에는 몇 시에 들어왔을까요?”

    “내가 몇 시에 들어왔는지, 몰라서 묻는 거야?”

    그의 대답에 심장이 타는 듯 뜨거워졌다.

    “당신 1시 반쯤 들어왔어요.”

    11시 40분에 호텔을 나온 사람이 1시 반에 집에 도착했다.

    “S호텔에서 우리 집까지 10분도 안 걸려요. 그 시간에는.”

    남산에 위치한 호텔에서 한남동 집까지 기껏 10분. 아니, 빠르면 5분 컷이다.

    “그 시간 동안 도대체…….”

    “그러니까 지금, 약 2시간 동안 뭐 하다 왔냐고 묻는 거야?”

    은호의 반듯한 얼굴에 뭉근한 미소가 떠올랐다.

    알리바이를 추궁당하는 사람이라 볼 수 없을 만큼 미소에 여유가 흘렀다. 아니, 뭔가 기분 좋아 보이는 그런 미소라고나 할까.

    그렇게 잠시 해주를 바라본 은호가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 지금 이러는 거, 질투……라고 생각해도 될까?”

    기가 막혀. 질투라니. 누가 질투 따위를 한다고. 그리고, 그냥 말하면 되지, 왜 이렇게 바짝 다가서는 건데.

    얼마 되지도 않는 틈을 닿을 듯 좁혀 온 그가 11월의 선선한 공기를 데울 만큼 뜨거운 열기를 뿜어냈다.

    단단한 허벅지가 그녀의 다리에 스치고, 뜨거운 손이 그녀의 팔에 닿았다.

    그러자 잔뜩 달아오른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며 열기를 토해 냈다.

    “내, 내가 왜 질투를…….”

    그 순간이었다.

    “부회장님?”

    발코니에 은호의 비서인 정 실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묘한 분위기를 읽은 것인지, 정 실장의 표정이 민망함으로 물들었다.

    그런 그에게 은호의 서늘한 눈빛이 닿자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발코니에 커다랗게 울렸다.

    중요한 일이 아니면 방해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거라는 무언의 압력에 정 실장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회, 회장님께서 찾으십니다.”

    “회장님이? 왜?”

    그제야 해주에게서 몸을 떼어 낸 그가 옷깃을 잡아당기며 매무새를 반듯하게 고쳤다.

    안심한 듯 한숨을 얕게 내쉰 정 실장이 해주에게 시선을 던졌다.

    “사모님도 함께 오시랍니다. 댄스 타임의 시작은 부회장님 부부께서 알리셔야 한다고요.”

    * * *

    고문이 따로 없다.

    차은호와 몸을 맞대고, 시선을 맞대고 추는 춤이라니.

    심장이 뿜어내는 뜨거운 열기에 숨이 막혀 질식할 것만 같다.

    여태 그와 부부로 살면서 이런 식의 스킨십을 수도 없이 겪어 왔는데, 갑자기 왜 이런 감정이 드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제 마음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런저런 잡스러운 생각에 빠져 있던 해주가 순간적으로 은호의 발등을 밟고 말았다.

    “참, 한결같단 말이야.”

    발을 밟혀 놓고,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은호가 쿡쿡대며 웃었다.

    “무려 3년이야. 1년에 이런 파티가 네 번 정도는 있고.”

    춤추는 것을 멈추지 않은 은호가 그녀의 얼굴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모두 열두 번의 파티가 열리는 동안, 단 한 번도 내 발을 밟지 않은 적이 없었어.”

    어려서부터 교양으로 댄스 수업을 받은 은호와 평범한 인생을 살았던 해주가 같을 수는 없었다.

    결혼이 결정되고 제일 먼저 파티 매너를 배우게 된 해주는 특히 댄스 연습에 열을 올렸다.

    그런데도, 조금도 실력이 늘지 않아 늘 원정의 안타까움을 사고 있었다.

    “미안해요.”

    눈꼬리를 아래로 늘어뜨린 해주가 민망함에 뺨을 붉혔다.

    “미안하긴. 덕분에 재미있는걸.”

    빈말은 아닌지 은호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잔뜩 묻어났다.

    “재미있다고요?”

    “이야기했지? 내가 제일 싫어하던 게 사람 많이 모이는 파티라고.”

    가끔 그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은호는 특히 파티 이야기를 할 때면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곤 했다.

    “여자들은 들러붙지, 파티는 새로울 게 없지.”

    역시나, 그의 미간이 짜증스럽게 구겨졌다.

    “늘 짜증만 났거든. 근데 너랑 결혼하고부터는 재미있어졌어.”

    결혼하고 나서는 파티가 재미있다니. 처음 듣는 이야기이다.

    “네 덕분에 여자들은 차단되었고, 재미없는 댄스 타임에는 발까지 친히 밟아 주며 날 즐겁게 만들어 주잖아?”

    잔뜩 기대하고 들었는데, 놀리듯 말하는 은호 때문에 발끈하고 말았다.

    “변태예요? 발 밟히는 게 재미있게?”

    그러자 은호의 붉은 입술을 통해 나직한 웃음소리가 음악처럼 흘렀다.

    창성의 얼음 마왕 차은호가 짓는 진짜 웃음.

    정말이지 귀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웃는 모습이 이토록 근사한 남자인 것을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 이런 모습은 그녀에게만 보여 주니까.

    놀림받는 것도 잊은 그녀는 감동한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시울이 벅찬 감격으로 달아올랐다.

    그런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는 은호의 눈빛이 뜨거웠다.

    “발을 밟은 다음 미안해하며 눈치 보는 모습이 재미있다는 거야. 눈꼬리에 눈물까지 매달고 말이야.”

    “누가 눈물을 매달았다고.”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 해 시선을 떨어뜨린 해주가 제 발끝을 바라보았다.

    어설프게 움직이며 간신히 그의 발을 쫓고 있는 서글픈 은빛 구두.

    그게 마치 제 처지 같아서 조금은 울적해진 참이다.

    “술을 많이 마셨어.”

    갑작스러운 고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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