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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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에게는 마음 내키는 대로 애정을 표현하는 원정이건만, 정작 제 아들인 은호는 어렵기 짝이 없었다.

괴롭히는 게 아니라고 말하려 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그저 혼자 투덜거릴 뿐이다.

“이건 보통 귀걸이가 아니란 말이야. 내가 부적으로 특별히 만…….”

“어머니.”

서늘한 목소리가 나직이 가라앉기까지 하자 소름이 돋을 만큼 차갑게 느껴진다.

“아직도 그 신률이라는 사람과 어울리세요?”

은호의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정 불안하시면 교회나 가시라니까요.”

무속 신앙에 목을 매는 원정에게 은호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었다.

“해주는 그냥 두시고요.”

원정을 무슨 파렴치한 대하듯 한 은호가 해주에게로 몸을 돌렸다.

“갈까?”

온도 차이가 확연했다.

원정을 대하던 서늘한 눈빛은 온데간데없고, 다정한 미소가 까만 눈동자에 은은히 머물렀다.

이럴 때면, 저도 모르게 원정이 불쌍해진다. 한숨을 폭 내쉰 해주가 원정에게 다가섰다.

“어머니.”

그러고는 그녀 손에 들린 자주색 상자를 받아 들었다.

“주세요. 제가 이따가 살짝 할게요.”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있던 원정이 측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고마워.”

해사하게 웃으며 원정을 안심시킨 해주는 그제야 은호의 손을 잡고 파티장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우아한 발걸음을 내디디며 해주가 말했다.

“어머니에게 심했어요.”

입꼬리를 사랑스럽게 말아 올린 그녀는 누가 봐도 행복한 여자로 보일 것이다.

그런 그녀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 은호가 무정한 대답을 내놓았다.

“더 심하게 하려다가 참은 거야.”

그의 대답에 마치 밀어라도 들은 듯, 해주가 수줍게 웃었다.

별 시답지 않은 말을 하면서도 사랑을 속삭이는 척 연기하는 모습이 이젠 제법 능숙했다. 분명,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눈에는 서로 사랑을 속삭이는 것으로 보일 터였다.

“근데, 무슨 부적이래?”

“아기 갖게 해 주는 부적이래요.”

“아기?”

아기라는 말에 은호의 미간이 대번에 구겨졌다. 그러자 묘하게 가슴 가운데가 살갗이 쓸리기라도 한 듯 아팠다.

이 생경한 느낌이 싫어, 해주는 얼른 은호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입꼬리를 끌어 올린 채 사랑스러운 미소를 덧입었다.

“난 지수 좀 만나고 올게요.”

두 손으로 은호의 옷깃을 다정하게 쓸어내린 해주가 달콤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니까 그동안 품위 유지 잘하고 있어요. 또 몇 명의 여자가 추근거릴지 모르지만, 대외적으로 흔들리지 않아야 내 체면이 선다고요.”

은호에게 사랑이 가득한 시선을 보낸 해주는 아프도록 잔혹한 진실을 말했다.

“난 당신의 홍염살을 막아 주는 부적이니까요.”

무슨 소리야. 부적이라니.

그건 어머니 입장에서나 그런 거지.

은호는 멀어지는 해주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미간을 구겼다.

그런 그의 곁으로 그의 친구이자 창성금융그룹 법무팀 수장인 진우가 다가섰다.

“마누라 때문에 심기가 불편해?”

샴페인 잔을 건네며 던지는 진우의 한마디에 은호의 눈썹이 삐뚤게 휘었다.

“천박하게 마누라라니.”

샴페인 잔을 받으면서도 은호의 시선은 은회색 원피스를 팔랑거리며 멀어지는 해주를 좇고 있었다.

“왜? 해주 씨 바람이라도 났대?”

은호의 시선을 좇은 진우가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그제야 은호의 시선이 진우를 향했다.

“뭐?”

“왜 그런 눈으로 잡아먹을 듯 바라보고 있냐는 거지.”

세상 모든 것들에 심드렁하고, 세상 모든 사람에게 차가운 은호가 유일하게 관심을 가지고 마음을 쓰는 존재.

그런 존재가 해주인 것을.

또 무슨 일이기에 이토록 심각한 얼굴인 건지.

“부부 싸움이라도 한 거야?”

진우의 물음에 은호가 코웃음 쳤다.

“부부 싸움은 무슨. 헛소리할 거면 꺼져.”

부부 싸움이라니. 해주와 저 사이에 그런 것이 가능할 리가.

귀찮다는 듯 인상을 구긴 은호가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그 뒤를 진우가 바짝 뒤쫓았다.

“암튼 해주 씨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오매불망 차은호만 바라보니까.”

은호 쪽으로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진우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막말로 아침, 저녁으로도 모자라 회사에서까지 보는 얼굴이 하필 차은호인데 다른 남자가 성에 차겠냐?”

문득, 은호가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서늘한 얼굴로 진우를 돌아보았다.

“성에 안 찬다?”

짙은 눈썹이 꿈틀하며 휘어졌다.

은호가 관심을 보이자 진우는 한층 더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게다가 다른 놈들이 미쳤어? 해주 씨에게 껄떡거리게?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차은호가 모가지를 물어뜯을 텐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결혼을 결정하고 지금까지, 약 3년의 시간.

청초한 꽃잎처럼 하늘거리는 해주에게 수많은 남자들이 접근해 왔다.

그때마다 그가 어떻게 했는지, 해주가 알면 기절할지도 모르겠다.

서늘하게 눈을 번뜩인 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가지만 물어뜯을까. 눈을 파내고, 사지를 절단해 버려야지.”

“그래, 그러니까 네 걱정이나 하란 말이야.”

“내 걱정을 왜 해? 내가 언제 다른 여자에게 눈 돌리는 거 봤어?”

은호에게 여자란, 어떤 의미에서는 지긋지긋한 괴물에 지나지 않는다.

“너야 얼음 심장을 가졌으니 눈 안 돌아가겠지. 여자가 발가벗고 덤벼도 심드렁하잖아. 너는.”

은호와 벌써 26년째 친구인 진우는 은호의 홍염살과 그 빌어먹을 홍염살로 인해 은호가 얼마나 피폐해졌는지,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 중 하나였다.

“하지만 여자들은 아니잖아. 금요일만 해도 말이야. 그 회장실 새 비서.”

이틀 전 일을 떠올린 진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름이 박경은이었나?”

회장님이 귀가했음에도 끝까지 회식 자리에 남아 은호를 노렸다.

“암튼 그 여자가 너한테 노골적으로 접근했잖아. 옆에 붙어 앉아서는 하하, 호호.”

얌전한 트렌치코트 안에 눈 돌아가게 야한 원피스를 입고 있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야한 옷에 야한 몸짓. 은호를 노골적으로 유혹을 하는데, 정말이지 눈 뜨고는 못 볼 광경이었다.

“보드카랑 위스키랑 막 죄다 섞어서는 귀가주를 내미는데, 누가 봐도 너 뻗게 만들어서 집에 안 들여보낼 작정인 거였잖아.”

밤 12시.

신데렐라도 아니고, 아내가 기다리고 있어서 자정 전에는 집에 들어가야 한다는 은호를 경은은 그런 식으로 붙잡았다.

“그나저나, 너 아무 일 없었어? 그 엄청난 술을 마시고도?”

집에 돌아가려면 귀가주를 마시라며 내민 경은의 도발에 은호는 기꺼이 응했다.

단숨에 술잔을 비우고는 돌아서는 모습이 전쟁에 나가는 장수 같아, 진우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더랬다.

엄청난 양의 알코올과 다양한 종류의 술이 얼음 심장과 강철 정신력을 만났을 때 어떤 화학반응을 일으킬지 궁금하기도 했다.

“왜? 사고라도 쳤어야 해?”

하지만 별일 없었다는 듯, 은호의 표정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그야, 박경은 씨가 바로 뒤쫓아 나갔으니까 하는 소리지. 그러고는 자리로 안 돌아왔거든.”

은호는 취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술을 마셨지, 경은은 의도적으로 그를 뒤쫓아 갔지.

회식 자리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다들 그 뒤가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

진우의 물음에 은호는 잠시 그날 일을 떠올렸다.

비서에게 차를 대기시키라고 전화를 건 은호가 로비를 천천히 벗어나고 있었을 때다.

독한 향수 냄새를 풍기며 여자가 다가왔다.

가슴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원피스를 입은 여자는 그의 팔을 감으며 몸을 비볐다.

[부회장님, 저 술 한 잔만 더 사 주세요. 네?]

그런 여자를 경멸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 은호가 손가락 끝으로 그녀를 밀어냈다.

마치 더러운 벌레를 보는 느낌이라 손가락 하나 대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들어가서 드십시오. 아직 사람들 남아 있잖아요.]

[부회장님과 둘이서 마시고 싶으니까 그러죠.]

“꺼져. 볼썽사나우니까.”

은호의 입술에서 그날 제가 한 말이 재연되었다.

“그렇게 말했다는 거야?”

놀란 진우의 눈이 동그래졌다.

사실, 그날의 경은은 정말이지 최고로 섹시한 여자였다.

적당한 키에 몸매도 죽여주고, 얼굴은 또 얼마나 예쁜지 인형이 따로 없었다.

그런 여자가 끈적거리는 목소리와 몸짓으로 유혹하는데, 마치 야한 동영상을 보는 듯 아래가 뻐근해져 왔다.

이런 반응은 비단 진우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날 그 광경을 지켜본 남자들은 하나같이 같은 반응을 겪었다고 고백한 터다.

그런데, 그런 여자에게 뭐? 꺼져, 볼썽사나우니까?

“정말 그랬어?”

“그럼 뭐라 그래야 하는데? 사라지시지요. 몹시 보기에 좋지 않습니다. 라고 정중하게 말해야 해?”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역겨운지, 은호의 미간에 짜증 섞인 세로줄이 그어졌다.

진우는 그런 은호가 신기하기만 했다.

아무리 그래도 남자인데, 남자는 미인에 약한 법인데, 어떻게 그렇게 매몰차게 대해.

“정말 넌 거기가 아무렇지도 않았다는 거야?”

진우의 시선이 은호의 아래쪽을 향했다.

그러자 검은 눈동자가 무섭게 번뜩이며 불쾌한 기분을 드러냈다.

“천박하긴.”

“야, 천박하다니. 남자로서 당연한 반응인데.”

“당연한 반응이라.”

은호의 차가운 눈동자에 비릿한 웃음이 깃들었다.

“그래, 넌 당연한 듯 그렇게 살아. 아무 여자나 보면서…….”

이번에는 은호의 시선이 진우의 아래를 향했다.

“많이 느끼고.”

조소 섞인 시선에 진우가 두 손으로 아래를 가렸다.

“야, 씨.”

“난 당연하지 않아서 말이야.”

무감한 얼굴을 한 은호가 다시금 걸음을 뗐다.

“고자냐?”

그런 은호의 뒤통수에 대고 진우가 소리쳤다.

“그런 상황에서는 당연히 반응이 와야 하는 거야. 남자라면.”

지극히 박진우다운 말이었다.

사흘 걸러 여자를 갈아 치우는 바람둥이인 그는 아랫도리 간수를 제대로 못 한다는 이유로 제 아버지 소유의 로펌 후계자 전쟁에서조차 뒤로 밀려 있었다.

그런 진우를 애처롭게 바라본 은호가 짓이기듯 목소리를 뱉었다.

“나한테 당연한 상황은 그런 상황이 아니야.”

“그럼 어떤 상황이 당연한 상황인데?”

“……있어. 그런 상황이.”

괴롭도록 몸이 반응하는 그런 상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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