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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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간, 그의 손가락이 닿은 곳이 불에 덴 듯 뜨거워 입 안이 바짝 말라붙는 것 같았다.

    “뭐야? 찢어진 거야?”

    미간을 좁힌 그가 입술 가운데를 꾹 눌렀다. 화들짝 놀란 그녀는 엉겁결에 그의 손을 쳐 냈다.

    “만지지 말아요.”

    손으로 입술을 가린 해주는 원망 어린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누구 때문에 입술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아주 삼킬 듯 빨고, 핥고, 물고. 난리도 아니었으면서.

    나빠, 차은호.

    “신경 끄고, 얼른 가기나 해요.”

    몸을 획― 하니 돌린 해주가 테이블 위에 놓아둔 클러치를 집어 들며 밖으로 향했다.

    드레스와 맞춰 신은 은색 스틸레토 힐이 대리석 바닥을 야무지게 두드렸다.

    1층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밟으며 해주는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그러자 여태 참았던 눈물이 차오르고 코끝이 시큰하게 아렸다.

    묘한 감정이었다. 서운함과 원망, 그리고 안타까움이 뒤섞여 정체불명의 상태가 되었다고나 할까.

    그때였다.

    “해주야.”

    해주를 뒤따라온 그가 그녀의 팔을 강한 힘으로 붙들었다.

    그런 그를 뿌리치려 했는데, 외려 그녀의 스텝이 꼬이고 말았다.

    가파른 계단 위에서 발을 삐끗하자 몸이 휘청거리며 기울어졌다.

    그 위험천만한 순간, 은호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클러치를 놓쳐 버린 해주는 대신 은호의 어깨를 꼭 거머쥐어야 했다.

    넘어지지 않기 위한, 지극히 본능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내 후회하고 말았다.

    차라리 계단에서 미끄러져 다리 하나 부러지고 말걸.

    그의 품에 안긴, 아니, 그를 끌어안은 해주는 은호의 까만 눈동자를 지척에서 마주해야만 했다.

    차가우면서도 뜨겁고, 밤보다 어두워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차은호의 눈동자.

    그를 처음 만났던 날도 이 눈동자 때문에 숨이 막혔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숨이 막히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다.

    그녀의 허리를 바짝 끌어당겨 안는 바람에 밀착된 몸, 뒤섞이는 호흡, 흔들리는 눈빛, 두툼한 코트를 뚫고 온전히 전해지는 체온. 그리고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그윽한 목소리.

    “해주야.”

    괜찮냐는 안부도 아니고, 도대체 왜 그러냐는 힐난도 아니고.

    그의 입술을 뚫고 흐른 것은 그녀의 이름이었다.

    해주야, 지해주.

    그러고 보니 해주는 그가 불러 주는 제 이름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세련된 이름이 아니건만, 그의 입술을 통해 흘러나온 제 이름은 마치 우아한 살롱의 예술품같이 느껴진다.

    그런데, 뭐?

    “너, 남자 생겼어?”

    하, 심장을 녹일 듯 이름을 불러 놓고선.

    “생겼으면요?”

    몹시도 삐딱한 표정으로 삐딱하게 대답한 이유는 그가 원망스러웠기 때문이다.

    남자가 생길 기회나 주고 이런 질문을 하면 밉지나 않지.

    매일, 밤낮없이 차은호를 눈에 담아 눈높이가 하늘을 찌르는 해주에게 다른 남자가 들어올 리가.

    헛헛한 웃음을 흘린 해주는 한층 더 삐딱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계약서 제6조, 제8항. 서로의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는다.”

    그녀의 마음에 누가 들어와 있는지.

    그녀의 시선이 누구를 좇고 있는지.

    누구 때문에 하루하루가 행복하고, 또 죽도록 괴로운지.

    “내 개인사를 은호 씨에게 일일이 말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절대 들키지 않을 생각이다.

    “그러니 이제 좀 놓아주죠?”

    싸늘한 표정을 지은 해주는 제 허리에 감긴 뜨거운 손을 눈짓했다.

    그러자 은호의 입매가 삐딱하게 휘어졌다.

    “네가 붙들고 있는 것 같은데?”

    그의 대답에 해주가 입술을 질끈 물었다. 기껏 무감한 얼굴로 태연한 척했건만, 그녀의 두 손은 제 주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의 어깨를 꼭 붙든 채 질척이고 있었다.

    손을 떼어 내자 허리를 감았던 손이 느리게 풀어졌다.

    지독히도 매혹적인 그의 체향에 어지러움이 느껴졌지만, 애써 마음을 다잡은 해주는 다시금 계단을 내려갔다.

    그런 그녀를 은호의 서늘한 목소리가 붙잡았다.

    “사생활을 즐기는 것도 좋은데.”

    흠칫, 멈춰 서자 묵직한 발소리를 만들어 내며 그가 다가섰다.

    “품위 유지도 해. 그 바로 다음 조항이 품위 유지 조항이니까.”

    <계약서 제6조, 제9항.

    갑과 을은 원만한 결혼 생활을 위해 대외적으로 품위를 유지한다. 다른 이성과 만남을 가질 수는 있으나 이를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는다.>

    웃기는 조건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은호에 의한, 은호를 위한, 은호만의 조항으로 반드시 필요한 조항이기도 했다.

    사주에 홍염살이 강하게 낀 은호는 어려서부터 여자가 끊이질 않아 골치가 아팠다고 한다. 여자가 넘치다 못해 여자에게 칼 맞아 죽을 사주라나, 뭐라나.

    그녀의 시어머니 원정은 그런 그의 홍염살을 상쇄시킬 ‘복사꽃 사주’를 가진 신붓감을 원했고, 마침 해주의 사주가 ‘복사꽃 사주’였기에 둘은 무난히 결혼에 골인할 수 있었다.

    천애 고아인 해주를 며느리로 받아들이며 원정이 바란 것은 단 하나.

    짙은 홍염살로 인해 단명할 운명인 은호를 그 끔찍한 사주에서 구해 주는 거였다.

    해주를 귀한 부적으로 여기는 원정은 그녀를 애지중지 아꼈고, 그만큼 그녀의 삶에 침범해 들어오려 했다.

    “해주야.”

    파티가 열리는 양평 별장 입구, 원정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십 대 후반이라고는 보이지 않을 만큼 잘 관리된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이, 예뻐라.”

    눈꼬리에 고운 눈웃음을 건 원정은 해주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며 평가했다.

    메이크업? 합격. 드레스…… 디올인가? 합격. 헤어스타일? 합격.

    눈빛만으로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을 만큼, 원정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이다.

    “음…….”

    해주의 목선을 바라본 원정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불안한 눈빛의 해주가 변명을 쏟아 냈다.

    “오늘 안 선생님이 메이크업을 너무 짙게 하는 바람에 목걸이는 생략했어요. 지나치게 화려해 보일까 봐요.”

    오늘따라 아이라인도 짙고, 눈 화장도 과하다. 눈에 띄는 걸 좋아하지 않는 해주였기에 장신구는 생략해야 했다.

    원정은 그런 해주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잖아.”

    조금은 실망한 목소리였다.

    “내가 안 선생님께 부탁해서 메이크업을 좀 짙게 해 달라고 한 거야.”

    원정의 말에 가슴 가운데가 아릿해졌다.

    이번 메이크업 담당도 원정의 손에 들어간 모양이다.

    “은호, 부회장 승진 축하 파티기도 하고, 은호가 그 자리에 앉기까지 내조 잘한 널 위한 파티기도 해.”

    해주의 마음을 알 길 없는 원정은 그저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조곤조곤 떠들 뿐이다.

    “파티 주인공이 화려한 건 당연한 거야. 넌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살아야 할 내 며느리잖아? 창성의 후계자를 낳을 몸이기도 하고.”

    순간, 묵직한 돌덩이라도 삼킨 듯 해주의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창성의 후계자를 낳을 몸이라니.

    그녀는 그런 존재가 아닌 것을.

    “네 발아래에 둘 사람들 기 좀 죽으라고 예쁜 얼굴 더 예쁘게 만든 건데, 화려하기는? 이 정도는 약과야.”

    생긋 웃은 원정이 제 비서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원정의 비서가 자주색 상자를 내밀었다.

    “네가 그럴 줄 알고, 내가 준비했지.”

    비서의 손에 들린 것은 하이 주얼리 브랜드의 보석 상자였다.

    크기가 제법 큰 걸 보니 목걸이인 모양이다.

    “짜잔.”

    소녀처럼 잔뜩 흥분한 얼굴로 원정이 상자를 열었다.

    세상에. 큼지막한 사파이어를 다이아몬드가 빼곡하게 둘러싼 목걸이는 보기에도 억― 소리가 절로 나올 물건이었다.

    “세상에, 어머니.”

    <계약서 제3조, 제7항.

    을 지해주는 갑 차은호의 부모에게 부족함 없는 며느리가 된다.>

    “너무 예뻐요.”

    계약서대로 흡족한 며느리가 되기 위해 눈을 반짝반짝 빛낸 해주는 경이로움과 감사함을 온몸으로 연기해야 했다.

    그런 해주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환하게 미소 지은 원정이 목걸이를 들어 올렸다.

    “이건, 은호 부회장 된 기념 선물이야.”

    그러고는 제 며느리의 뽀얀 목에 직접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네가 은회색 드레스를 골랐다기에 사파이어로 준비했어.”

    하, 스타일리스트까지 포섭한 거야?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돋았지만, 내색하지 않은 해주가 방긋 웃었다.

    “감사해요, 어머니. 마음에 들어요. 오늘 드레스랑도 너무 잘 어울리고요.”

    그러자 원정의 표정이 한층 더 밝아졌다.

    또다시 비서에게 손을 내민 그녀는 같은 브랜드의 보석 상자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이건, 어서 빨리 손자 안고 싶어서 주는 부적.”

    상자를 여는 원정의 손이 흥분한 듯 떨렸다.

    상자 속에는 목걸이와 세트로 보이는 사파이어 귀걸이가 화려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거 신률 도사님의 영험함을 깃들게 하려고 대굿까지 한 거야.”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고, 발아래가 까마득해졌다.

    “항상 몸에 지녀야 한다?”

    무속 신앙 신봉자인 원정에게 도사 신률의 말은 곧 법이고, 정의고, 목숨줄이었다.

    아이 소식이 없자 원정이 신률을 찾아간 모양이다.

    대굿까지 해서 부적을 만들었으니, 앞으로는 아이에 대한 기대가 더 커지겠지.

    차마 손도 대지 못하고 바라보고 있자 원정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마음에 안 들어? 목걸이랑 세트인데?”

    “아, 아니요. 마음에 들……어요.”

    마지못해 대답하는 해주 앞으로 커다란 손이 불쑥 끼어들었다.

    “어머 얘, 은호야.”

    주차장에서 그룹 임원들에게 발이 묶였던 은호가 어느새 그녀 곁으로 다가서 있었다.

    제 어머니 손에 들린 보석 상자를 빼앗은 은호는 서늘한 얼굴로 뚜껑을 닫아 버렸다.

    “광대도 아니고 치렁치렁.”

    삐딱하게 입매를 비튼 은호가 못마땅하다는 듯 해주를 바라보았다.

    “목걸이도 화려한데 귀걸이까지 끼우시게요?”

    그러고는 보석 상자를 원정에게 돌려주었다.

    “그냥 두세요. 괴롭히지 마시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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