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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잤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인사를 건네는 은호를 해주가 뚫어질 듯 쳐다보았다.
무심하다 싶을 만큼 감정을 두지 않는 까만 눈동자, 그러면서도 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예리한 눈빛. 굴곡 없이 날카롭게 뻗은 콧날과 날렵하지만 남자다운 턱선. 그리고 그린 듯 아름다운 붉은 입술.
순간, 저 붉은 입술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입술을 짓누르던 기억이 몽글몽글 떠올랐다.
커피잔을 들어 올린 손가락이 파르르 떨린 것은 그 때문이었다.
도저히 커피를 마실 수 없었던 해주가 소서에 잔을 내려놓으며 볼통한 대답을 내놓았다.
“못 잤어요. 덕분에.”
그러자 은호가 해주의 맞은편, 그의 자리에 나른한 듯 몸을 기댔다.
“덕분에?”
“침대를 빼앗기는 바람에 서재에서 잤거든요.”
은호의 입술 끝이 슬며시 위를 향했다.
“아―”
고개를 끄덕인 은호가 커피포트를 들어 올려 제 몫의 커피를 잔에 따랐다.
“난 평소보다 잘 잤는데 말이야.”
틀린 말은 아닌 모양이다.
매무새가 헝클어져 있긴 했지만, 은호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밝고 화사했다.
반면, 밤새 한잠도 못 잔 해주는 짙게 내려온 다크서클을 화장으로 간신히 가린 정도였다.
“당신 방이 내 방보다 자리가 좋은가 봐. 거기서 자는 게 더 편한 거 보면 말이야.”
“다행이네요. 당신이라도 잘 자서.”
넓은 접시에 과일 몇 점과 연어샐러드를 올린 은호가 해주를 나무라듯 말을 이었다.
“그러게 왜 서재에서 잤어. 그냥 네 방에 있었으면 됐지.”
“은호 씨.”
아무렇지도 않게 식사를 시작하는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자 은호의 까만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왜?”
“……왜 내 방에 왔어요?”
차은호와 지해주.
두 사람은 부부다. 대외적으로는 말이다. 그 말인즉슨 진짜 부부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계약에 의해 묶인 비즈니스 파트너지.
두 사람 사이에는 엄연히 계약서상의 무수한 계약 조항이 존재하고, 결혼이 계속되는 한 계약서는 절대적이다.
그런데, 왜.
왜 그녀의 방에 침범해서는 그토록 야한 키스를 퍼부은 건지.
해주는 그 이유를 묻고 있었다.
“처음도 아니잖아.”
담담한 얼굴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는 은호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내가 술 마시고 당신 방에서 잔 게 어디 한두 번이야?”
물론, 처음은 아니었다.
결혼 기간 동안, 아니, 계약 기간 동안 그가 그녀의 방을 찾은 것은 이번을 포함하여 네 번쯤 된다.
이전의 세 번은 술에 잔뜩 취한 은호가 느닷없이 그녀의 방에 들이닥쳐 잠이 든 케이스인데, 정말이지 얌전하게 잠만 잤기에 한 번도 문제 삼은 적 없었다.
곤히 잠든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서재로 잠자리를 옮기면 그만이었으니까.
하지만 어제는 완전히 달랐다.
심장이 터질 듯 이어지던 키스와 잠옷을 파고드는 손길에 애간장은 물론이고 뇌세포까지 전부 녹아내렸다.
도망치듯 서재로 갔지만, 한잠도 자지 못한 채 그의 키스를 복기해야만 했다.
“다른 건요?”
“다른 거? 뭐?”
도대체 그런 야한 키스를 왜 한 거냐고요.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이자 은호가 미간을 좁혔다.
“어제 내가 술 마시고 당신에게 무슨 실수라도 했어?”
실수?
그는 그 일을 실수라고 말한다. 아니,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눈살을 찌푸리며 실수라고 말하는 그를 바라보자 가슴 가운데가 뻐근하게 아려 왔다.
그의 손길이 스친 그녀의 몸은 아직도 이렇게 뜨거운데 실수라니.
“아니요. 그럴 리가요.”
씁쓸하게 웃은 해주가 커피잔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계약서 제4조, 제1항.
갑 차은호와 을 지해주는 서로를 이성으로 대하지 않는다. 철저한 비즈니스 파트너로 다음 각호의 선을 철저하게 지킨다.>
3년 전, 은호의 제안으로 시작된 계약 결혼이다.
이 결혼으로 인해 그는 원치 않는 정략결혼을 피했고, 그녀는 진창에 처박혔던 인생을 구원받았다.
차은호와 지해주의 유일한 공통점은 결혼이라는 제도를 극도로 꺼린다는 것.
거짓 결혼으로 서로에게 자유를 선물하자는 그의 제안에 응한 해주는 은호에게 최고의 비즈니스 파트너가 되어 주었다.
둘의 합의로 완벽한 계약서가 탄생했고, 철저한 시나리오하에 거짓된 삶이 시작되었다.
두 사람의 결혼은 완벽했다.
그럴듯한 스토리텔링을 얹어 세상에 둘도 없는 잉꼬부부를 연출했다.
세상은 두 사람을 추앙했고, 덕분에 원하는 것도 손에 넣었다.
그런데, 그런 두 사람의 결혼에 균열이 생겨 버렸다.
미칠 듯 뜨거웠던 키스를 퍼부어 놓고선 기억하지 못하는 은호와 그 키스를 잊지 못하는 해주.
비참함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하지만 눈물을 떨어뜨리는 대신 고운 미소를 꾸며 낸 해주는 이내 반듯하게 허리를 펴며 그를 마주했다.
“그래도 앞으로는 조심해 줘요. 침대를 빼앗기긴 싫으니까.”
* * *
심장이 고장 나 버렸다.
시도 때도 없이 팔딱거리는 심장은 은호를 볼 때면 통증을 동반한 채 유별난 움직임을 보였다.
차라리 각자의 공간에서 각자의 시간을 가졌더라면 평정심을 되찾을 수도 있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러지 못했다.
하필이면 일요일 저녁, 양평 별장에서 파티가 열렸기 때문이다. 너무도 당연히 해주는 은호와 함께 그 파티에 참석해야만 했다.
그나마 치장하기 위해 그와 떨어져 있었던 몇 시간이 이번 주말 그녀의 가장 평화로운 순간이 된 듯하다.
“예쁘네.”
은회색 실크 드레스를 우아하게 차려입은 해주에게 은호가 던진 말이다.
무정한 얼굴로 무심하게.
“당신도 멋지네요.”
그의 표정과 말투를 그대로 흉내 낸 해주는 까만색 파티 슈트를 멋들어지게 입은 그를 칭찬했다.
그녀가 아는 한, 차은호의 슈트 핏을 따라올 사람은 대한민국 내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할리우드인들 그를 따를 수 있을까.
완벽한 비율과 긴 다리. 그것도 모자라 떡 벌어진 어깨까지.
그 이기적인 몸이 운동으로 탄탄하게 다듬어져, 그의 몸을 보는 사람은 남녀노소 누구나 탄성을 터트리게 된다.
물론, 해주는 예외이다.
완벽한 그의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탄성을 터트릴 수 없는 해주는 그저 무심하게 칭찬의 말을 흘릴 뿐이다.
사뭇 차가운 시선을 그에게서 거둬들인 해주가 소파 위에 올려 둔 캐시미어 코트를 집어 들었다.
아니, 집어 들려고 했다.
그런데, 웬걸. 그녀의 코트를 먼저 들어 올린 은호가 느릿하게 다가섰다.
그가 다가서자 시원한 시트러스 향이 후각을 자극했다. 아마도 그녀가 생일 선물로 준 향수를 뿌린 모양이다.
그녀가 좋아하는 계열의 향수에 그의 체향이 더해지자 무척이나 매혹적인 향이 완성되었다.
맥박이 빨라진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절대, 절대로 어젯밤 일이 떠올라서가 아니다.
가까이 다가서서는 찐득한 시선을 던지는 은호를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왜 이래요?”
해주의 목소리 끝이 연하게 흔들렸다.
“코트 입혀 주려는 거지.”
제법 다정한 미소를 지은 그가 코트를 펼쳤다.
“입어. 얼른.”
팔을 끼라며 눈짓하는 모습에도 심장은 미친 듯이 요동친다.
떨리는 마음을 애써 감춘 해주는 그의 의중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팔을 꼈다.
“뭐가 그렇게 조심스러워? 내가 코트 입혀 주는 게 처음이야?”
은호의 목소리 끝에 웃음기가 묻어났다.
“사람 없는 곳에서 이러지는 않았잖아요.”
은호의 친절은 늘 누군가에게 보여 주기 위한 쇼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를 향해 던지는 야릇한 미소, 뭉근한 눈빛, 세심한 터치. 이런 것들은 진짜가 아니다. 연기지.
지금처럼 입술 끝에 묘한 미소를 걸고서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는 모습은 쇼가 시작되었을 때의 그다.
“누구 있어요?”
해주가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오히려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돋았다.
“설마…… 어머님이 또 CCTV 달아 두셨어요?”
그녀의 시모인 원정의 악취미를 떠올린 해주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무슨 소리야?”
해주의 말에 은호의 미간이 좁혀졌다.
“두 번은 그런 짓 못 하지.”
맞는 말이다.
작년 이맘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결혼한 지 2년이 다 되어 가건만, 아이가 생기지 않자 불안했던 원정은 사용인을 시켜 CCTV를 설치했다.
다행히 설치한 당일 곧바로 알아챈 덕에 둘의 계약관계가 들키지는 않았다.
그때 은호가 제 어머니에게 드러낸 분노란, 정말이지 상상 이상이었다.
그의 말대로 두 번은 엄두조차 내지 못할 만큼 사나운 야수가 되어 제 어머니를 물어뜯었다.
[나, 나는 혹시 너희 둘 결혼 생활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운 마음에……. 잘못했어.]
차마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고 훌쩍이는 원정이 딱하기도 했지만, 편을 들어 줄 수는 없었다.
그 사건을 계기로 해주는 불안증과 불면증에 시달리게 되었으니까.
끔찍했던 순간들을 떠올린 해주가 입술을 꼭 깨물자 은호의 미간에 세워진 세로줄이 더욱 짙어졌다.
“걱정하지 마. 두 번 다시 그럴 일 없으니까.”
어느덧 그의 손이 그녀의 코트 앞섶에 닿았다.
꼼꼼히 옷깃을 여며 준 그가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마치 사건 현장을 살피는 형사처럼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왜……요?”
그녀의 물음에 그의 한쪽 눈썹이 삐뚤게 올라섰다.
“입술에 뭐 했어?”
갑자기 무슨 말이야? 입술에 뭘 했냐니.
그의 질문을 이해할 수 없어 해주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왜요? 이상해요? 뭐라도 묻었어요?”
손가락을 들어 올린 그녀가 제 입술을 만져 보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은호가 빨랐다.
그녀의 턱을 받쳐 든 그가 엄지로 입술을 쓸었다.
“평소보다 부풀었잖아. 색도 빨갛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