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65)

1

새벽.

정확히 몇 시인지 가늠할 수 없다.

등지고 누워 있는 커다란 창문 너머로 자동차 바퀴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검은색 벤틀리가 정원의 고운 자갈을 느리게 밟는 소리다.

잠시 뒤, 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고즈넉한 11월 새벽녘을 아스라이 울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발소리.

발소리는 이내 현관문을 여는 소리로 이어졌고, 마침내 문이 닫히는 둔탁한 소리가 그녀의 심장을 지그시 눌렀다.

은호가 집으로 돌아왔다.

해주는 그 당연한 사실이 주는 안도감에 눈꺼풀을 조용히 내렸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다. 창성금융그룹 모바일 뱅킹 출범과 은호의 부회장 승진을 축하하는 그런 날.

6성급 호텔에서 축하 행사가 열렸고, 이어 각 부서마다 회식이 있었다. 은호는 임원단 회식에 참석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녀 역시 경영전략본부 직원들과 거창한 회식을 가졌다.

하지만 늘 그랬듯 팀장인 지수에게 카드만 건넨 채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물론 건배사를 해야 했기에 소주와 맥주를 반반 섞은 폭탄주 한잔을 거나하게 들이켜기는 했지만 말이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아주 약간의 취기를 안고 일찍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잠들지 못했다.

내일을 위해 일찍 잠들어야지 하면서도, 그녀의 무의식은 언제나처럼 은호를 기다린다.

사용인들도 모두 잠이 든 적막한 새벽. 2층을 오르는 그의 발소리가 고요하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만으로도 그의 움직임이 보는 듯 읽혀, 해주는 손바닥에 닿는 얇은 홑이불을 지그시 거머쥐었다.

계단에서 이어진 발소리가 거실 가운데서 멈췄다. 그리고 재킷을 벗어 소파에 던지듯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술을 많이 마셨다면 소파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를지도. 아니면 2층 냉장고를 열어 물을 마실지도 모르겠다. 그러고는 곧장 그의 침실로 향하겠지.

그의 행동 패턴을 꿰듯이 알고 있는 해주는 그저 씁쓸한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그의 발소리가 방향을 달리했다.

그의 침실로 향한다면 발소리가 멀어져야 할 텐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의 묵직한 발소리는 그녀의 침실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불을 거머쥔 손에 힘이 더해졌다.

이윽고 침실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조명 하나 켜지지 않은 방은 달빛만이 고즈넉이 흘러들고 있었다. 그 달빛에 비친 은호의 그림자가 그녀의 침대를 향해 길게 드리워진 순간, 해주는 마른침을 소리 없이 삼켜야 했다.

‘왜 여길 또…….’

차마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한 해주는 차라리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숨죽인 발소리가 그녀의 침대로 이어졌다. 그리고 점점 짙어지는 그의 향기.

평소 그가 쓰는 시트러스 계열의 향수가 체향과 어우러져 매혹적인 향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도대체 뭘 하려고 이러는지. 바로 곁에서 느껴지는 그의 기척에 해주는 숨을 죽였다.

“지해주.”

그가 그녀의 이름을 가만히 읊조렸다.

공기가 지척까지 다가온 그의 숨결을 전해 준다.

오늘 그가 마신 술은 코냑인 모양이다. 그의 숨결에서 스모키한 우드 향이 은은히 느껴졌다.

“해주야.”

그의 목소리로 듣는 제 이름이 어째선지 애달프다.

대답해야 할까 망설이는 찰나 그의 손이 그녀의 뺨에 닿았다.

당황한 뇌보다 일렁이며 달아오르는 심장이 빨랐다.

눈꺼풀을 살며시 들어 올리자 침대 곁에 바짝 다가서서 그녀를 내려다보는 은호의 짙은 눈빛을 마주할 수 있었다.

이렇게 은호의 눈을 마주할 때면 새벽의 검푸른 하늘이 떠오른다.

검다 못해 시리기까지 한 그의 눈동자가 어째선지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11월 초순.

찬 바람이 불어 드는 이 계절에 해주의 방이 뜨겁게 느껴진 건 착각일 것이다.

그가 다시 한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해주야.”

“은호 씨?”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걸까. 순간 불안한 생각이 들어 해주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이었다.

조물주가 심혈을 기울여 섬세하게 조각한 아름답고도 날렵한 그의 얼굴이 그녀에게로 천천히 기울어졌다.

그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기도 전에 뜨거운 입술이 맞물렸다.

“읍.”

놀란 해주가 몸을 들썩이자 은호의 손이 그녀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감싸 안았다.

입술만큼 뜨거운 손, 손보다 더 뜨거운 가슴.

얇은 아사 잠옷 너머로 느껴지는 그의 단단한 가슴에 심장이 파도를 탔다.

그리고 뜨겁게 맞물린 그의 입술이 마치 춤을 추듯 움직였다.

어찌할 바 몰라 파들거리며 떨리는 입술에 낯선 감각이 스치자 그녀가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의 품에 더 깊게 파묻힐 뿐이다.

뜨겁고도 말랑한 입술이 그녀의 것을 부드럽게 희롱했다. 축축한 감촉이 입술을 훑고 지나자 등줄기에 아찔한 전율이 일었다.

그녀의 입술을 머금은 은호가 부드럽게 빨아들이듯 움직이더니 이번에는 맛이라도 보는 것처럼 느긋하게 음미했다.

그의 매혹적인 체향에 머리가 어지럽고 그의 입술에 남은 코냑의 향취에 코끝이 아련해졌다.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숨이 가빠지는 것은 그의 취기가 그녀에게 전해져서일까.

더는 숨을 참을 수 없어 가쁜 호흡을 토해 내자 그녀의 입술 사이로 그가 밀려들었다.

“으흡.”

입 안에서 살덩이가 얽히고 타액이 섞여 든다.

부드럽게 움직이던 입술이 거칠어지며 그의 턱이 격렬하게 움직였다.

밀어내고 뿌리쳐야 마땅한데,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파고드는 키스가 한없이 뜨거워서. 입 안에서 터져 나오는 이 아찔하고도 생소한 감각이 미칠 듯 좋아서 해주의 의식은 까마득히 저물어 갔다.

그녀가 퍼뜩 정신을 차린 것은 입술이 주는 아찔함에 젖어 든 틈을 타 잠옷 속을 헤집는 그의 손 때문이었다.

다리가 얽히고, 어느새 허리까지 말려 올라간 잠옷 속으로 그의 뜨거운 손이 맨살을 더듬어 올랐다.

“은호 씨.”

이름을 불러 보았지만, 입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로 인해 목소리가 새어 나오지 못했다.

타액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고 여린 점막이 거칠게 쓸리는 그때, 잠옷을 파고든 그의 뜨거운 손이 좀 더 깊은 곳에 이르렀다.

“으, 은호 씨.”

간신히 입술을 떨쳐 낸 해주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멈출 생각이 없는지, 은호의 입술은 그녀의 목덜미를 깊숙이 탐했다.

풍만한 몸을 터질 듯 움켜쥐자 입술을 가르며 야릇한 탄식이 흘렀다.

쇄골을 지분거리던 입술의 움직임이 아래를 향하고, 그의 또 다른 손이 다른 곳을 파고들었을 때다.

터질 듯한 제 심장이 뿜어내는 열기가 두려워진 그녀는 있는 힘껏 그를 밀어냈다.

“하지, 하지 말아요.”

움직임이 멈췄다.

아슬아슬하게 그의 손이 닿은 은밀한 곳에 소름이 돋았다. 아니 온몸의 솜털이 전율하듯 솟구쳤다.

“이러지 말아요. 왜 이래, 갑자기.”

해주가 울먹이듯 말했다.

순간, 대답 없는 은호가 그녀 위로 물먹은 솜처럼 몸을 늘어뜨렸다.

“은호 씨?”

설마 잠이 든 건가?

몸을 움직여 보려 했지만 187cm를 넘어서는 장신의 남자를 떨쳐 내기란 역부족이었다. 간신히 고개만 움직여 제 가슴에 입술을 기댄 그를 눈에 담았다.

빽빽한 속눈썹을 가지런히 내린 은호는 곤한 잠에 빠져든 듯 보였다.

“하!”

기가 막힌 나머지 해주는 실소하고 말았다. 키스, 아니, 그 이상의 짓을 하다가 잠이 들어 버리다니.

안도인지 아쉬움인지. 그녀의 입술에서 가느다란 한숨이 흘러나왔다.

“차은호 씨, 왜 이래?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있는 힘껏 그를 밀어 옆으로 누인 해주는 일어나 앉으면서 엉망으로 헝클어진 매무새를 추슬렀다.

가슴에 불이라도 붙은 듯 그의 손이 닿았던 곳이 뜨거웠다.

온몸의 신경세포가 그의 키스와 터치로 아우성을 질러 댔다.

그녀의 침대에 누워 잠이 든 은호를 바라보며 해주가 제 입술을 어루만졌다.

차은호의 키스.

얼얼하고도 짜릿한 감촉에 먹먹해진 해주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차은호 씨, 이거 계약 위반이야. 알아요?”

차은호. 이 남자와 결혼한 지 2년 하고도 11개월.

첫 키스였다.

* * *

토요일 아침.

9시 정각에 차려진 아침 식탁에 정갈하게 매무새를 갖춘 해주가 자리했다.

비즈니스에 임할 때는 빈틈을 보이지 말라고 배운 해주다.

결혼 기간 2년 11개월. 날수로는 1083일.

그 긴 시간 동안 은호 앞에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던 해주답게 오늘도 완벽한 모습이었다.

정갈한 셔츠블라우스에 에이치라인 스커트를 입은 해주는 우아한 자태로 다이닝룸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은호가 다이닝룸에 모습을 드러냈다.

새벽녘 그녀의 방에 난입했던 모습 그대로인 은호는 어제 입었던 팬츠에 구겨진 셔츠 차림이다.

셔츠 단추가 두 개쯤 열린 것은 혹시 목이 졸릴까, 그를 위해 그녀가 베풀어 준 아량이었다.

제 방을 침입해 계약 위반을 서슴지 않은 차은호를 위해 셔츠 단추를 풀어 주고, 벨트 버클을 풀어 주었다.

그러다 시선이 닿게 된 그곳.

거대하게 부푼 남자의 앞섶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았기에, 해주는 밤새 잠들지 못했다.

저도 모르게 또다시 그곳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던 해주는 얼른 고개를 들었다.

헝클어진 매무새에도 독보적인 고혹미를 뿜어내는 은호를 바라보며 해주가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은호의 까만 눈동자가 느른하게 시선을 맞춰 왔다.

“굿 모닝.”

붉은 입술 사이로 조금은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날 아무리 늦게 들어와도 아침이면 어김없이 그녀와 다이닝룸에 마주 앉아 아침 식사를 하는 차은호.

계약 조항의 일점일획도 소홀히 하지 않는 남자다.

그런데, 그런 그가 처음으로 계약을 위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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